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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주의 봉오동전투 이야기』 최운산의 성장과 배경

연변도태 최우삼 

최운산의 貫籍은 珍山으로 1885년 11월 17일, 연변 道台 최우삼의 2남으로 태어났다. 부친 최우삼은 진산최씨 중시조 崔秀平의 15대손으로 崔鎮榮의 二男, 字는 仁權이다. 1860년 함경북도 온성 출신인 최우삼은 1880년대 초반 두만강을 건너 연길에 자리를 잡았고 道台로 봉직하면서 조선 사람들의 안위를 보살폈다. 道台도태는 도지사나 군수와 같은 한 지역의 행정을 책임지는 관리다.

연변의 사학자들이 저술한 『최진동 장군』을 비롯한 봉오동전투를 연구한 몇몇 논문에서 최진동의 부친 최우삼을 기근을 피해 가족들과 두만강을 건너온 함경북도 유민이며 아들 4형제와 딸 하나를 데리고 와서 왕청현 독찰을 지냈다고 추정하여 설명한다.

그러나 이는 최우삼과 그 집안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생긴 오류다. 그리고 간도가 거대 중국의 작은 지방에 불과하다는 현재적 관점에서 조선인들의 이주사를 기록하고 있는 탓이라 여겨진다. 간도에 대한 연구가 많지 않고,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당시 간도가 중국 땅이었으니 조선인들이 눈치와 견제 속에 살았을 거라는 짐작을 전제로 접근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 간도는 조선이었다. 주민은 대부분 조선인이었다. 중국인은 아주 소수에 불과했다. 간도의 주민들은 중국말을 할 필요조차 없었다. 그들은 간도가 조선의 땅이라고 확신하고 살았다. 1909년 일본과 중국이 맺은 간도협약으로 간도가 중국에 넘어가기 전까지 간도는 조선이었다. 조선인들이 연변지역에서 어떻게 자리 잡고 살았는지에 대한 역사적 기술이 달라져야 할 것이다.

1902년 간도에 거주하던 주민들이 연명하여 조정에 보낸 헌의서에도 자신들의 주소를 함경북도 간도라고 기록하고 있다.
 
최우삼은 조선의 왕족인 전주이씨 부인과 혼인하였고 후손들이 정확한 촌수를 알고 있지 못하나 서울이 친정인 증조모 전주 이씨 부인은 고종과 가까운 인척이었다. 남편 최우삼에게 존중을 받았으며 자주 친정이 있는 서울로 다니러 갔다고 한다. 후손들은 왕족이라 항상 당당했던 증조할머니에 대한 비사를 많이 듣고 자랐다. 

일찍 간도로 건너가 연변 도태를 지냈으며, 장남 최명록(최진동)을 비롯한 4남 2녀의 자식을 두었다. 1800년대 후반 청나라는 연변지역을 점유하기 위해 한족을 간도로 이주시키는 정책을 폈고 조청간의 분쟁이 생겼다. 연변도태 최우삼은 조선인의 자주와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연변지역에서 청나라 사람들을 쫓아내며 청나라에 대항하여 군사를 일으켰다. 당시 ‘도태의 난’이라고 불렸던 최우삼의 무력충돌은 단순한 저항이 아니라 간도지역이 원래 조선의 땅임을 주장하는 것을 넘어 고토회복의 의지를 마음에 담았던 역사적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그는 중국의 군사력을 모르는 바 아니나 그 당시 정세변화의 시기를 이용하여 간도가 조선의 땅임을 천명하고자 목숨을 걸고 군사행동을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군사적 열세로 패하였다. 전통무술 고단자인 지인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한 최우삼은 명록과 명길 두 아들을 데리고 두만강을 건너 피신하였다. 그러나 어머니 청주 한씨가 아들 대신 잡혀갔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연길로 돌아와 자수하고 감옥에 갇히게 된다. 어머니 청주 한씨 부인과 가족들은 모든 가산을 정리하여 세 항아리의 은자로 최우삼을 구해냈으나 이후 경제적 곤궁을 겪어야 했다.

