독립운동가를 알리는 활동을 하고 있는 정상규 작가의 페북에서 발췌하였습니다. 무궁화 사진을 제외하고 모두 정 작가님의 글입니다.
『두 얼굴의 무궁화』를 읽었다.
지금부터 비판을 시작하려 한다.
무궁화 = 일본화, 그러니 무궁화를 없애야 한다?
최근 개인적으로 힘든 일이 있어 잠시 가족과 휴식 시간을 가졌다. 몇 년 만에 보내는 시간이었는데... 그런데 어느 지인 분이 보내준 『두 얼굴의 무궁화』를 보며 기가 차서 휴가를 완전히 망쳤다. 또 하나의 반일종족주의를 보는 기분이었다.

합리적으로 조목조목 비판을 하고 싶으나, 지문의 한계상(스크롤 압박) 무궁화를 ‘무궁화’라고 한 옛 문헌이 없다는 저자의 주장을 반박하는 것으로 시작해보려 한다. 사실 이 부분이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고, 나머지는 식물의 종에 대한 이해와 단재 신채호 선생에 대한 오해와 관련된 부분이다.
우선 『두 얼굴의 무궁화』는 역사의 연속성을 고려하지 않은, 구한말과 근현대사 사료 일부를 맹신한 저자의 실수로 보인다.
고려시대부터 조선사 전체를 심도있게 연구했다면 이런 실수는 나오지 않았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들었고, 그러한 잘못된 주장에 일부 보훈단체에서 마치 친일-친나찌 안익태의 애국가 논란처럼 국화를 바꾸어야 한다는 '친일잔재청산' 부류의 주장이 나오는것은 더 큰 문제이다.
더욱이 김원웅 광복회장님의 감수의 글에서 "우리 국민 대다수는 무궁화를 한민족 전통의 나라꽃으로 잘못 알아왔다"면서 "무궁화를 삼천리 금수강산에 보급하는 것이 일제 식민지 정책과 연결돼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충격에까지 빠졌다"는 부분은 많은 아쉬움이 남는다.
어쩌면 이러한 독립운동 관련 보훈단체의 주장이 없었다면 이 글을 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진실이 알려지면 또 얼마나 '좌파의 무지'라는식 비난이 봇물처럼 쏟아지겠는가? 이대로는 또 수많은 국민이 '무궁화=일본화'라는 그릇된 생각으로 왜곡된 애국심에 우리 국화를 욕하는 일이 생길지 모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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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문헌에 나오는 무궁화 팩트 체크
『두 얼굴의 무궁화』의 저자는 말한다. “후일 일제와 식민사관에 의해 원문에 마음대로 괄호 열고 ‘무궁화’를 넣고 괄호 닿고 변조한 무궁화 가짜 텍스트 말고는 한글로나 한자로나 ‘무궁화’, ‘無窮花’로 표기된 사례는 전혀 없다.”(p211)
그리고 또 말한다.
“이상희가 쓴 『꽃으로 보는 한국 문화3』는 근세조선에 들어와서는 한글로 ‘무궁화’라고 쓴 예를 여러 군데 볼 수 있다며 『동의보감』; 木槿-무궁화를 그 한 예로 들고 있다. 그러나 허준의 1613년 『동의보감』은 전부 한자로 기록되어 있으며 한글은 단 한글자도 없는 한자전용 한의학 서적이다.“(p.212)”
저자의 주장에 따르면 옛 문헌에서 무궁화(Hisbiscus syriacus)를 한글로 또는 한자로 표현한 것은 없고 한글 ‘무궁화’ 또는 한자어 ‘無窮花’는 일제와 친일파 윤치호가 만들어 낸 이름이라고 한다. 과연 그러한가?
아래는 일제강점기 이전까지 무궁화를 한글 또는 한자로 표기한 옛 문헌들(다 찾지는 못하였다. 접근 가능한 것만을 중심으로 추렸다).
