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우는 고조선의 전(前)나라인 배달국 14대 자오지 천황이다. 환단고기에 의하면 배달의 영토를 가장 넓게 개척하셨고 서방 한족을 동방신교로 다스려 천자문화를 전해준 대제왕이시며 병법의 비조이다.
지금까지도 민초들이 군신(軍神)으로 공경하고 마을을 지키는 장승이나 도깨비 이미지로 형상화하여 우리를 지키는 만고의 수호신이다.
중국시조격인 황제 헌원과 10년 동안 탁록에서 무려 73회나 전쟁을 치렀다고 하니 가히 경천동지한 격변기의 주인공이다. 승패에 대해서는 사마천의 사기와 환단고기의 역사적 서술이 상반되어 나타난다.
그러나 여러 가지 기록으로 보아 마지막 탁록대전에서 대승을 거두어 황제 헌원을 사로잡아 신하로 삼았다는 환단고기의 기록이 더욱 신빙성이 있다. 지금까지도 중국인들의 숭배의 대상이란 점에서 더욱 그렇다.
우선 송나라 장군방이 쓴 사서 운급(雲笈)의 헌원기에 보면 ‘치우가 처음으로 갑옷과 투구를 만들었는데 당시 사람들은 이를 알지 못해 동두철액(銅頭鐵額)으로 비유하며 공포와 외경의 대상’이라 했다.
당시 중국병정들은 한갓 화살과 돌팔매만 믿고 갑옷의 사용을 알지 못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치우천황은 철을 캐내어 병장기를 만들만큼 탁월했고 신비로운 법력을 가진 사람으로 두려운 마음이 들고 간담이 서늘하여 싸울 때마다 크게 이겼다고 기록했다.
한서지리지에는 지금 치우의 능은 산동성 동평군 수장현 궐향성에 있으며 높이는 7장(丈)이라 한다. 주민들이 10월에 제사를 지냈는데 무덤에서 붉은 기운이 진홍색 비단처럼 뻗치므로 이를 치우기(蚩尤旗)라 불렀다.
월드컵 경기 때마다 우리나라 응원단이 흔드는 붉은 깃발이 치우천황기이고 ‘붉은 악마’라고 부르는 이유다.
중국고대사를 종합한 관자(管子)도 치우천황이 한 번 싸우면 시체가 산야에 가득하였다고 기록했다. 또한 사마천의 사기에도 진시황이 팔신제를 지낼 때 치우천황을 신으로 모셨으며 한고조 유방도 군사를 일으킬 때 치우천황에게 제사를 지내고 북과 깃발을 피로 물들게 했다.
유방이 천하를 얻어 제위에 오른 뒤에도 장안에 사당을 짓고 치우천황을 더욱 공경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런 중국고대사의 기록들은 탁록전쟁에서 치우천황이 승리한 장수인 것을 말해주는 방증들이다.
당시의 승자가 헌원이고 치우가 사로잡힌 패장이라면 천년을 넘어서도 중국인들의 전설적인 군신으로 살아있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치우천황은 불세출의 영웅이었다. 그는 채광기계인 구치(九治)를 만들어 캐낸 철을 녹여 무기를 만들었고 청동기문화를 이룩했다. 그런데도 사마천은 왜 사기에 치우를 사로잡았다고 역사를 뒤집어서 기록했을까? 중국시조인 헌원을 동북아의 주도권자로 만들기 위해서다. 천자가 되어야 중국이 천자의 나라가 되기 때문이다.
적의 역사를 깎아내리고 중국역사를 치켜세우는 전통적인 방식을 춘추필법(春秋筆法)이라 한다. 공자가 쓴 춘추에서 비롯된 말로써 역사를 서술할 때 중국이 천하의 중심임을 정당화하기 위해 대의명분을 내세우면서 그럴듯하게 조작하여 서술하는 방식을 말한다.
그러나 홍산문화의 발굴로 치우천황이 역사적 인물로 다가왔다. 기원전 3, 4천 년 전의 동이문화가 햇빛을 보게 된 것이다. 홍산이란 지명도 철광석으로 뒤덮여 산 전체가 붉게 보인다는 데서 유래했다.
지금 탁록에 가면 중화삼조당이란 사당을 지어 염제, 헌원, 치우를 중국의 조상으로 모셔놓고 있다. 어처구니가 없고 춘추필법이 무색해지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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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갈태일 한문화연구회장, 칼럼니스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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