기울어진 집안 형편으로 인해 명록(최진동)과 명길(최운산) 두 아들은 어린 시절 남의 집에서 일을 하기도 했다. 왕정현의 대규모 토지를 소유하게 된 아들 운산이 봉오동을 선택하여 이주할 것을 제안하자 일가를 모두 이끌고 연길을 떠나 아들들과 함께 봉오동에 신한촌을 건설하여 마을의 시조가 되어 독립군기지 봉오동을 건설하였다.    

역사의식과 민족의식이 확고했던 최우삼은 직접 독립정신을 기르기 위한 교육사업 2018년 황평도용봉에 신흥학교를 설립(화룡현양우학교출신 김창학, 경성오성학교출신 김상걸, 남학생 36명)하고 아들들의 독립전쟁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그는 진동, 운산, 치흥 세 아들이 봉오동전투와 청산리 전투를 치른 후 만주의 독립군들을 모두 인솔하여 연해주로 이동한 후에는 러시아로 군자금을 보내주는 등 일생 든든한 조력자로 독립운동에 함께한 독립운동가다. 민족주의자 최우삼은 독립전쟁에 매진하던 최진동과 최운산이 감옥에 갇혀있던 1925년 3월 23일 사망하였다.

최우삼의 장례는 독립군들이 거총 도열한 가운데 독립군장으로 엄숙하게 거행되었다. 최우삼의 묘소는 봉오동에 있다. 
  

 

최운산 형제들 

어릴 적부터 형제간에 우애가 좋고 의기가 통했던 명록, 명길, 명순 3형제는 독립운동에 헌신하기로 의기투합하고 군사적 지식을 익히기 위해 함께 장작림 군벌에서 복무하기도 했다.  간도지역의 유지이며 사회운동가였던 최씨 형제들은 1919년 수천 명의 시위대를 조직하는 등 활발한 항일 활동을 하는 등 각자의 재능과 역량을 총동원하여 독립운동에 충실히 기여했다. 막내 동생 명철은 뒤에서 형님들을 도왔으나 고지식한 가족들은 그가 독립군에 주도적로 참여한 것이 아니라고 그의 이름을 함께 거론하지 않았다.

최운산의 형으로 1883년생인 명록(최진동 장군)은 중국인의 부호 밑에서 일을 하다 뛰어난 일처리로 그의 재산관리를 맡았고 후일 양자로 토지를 물려받아 대지주가 되었다. 활달하고 중국어에 능한 최진동은 간민회 부회장, 광복단 단장 등을 맡았던 지역사회의 명망가였다.

최진동은 만주의 무장독립운동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한명이다. 동생인 명길(최운산), 명순(최치흥)과 의기투합하여 1919년 창설된 대한군무도독부의 사령관인 부장을 맡으며 무장독립전쟁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그는 담대한 카리스마로 독립군부대를 지휘하였다. 일생동안 무장투쟁에 헌신하다 1941년 11월 25일 사망,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에 서훈되었다. 

둘째 명길(운산)은 1885년 연길현 국자가에서 출생하였다. 어린 시절 중국 서당에서 수학하였고 중국어에 능통했다. 당시 간도지역 주민의 대부분이 조선인이라 특별한 이유 없이는 중국어를 잘 사용하지 않아 중국어를 모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최운산은 언어를 배우는데 남다른 감각을 지니고 있었고 중국인들과 유대가 깊었다. 그가 중국어를 하면 중국인과 구별할 수 없었다고 한다. 청년기에 중국군에 복무하기도 했고 뛰어난 중국어 실력을 바탕으로 동북삼성의 지배세력인 장작림 군벌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이후 최운산은 중국과 조선인 사이에서 다리 역할을 하였다.

특히 왕청현 총대(총판)로 일하면서 조선 사람들의 편익을 도모하고 제반 애로를 대변했다. 무장독립운동에 헌신하고 1945년 7월5일 사망했다. 

3남 명순(치흥)은 가정경제를 책임진 두 형의 보호와 지원 아래 형들보다 공부를 많이 할 수 있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소문난 개구쟁이로 기발한 장난으로 집안 식구들을 놀라게 했던 인물이며 지략이 뛰어나 대일 무력투쟁의 중심에서 전략가로서 빛을 발하였다.