– 『동국이상국집』(1241) : 槿花, 無窮, 無宮
– 『항약집성방』(1433) : 木槿, 無窮花木
– 『사성통해』(1517) : 木槿花, 무궁화
– 『훈몽자회』(1527) : 槿, 蕣英, 木槿花, 무궁화
– 『동의보감』(1613) : 木槿, 무궁화
– 『주촌신방』(1687) : 木槿, 무궁화
– 『역어유해』(1690) : 木槿花, 무궁화
– 『사의경험방』(17세기) : 木槿, 무궁화
– 『산림경제』(1715) : 木槿, 舞宮花
– 『방언집석』(1778) : 木槿花, 무궁화
– 『본사(1787)』 : 木槿, 無窮花
– 『화암수록』(18세기 말) : 木槿, 蕪藭花
– 『재물보』(1798) : 木槿, 무궁화
– 『물보(1802) : 木槿, 무궁화
– 『광재물보』(19세기 초) : 木槿, 무궁화
– 『몽유편』(1810) : 木槿, 무궁화
– 『물명고』(』1824) : 木槿, 椴, 무궁화, 櫬, 蕣, 日及
– 『동언고』(1836) : 木槿, 무궁화, 無窮花
– 『오주연문장전산고』(185?) : 木槿花, 瘧子花, 裹梅花, 無窮花
– 『자류주석』(1856) : 橓, 槿榮, 무궁화
– 『명물기략』(1870) : 木槿, 목근, 無窮, 무궁, 無宮
– 『의휘』(1871) : 槿花/무궁화/無窮花
– 『국한회어』(1895) : 無窮花, 무궁화
– 『일용비람기』(19세기) : 木槿, 蕣, 무궁화
– 『자전석요』(1906) : 槿, 木槿, 무궁화
이 많은 옛 문헌의 저자들이 일제에 의해 유포된 식민사관에 찌든 친일파이고 이미 고려시대 말기부터 우리는 일본의 식민지이었다고 해야만, 『두 얼굴의 무궁화』의 저자의 주장이 맞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황당한 주장을 하는 이유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저자는 “동아일보 1925년 10월 21일 2면 ‘근화가 무궁화로 변해 국화가 되기까지’ 참조.”(p.212)라고 하였으므로, 일제강점기 때의 『동아일보』 기사를 근거로 그러한 생각을 한다고 추론해 볼 수는 있을 듯하다.
”근화를 훈화(薰花)라고도 하고 혹은 목근화(木槿花)라고도 하엿스니 목근화를 그 당시 무궁화 비슷이 발음하여 오든 모양이람니다. 이는 지금 일본에서 무궁화 즉 근화를 ‘ムクゲ’로 부르는 것을 보아도 그 당시 발음이 ‘무궁화’ 비슷이 혹은 화뎐되여 ‘무궁화’라고 속향에서 불러 내려 왓는지도 모른다고 학자들은 말함니다. 그러나 근화 즉 무궁화를 지금과 가치 (無窮花)라고 쓰게 되기는 극히 짧은 근대의 일이라 함니다. 아마 지금부터 이십오륙전 조선에도 개화풍이 불게 되여 양인의 출입이 빈번하게 되자 그 때의 선진이라고 하든 윤치호(尹致昊)씨 등의 발의로 ‘우리 대한에도 국가(國歌)가 잇어야 된다고’ 한편으로 양약대도 세우고 한편으로 국가도 창작(?)할 때 태여난 上帝가 우리 皇上도으사 海屋籌를 山가치 싸흐소서 權이 環瀛에 떨치사 億千萬歲에 永遠無窮하소서라는 노래의 부속되여 생겻다고 하는(?) ‘東海물과 白頭山이 마르고 달토록’이라는 애국가의 후렴인 ‘無窮花三千里華麗江山’이라는 구절이 끼일 때에 비로소 근화 즉 무궁화를 ‘無窮花’라고 쓰기 시작한 듯합니다”(『동아일보』, 1925.10.21.자 기사 중에서).
위 『동아일보』 기사는 이제 과거의 것으로 하나의 사료(史料)이다. 그러한 기사가 있었다는 것은 사실(fact)이지만, 그 사료의 내용이 진실하거나 타당성이 있는지 문제는 별개의 것으로 별도의 검증 과정을 거쳐야 한다.
신문기사는 지금도 오류가 많은데 취재 방법이 매우 제한적이었던 1925년에는 오죽했겠는가? 더욱이 1920년대 동아일보다.
