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후 강진구 선생은 부여 장형리에 천조궁天祖宮을 건립하고 솔거본 단군 천진을 모셨다. 강진구 선생이 타계하고 나자 그의 아들 강현구 선생이 분실을 우려해 부여박물관에 기탁하여 보관해 오던 것을 2002년에 찾아내었다. 크기는 가로33.6cm, 세로 53.3cm로 산수 인물화의 대가인 백련 지운영화백이 1910년에 솔거본의 단군 영정을 모사하여 그 해 8월 21일에 봉안하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 후 해방이 되자 지운영의 장남인 지성채화백이 이를 다시 모사하여 대종교 총본사에 봉안케 되었다. <동사유고> 등 옛 문헌에는 신라 말 솔거가 단군 영정을 그려 민간에서도 모신 것으로 기술되어 있다. 솔거의 단군 영정은 불교와 유교 국가인 고려와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대부분 소실되고 대종교에서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대종교는 나철이 중광 하였으며 대종교의 발상지는 지금의 서울 종로구 재동초등학교 터에 있던 초가 3칸이었다.
그 후 나철이 만주로 가서 총본사를 설치하여 독립운동을 하였고 조선에는 남도본사를 맡은 호석湖石 강우姜虞가 단군 영정을 부여 본가의 다락방에 보관해 두었다가 1932년 작고하면서 큰아들 소석小石 강진구姜鎭求에게 “저 다락 속에 감추어 둔 천진(단군영정)을 잘 보존하라.”고 유언으로 남겼다고 한다. 이로 미루어 보아 나철과 같은 도반이었던 강우가 그의 아들 강진구에게 전한 것이 다시 손자인 강현구에게 전해졌다가 보관상의 어려움 때문에 부여 박물관에 기탁하였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잠깐 단군교를 중광하게 된 내력을 살펴보면 대략 아래와 같다. 1904년 개천제날 백두산 대숭전에서 33인의 선도가 백봉대신사白峯大神師를 모시고 단군 포명서를 선포하였다. 나철은 1905년 그 당시 서울역(지금의 서대문 4거리, 그 당시에는 서울역이 그곳이었다. 이것이 혼동을 일으켜 어떤 이는 지금의 서울역이라 하고 어떤 이는 지금의 서대문 4거리라고 주장하는 빌미가 되었다)근처에서 백전佰佺이라는 노인으로부터 <삼일신고>와 <신사기>를 전해 받고 그 후 1908년 12월 9일 일본 도쿄 개평관에서 또 단재檀齋 정훈모와 함께 백봉의 제자 두일백杜一伯으로 부터 단군심계檀君心戒를 받는다.
이듬 해인 1909년 1월 15일 한성부 종로 재동 8통 10호 초가(지금의 재동 초등학교 터)에서 단군교를 중광하였다. 1910년 나철은 ‘대종교’로 개명하고 경술국치 직전에 만주 청파호로 옮겨간다. 이에 정훈모는 ‘단군’이라는 존호를 절대로 바꿀 수 없다고 하면서 국내에서 포덕에 전력하였다. 1915년 소의경전 ‘조화경’ ‘교화경’ ‘치화경’의 3대 경전인 ‘개천경’을 갖추었다. 1916년 5월 15일에는 ‘단경檀經’과 ‘단전檀典’을 홍갑표 단군교 총 본부장이 간행하였다..
1910년 경술 합방이 되던 해 3월 15일 한 밤중에 나철에게 강원도 명주군 석병산에 살고 있다는 노인이 찾아왔다. 그는 누런 비단에 싼 오래된 단군 영정을 주면서 “우리 집에서 대대로 내려온 솔거의 유일본이오. 내가 99세에 죽을 것인데 이 영정을 전해줄 이가 없어서 103살까지 기다렸노라”라고 하였다. 대종교를 개창한 지금의 재동 초등학교 터에 나타나서 나철에게 그 노인이 전해준 영정이 바로 부여 박물관에서 발견된 진본 단군 영정의 모체이다. 그 노인이 전해준 영정은 그 후 지금까지 행방이 묘연하며, 그것을 모체로 하여 종두법을 개발한 지석영의 형 지운영 화백이 그린 단군 영정을 한일합방 바로 전날인 1910년 8월 21일 날 봉안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일제 통치기간 동안 몰래 몰래 모셨던 이 영정을 광복이 되자 1949년 제헌 국회에서 국조 성상으로 공인하였다. 그 후 표준 영정을 둘러싸고 다시 시비가 일자 1976년 6월 14일자로 문화공보부 장관으로부터 <문화 1740-8790호>로 대종교의 그 단군 천진을 <국조 단군 표준 성상>으로 심사하여 승인하였으며 또 1976년 12월 28일에는 <문화1740-19226호>로 “대종교 총본사에서 제작한 것만을 존중하기로 확인함”이라는 단군영정 제작 확인까지 받았었다.
단군의 풀잎제복은 조선시대 왕의 제복인 곤룡포와 같다. 그러므로 그것이 표준영정이 되어야 함은 당연하다. 풀잎제복은 우리민족의 시원문화와 사상이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해지고 있는 풀잎영정 중에서도 얼굴과 수염의 모양이 전해오는 솔거본과 다소 다른 영정이 있다. 그것에 대한 연유는 더 확인해 보아야 할 과제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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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훈민정음연구소 반재원 소장 |
【약력】
훈민정음연구소장 / <사>한배달부회장 / 한국땅이름학회명예회장 /국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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