북로군정서와 사관연성소 창설 등 최운산이 북간도의 독립군들을 경제적으로 지원할 당시 자금책으로 활동하였으며 자유시 참변 이후 형제들이 북만주를 오기며 새로운 부대 창설에 주력할 때 북간도 흑룡강성 농촌에 머물며 농부로 위장하고 독립군의 비밀연락책 및 자금 운반, 독립군 모집책으로 활동하였다.

형제들과 함께 일제에 맞서 목숨을 걸고 싸웠고, 일본헌병대 습격전, 봉오동전투, 청산리전투 등에서 큰 전공을 세웠음에도 최치흥은 아직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로서 서훈을 받지 못하였다.

 

최운산의 재산 형성 

당시 동북삼성의 지배세력인 장작림군 지휘부와 친밀하게 연대하면서 신임을 얻은 최운산은 왕청현 총대總代/(총판總瓣)로 복무하면서 동삼성 지역이 지적정리를 할 당시 미개척지인 황무지 십여 개 지방을 자신의 명의로 헐값에 사들였고, 조선 동포들과 함께 광활한 토지를 개발 경작하였다.

그 후 봉오동을 위시하여 도문, 석현, 대황구, 양수천자 등 최운산 소유의 여러 지역이 도시로 발전함에 따라 地價가 앙등하여 자산가가 되었다. 대규모 토지를 소유함에 따라 대규모 목장도 운영하였고, 곡물과 축산업으로 대러시아 무역업을 하였다. 최운산 소유 목장의 소들은 대부분 무역도시인 훈춘이나 장춘으로 몰고 가서 팔았는데 매회 수백 마리의 소떼를 몰고 갔다고 한다. 이 소와 곡물은 러시아군의 식량으로 대량 납품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무역활동을 바탕으로 최운산은 연해주를 넘나들며 연해주의 독립군들과 교류하며 그들을 경제적으로 지원하였고 무기를 구입하여 독립군들을 무장시켰다. 

간도의 주민들이 점점 더 불어났고 근대화가 진행되었다. 최운산은 자신의 소유지에 콩기름공장 및 국수공장, 주류공장, 성냥공장, 비누공장을 비롯한 다양한 생필품 기업을 경영하였다. 시대적 소명으로, 그리고 뛰어난 경영 능력으로 당시 간도 제1의 거부가 된 최운산은 이러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만주지역 독립군 부대의 군자금을 대부분 담당하였다. 이상설, 이준, 안중근을 비롯해 국내외에서 만주를 경유하는 모든 애국지사들을 환대하고 지원하였다. 또한 서전서숙 등 북만주 각지의 모든 독립운동에 경제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며 당시 간도지역에서 최운산장군의 지원을 받지 않은 독립운동단체나 애국지사가 없었다고 한다. 계속 재산을 처분하며 마련한 군자금이 1940년대까지 긴 세월 지치지 않았던 만주 무장투쟁의 바탕이 되었다.

 

군사적 지식과 배경 

부친 최우삼이 일으켰던 ‘도태의 난’ 당시 최우삼의 목숨을 구해주었던 무술인은 이후 최우삼의 집에 함께 살면서 아들들의 무술 사부가 되었다. 그는 최운산 형제들과 마을 청년들을 모아 무술을 가르쳤다. 처음 무술 수련을 시작할 때 50여 명이 같이 시작했으나 무술연마 과정에서 난이도가 올라갈수록 인원이 줄어들었다. 

무술수련의 고된 과정을 모두 마치고 마지막까지 남은 사람은 명길(운산) 한 명이었다. 사부는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다고 무술의 전수자로 명길을 인정하였다. 명길은 몸 움직임이 하도 빨라 가족들조차 그가 집에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알 수 없을 때가 태반이었다고 한다. 평생 전쟁터를 누빈 최운산 장군의 무술 실력은 장년이 되어서도 변함이 없었다. 그가 50대였던 어느 날 청년 10명이 커다란 원을 그려놓고 최운산 장군을 공격하며 원 밖으로 밀어내려고 했지만 아무도 그를 치거나 원 밖으로 밀어낼 수 없었다고 한다. 