한자어 ‘無窮花’가 개항기에 비로소 생겨났다는 위 기사 내용은 앞서 살핀 옛 문헌의 기록에서 확인되듯이 전혀 사실이 아니다. 그런데 위 『동아일보』 기사를 자세히 보면, (i) ‘무궁화’라는 한글 명칭은 한자어 木槿花(목근화)의 옛 발음(그 당시)에서 유래한 듯하고, (ii) 그것을 한자로 ‘無窮花’로 쓰기 시작한 것은 개항기인 듯하다는 것이다. 개항기에 쓰기 시작한 것은 한자 표기라는 것이고, 그것도 ‘듯합니다’라는 추정이다.
그런데 『두 얼굴의 무궁화』는 “즉 구한말 윤치호가 ‘무궁화(無窮花)’를 쓰기 전 ‘근(槿)’, ‘목근(木槿)’, ‘근화(槿花)’말고 한글로나 한자로나 ‘무궁화’, ‘無窮花’로 쓴 문헌은 단 한 건도 없다”(p.212)라는 확신으로 비약하여, 추정적 기사의 내용을 다시 확대 왜곡하여 제시했다.
이러한 사료읽기는 진실과 타당성 여부를 확인하여 결론을 얻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 정해진 결론을 위해 일부만을 차용하거나 논리 비약과 왜곡조차 감내하고자 할 때 주로 발생한다. 불행하게도 『두 얼굴의 무궁화』에서 나타나는 사료읽기의 상당 부분은 이러하다.
위에서 살펴본 문헌은 한글명 ‘무궁화’와 한자어 ‘無窮花’만이 나타나는 것에 한정한 것이다. 더 있겠지만 하나도 없다는 그의 주장과 달리 필자가 찾은 것만 문헌이 25개나 된다. 무궁화를 일컫는 다수의 한자어까지 포함하면 다양한 역사서, 개인문집 및 시 등에서 무궁화를 언급한 논한 자료는 수없이 찾아 볼 수 있다.
한편 저자의 주장에 따르면 『동의보감』(1613)은 한자전용 한의학 서적이기 때문에 한글은 한 글자도 없다고 한다.
아래 첨부파일을 확인 바란다.

『동의보감』의 탕액편(湯液編) 권지3(卷之三)의 목부(木部)에 나오는 내용이다. 판본은 상이하지만, 한자어 木槿(목근)에 대한 한글명으로 분명하게 ‘무궁화’라고 기재되어 있지 않은가?
『동의보감』은 1613년 초간본이 간행된 이후 여러 차례 중간본과 복간본이 간행되었다. 17세기 이후 동아시아에 중요한 의학서적으로 자리매김했기 때문에 중국에서도 별도로 간행되었고 일본에서 별도로 간행되었다. 국가 사고(史庫)에서 보관하던 초간본도 상당히 많이 남아 있고(대개는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각 판본들도 남아 곳곳에서 보관 중이다.
당대에 한·중·일의 동북아 3국에서 의학서적으로서 권위를 확보하였기 때문에 각 간행본은 신중을 기해 이루어졌고 각 판본 사이에 표기의 차이는 거의 찾을 수 없을 정도이다. 비교를 위하여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과 서울대규장각 한국학연구소 소장본을 함께 첨부했다.
굳이 초간본이나 여러 판본을 비교할 필요도 없다. 그냥 서점에 가면 『동의보감』의 번역본이 여러 종류가 있고, 대부분의 번역본에는 원본이 함께 수록되어 있다. 단 한 차례라도 『동의보감』을 읽은 사람이라면 한글 명칭이 없다는 주장은 감히 할 수가 없다. 이건 정말 너무 하지 않는가?
아래 사진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동의보감』의 표기 방법은 한글로 번역한 언해본도 국문과 한문을 함께 쓰는 국한문혼용체도 아니다. 『두 얼굴의 무궁화』의 저자가 주장하는 것처럼 한자전용의 한의학 서적이 맞다.
