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자신들의 나라를 ‘태양이 떠오르는 근원[日出之本]’이라 부른다. 중국과 마찬가지로 동북아의 주인이자 인류의 중심으로 자처하고 있다.
이러한 일본에 의한 한국사 파괴는 언제 어떻게 진행되었을까? 19세기 중반 메이지유신으로 근대화를 시작한 일본은 세계 제패의 꿈을 키우며 조선을 대륙 진출의 발판으로 삼고자 했다. 이를 위한 조선 침략에 앞서 일본은 먼저 식민주의 사관을 확립하였다. 일제 식민주의 사관은 조선 침략과 지배를 합리화하기 위한 사전 작업으로 생겨난 것이다. 조선의 역사 전체를 식민지 역사로 꾸며 조선인 스스로를 열등감과 자기 비하에 빠지게 하여 조선을 영원히 지배하겠다는 것이 일제 식민사관의 요지이다.
식민사관의 확립을 위하여 일제는 19세기 후반에 자국의 사학자들로 하여금 한국사를 연구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일본의 대학에는 ‘조선사 강좌’가 설치되고 논문과 저서가 속속 간행되었다. 김용섭, 『역사의 오솔길을 가면서』, 480쪽, 497쪽.
일본인이 한국사를 이른바 근대 역사학의 방법론을 내세워 주관적으로 서술하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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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연구를 반석에 올려놓은 일본 학자는 하야시 다이스케林泰輔 동경대학을 졸업한 하야시(1854~1922)는 서양사학의 편찬체제를 모방하여 1892년에 『조선사』 5권, 1901년에 『조선근세사』 2권을 저술하였다. 한국사를 철저히 유린한 하야시의 저서는 오늘날까지도 일본에서 한국사 연구의 지표적 존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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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라토리 구라키치白鳥庫吉 동경대학 사학과 출신인 시라토리(1865~1942)를 사가史家로 대성시킨 사람은 당시 동경대 초빙교수이던 독일인 리스L. Riess이다. 리스는 실증사학의 거두인 랑케의 제자로 사료비판적인 독일사학의 방법을 일본에 이식시켰다. 시라토리는 일본 사학계를 주름잡는 거물이 되어 한국사에 관한 식민주의 역사학을 수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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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다 도쿠조福田德三 후쿠다(1874~1930)는 독일에서 경제학을 배워 경제학 측면에서 식민사학을 수립하였다. 한국인의 민족성을 소멸시키고 일본에 동화시켜야 할 사명이 일본인의 운명이라고 주장하였다.
세 사람은 독일에 직접 유학을 하거나 일본 내 대학을 다니면서 실증주의 사학을 공부하였다. 실증주의 사학은 조상의 무덤과 집터에서 나온 유물을 검증함으로써 문헌에 기록된 역사적 사실을 고증한다. 그리고 고증되지 않은 기록은 불신한다. 실증사학을 배운 이들은 한민족의 시원역사인 환국·배달·옛[古]조선 시대를 신화 시대로 만들어 버리고, 그 대신 BCE 2세기 때의 ‘위만정권과 한사군漢四郡’ 시대를 한민족의 첫 역사라 정의하였다.
일본은 또한 남만주철도주식회사를 설립하고 거기에 조사부를 설치하여 만주와 한반도의 역사와 지리에 관한 조사를 하였다. 이마저도 그 목적은 한국인의 뿌리 역사를 말살하고 그 자리를 ‘중국과 일본의 식민지 역사’로 채우는 데에 있었다.
1910년에 한국을 강제 병탄한 일제는 자국의 학자를 대거 조선으로 데려왔고, 1920년대에 그들을 중심으로 조선사편수회를 조직하였다. 조선사편수회를 내세워 일본은 ‘조선 역사는 중국과 일본의 식민지에서 시작되었다’는 이론을 더욱 공고히 하였다. 한반도의 북쪽은 ‘한사군’이라는 중국의 식민지였고, 남쪽은 ‘임나일본부’라는 일본의 식민지였다고 하였다.
또한 상고 이래의 한일교섭사 중에 일본에 불리한 내용은 기록과 유물을 조작하여 모두 은폐하였다. 임진왜란을 마치 일본이 승전한 것처럼 기술하고, 광개토대왕비의 비문과 칠지도七枝刀에 새겨진 명문銘文을 조작하였다.
자료 출처 : 환단고기 역주본(상생출판) 등
박찬화 기자 multikorea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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