뛰어난 무술 실력과 총솜씨를 지닌 최운산은 당시 동삼섬 지배세력인 장작림 군벌에서 군사훈련을 책임지는 간부로 일했다. 당시 전투에서 장작림의 목숨을 여러 번 구해주었다. 또한 탄탄한 경제력도 보유하고 있었기에 장작림 군벌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다. 이러한 적극적이고 다양한 활동이 바탕이 되어 중국군과 계속 혈맹의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최씨 3형제가 장작림부대에 함께 복무할 당시 중국군은 최진동은 崔喜, 최운산은 崔豊, 최명순은 崔興이라 칭하였다. 중국군은 근엄한 성격의 최진동 장군이 잘 웃지 않자 좀 재미있게 지내라고 최희(기쁠 喜)라고 불렀고 성격도 여유있고 재력도 있는 최운산 장군을 최풍(풍요로울 豊)이라고 불렀다. 재미있고 장난기 많은 최흥(흥겨울 興)이라고 불렀다. 
 

이후 독립전쟁이 본격화 되었을 때에도 중국군은 일본군의 동태를 제보해주는 등 최씨 형제들이 이끄는 독립군에 대해 특별한 후의로 대하였다. 최씨 3형제가 장작림 군대를 도우며 익힌 군사적 지식과 조직운영에 대한 이해는 후일 대한군무도독부와 통합군단 대한북로독군부를 창설하고 본격적으로 독립군을 정규군의 편제로 체계화하는 일에 큰 도움이 되었다. 

최운산이 어릴 때부터 익힌 무술실력이 드러나는 여러 일화가 있다. 대규모 목장을 운영하고 있던 최운산은 소를 팔 때는 훈춘이나 장춘까지 수백 마리의 소를 몰고 가야 했다. 그런데 당시는 비적들이 횡행할 때였다. 한 번에 100마리 이상의 대규모 소떼가 이동을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비적들의 공격 대상이 될 수 있는 소를 몰고 길을 떠나는 것 자체가 목숨을 위협받는 위험한 일이었다. 일꾼들은 최운산이 동반해야 비로소 안심하고 출발했다. 무술의 대가인 그와 동행하는 것만으로도 여러 문제가 해결되었기 때문이다. 

소를 몰고 길을 떠날 때 최운산은 양쪽 허리에 박달망치와 단도를 찼다. 속에 방탄조끼를 입고 긴 박달봉을 둘러메고 말에 올랐다. 총을 쏘면 소가 놀라서 흩어질까 우려하여 총은 일부러 소지하지 않았다. 혹시나 비적을 만나게 되면 귀신같은 무술실력으로 제압하였다. 박달봉으로 기절시키거나 쫓아버렸고, 비록 비적이라 하더라도 가능하면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고 한다. 

최운산 장군의 사격술에 대해 가족들이 알고 있는 몇몇 에피소드 중 하나는 두만강변의 국경수비대 습격전에 직접 참전하여 뛰어난 사격술로 전화선을 명중시켜 연락이 두절되게 하여 일본군을 긴장시킨 것이다. 또 하나는 어느 날 최운산의 처 김성녀가 마당에 있다가 독수리가 닭을 채가는 것을 보고 소리를 지르자 방에 있던 그가 방문을 열고 뛰어나와 상황을 파악하고 다시 방에서 장총을 가져 나와 날아가는 독수리를 맞춰서 떨어드린 일이다. 그만큼 최운산의 움직임이 빨랐다는 사례로 가족들 사이에 종종 회자되는 일화들이다. 

그리고 최운산 장군이 1920년 3월 온성헌병대 습격전에 직접 참가해서 올린 전과는 그 내용이 일본군의 전투상보에 “독립군이 맹렬히 사격한 탄환은 전화선에 명중, 단선되어 통화불능의 상황에 떨어졌으므로 일시 경찰, 헌병의 전멸을 의심케 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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