그런데 한글 이름이 왜 있을까? 12세기 중국의 송나라가 몽고족의 침입으로 남쪽으로 이동하는 등 국제 정세가 복잡해지자 당시 고려는 중국으로부터 약재를 수입하는 것이 불안정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고려로 하여금 왕실부터 민간인에 이르기까지 사용할 주요 한약재를 한반도에서 나는 향약으로 대체하는 것이 절실했다(현재의 표현을 쓰자면 약재의 ‘국산화’).
원나라와 명나라의 교체기에 성립한 조선도 상황은 마찬가지이었다. 13세기 고려 시대에 편찬된 『향약구급방』(1236년 추정)은 한자전용 한의서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약재의 채집과 유통의 편리를 위해 한약명(식물명 포함) 중 한반도에서 생산되는 약재를 사용할 때에는 당시 고려에서 사용하는 명칭(향명)을 함께 한자 명칭에 병기하였다. 이러한 전통은 조선 초기의 『향약채취월령』(1431)과 『향약집성방』(1433)에서도 유지되었고, 조선 중기의 『동의보감』(1613)에서도 그대로 이어졌다. 조선 시대에 편찬된 주요 한의서인 『촌가구급방』(1538), 『주촌신방』(1687), 『사의경험방』(17세기), 『광제비급』(1790), 『제중신편』(1799), 『의종손익』(1868), 『의휘』(1871), 『방약합편』(1884) 및 『의방합편』(19세기) 등이 모두 그러하다.
문헌마다 차이가 있는 것은 한글 창제(1446) 이전에 간행된 문헌의 경우 향명이 이두식 차자(借字)로 표기되었던 반면에 한글 창제 이후에는 한글로 표기되었고, 문헌이 편찬된 시대별도 그 고유 명칭도 변화가 있어 왔다는 것이다.
이왕 『동의보감』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으니 무궁화에 대한 보다 정확한 이해를 위해 1~2가지 사실을 더 살펴보도록 하자. 먼저 木槿(무궁화)라는 표제하의 약재 설명 끝 부분에 ‘本草'(‘本艸’, 본초)라고 기록된 것은 인용된 글귀에 대한 출처 문헌을 의미한다. 이는 종종 오해되듯이 중국 명나라 때에 이시진에 의하여 편찬된 『본초강목』(本草綱目, 1596)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이때 ‘本草'(본초)는 중국 송나라 때에 편찬되었던 당신미(唐愼微, ?~?)의 『경사증류비급본초』(經史證類備急本草, 1082)을 비롯하여 이를 확대 증보한 『대관경사증류비급본초』(大觀經史證類備急本草, 1108)』, 『정화신수증류비용본초』(政和新修證類備用本草, 1116)』와 『소흥교정경사증류비급본초』(紹興校定經史證類備急本草, 1159)』를 총칭한 소위 『증류본초』(證類本草)라고 일컫는 문헌을 뜻한다.
이러한 점은 『동의보감』, 『증류본초』 및 『본초강목』의 내용을 비교해 보면 명확하다. 또한 『동의보감』의 편찬은 1596년에 시작되었는데 그 해에 중국에서 『본초강목』이 간행되었으므로 당시의 문물이 교류되던 사정에서 『본초강목』은 애초에 참고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도 하였다.
즉 『동의보감』은 중국이 자랑하는 의학서인 『본초강목』의 영향 없이 별도로 작업되고 완성된 저작이었다. 행여 『두 얼굴의 무궁화』의 저자와 그 추종자들이 자신의 주장을 이어가기 위해 『동의보감』까지 비하하거나 낮추어 취급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러나 이 역시 허망한 기대일지도 모르겠다.

또한 『동의보감』의 각 약재명의 머리 부분에 ‘唐'(당)이라는 표식이 된 부분이 있다. 이것은 해당 약재가 국내에서 야생하는지 여부가 당시에는 확인되지 않았고 재배에도 성공하지 못하여 여전히 중국(唐)으로 수입되는 약재라는 것을 뜻한다. 『동의보감』의 木槿(무궁화)의 머릿부분에는 ‘唐'(당)이라는 표식이 없다. 따라서 1613년 당시 무궁화는 이미 국내 재배가 이루어져 중국으로부터 수입할 필요성이 없었다는 것을 뜻한다.
(다음 글에 계속)
출처 : 정상규 작가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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