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으로 전쟁을 준비하면 가족을 부대와 멀리 떨어진 곳으로 피신시키는 것이 상례지만 최운산 일가는 독립군기지를 건설하기 위한 첫걸음으로 1909년 봉오동 이주를 선택하였다.
아버지 최우삼과 어머니 전주 이씨 부인, 할머니 청주 한씨 부인과 최운산의 형제들과 자식들, 4대의 대가족이 도시인 연길을 떠나 시골 봉오동으로 이주한 것이다.
먼저 산이 병풍처럼 둘러싼 분지 형태의 아늑한 마을을 鳳梧洞이라 이름 붙이고 친척들과 조선 동포들을 불러들여 함께 신한촌으로 건설하였다.
일가가 모두 머물 수 있는 큰 저택을 지었다. 점점 인구가 늘어나고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삶의 터전이 무장투쟁의 근거지로, 저택이 독립군부대의 본부로 발전해 나갔다.
봉오동의 지리적 경제적 조건
봉오동이 군사기지로 발전해 나갈 수 있었던 배경에는 무엇보다 많은 사람들이 함께 거주할 수 있는 지리적 경제적 조건 등 생활여건이 좋았기 때문이다.
봉오동은 가장 기본적인 식량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고려령이라는 산줄기가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분지 형태의 봉오동은 산기슭을 따라 커다란 강이 흐르고 있었기 때문에 토양이 비옥하고 수전농사가 가능했다.
봉오동은 힘을 기르기 위해, 모여든 독립군도 주민들과 함께 벼농사를 지어 식량을 자급할 수 있었다. 또 밭농사로 콩과 옥수수 등 다양한 작물을 풍부하게 수확할 수 있었다. 지금도 만주지역을 둘러보면 광활한 대지를 노랗게 물들이는 옥수수밭이 넓게 펼쳐지는 것을 볼 수 있다.
풍요로운 땅 봉오동은 지리적으로도 사통팔당의 조건을 갖춘 곳이었다. 봉오동은 두만강에서 바로 인접해있어 걸어서도 쉽게 국내와 왕래가 가능한 곳이다.
봉오동 입구의 십자로는 국경도시 도문과 인접해있고 연길, 훈춘으로 가는 길목이다. 또 마을을 지나 뒷산으로 넘어가면 산줄기가 양 갈래로 나뉘어져 연해주와 북만주의 여러 지역으로 이어지는 길과 연결이 된다.
경제적 측면뿐 아니라 지리적 측면에서도 봉오동은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인 것이다. 이러한 조건이 뒷받침되어 봉오동은 대규모 무장독립군의 본거지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1970대 후반 중국 정부가 물이 맑고 수량이 풍부한 봉오동의 입구를 막아 거대한 댐을 건설했다. 현재 이 댐의 물은 도문시를 비롯한 인근 지역의 수자원으로 공급되고 있다. 댐이 건설되면서 상촌, 중촌, 하촌으로 나뉘어져 있던 봉오동 마을의 주민들은 모두 마을을 떠나야 했다.
상촌과 중촌은 댐에서 15리 정도 멀리 떨어졌으나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를 막았고 하촌은 대형 댐 속에 잠겨버렸다. 봉오동의 주민들은 댐 아래 마을 수남촌이나 도문시로 이주하거나 먼 도시로 떠났다. 현재 봉오동에는 봉오동 입구마을 수남촌만이 남아 봉오동의 역사를 전하고 있다.
신한촌 봉오동에서 무장독립군의 기지로
1909년 봉오동으로 옮겨와 동포들과 함께 황무지를 개척해 신한촌을 건설한 최운산은 먼저 민족정신을 기르기 위한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학교를 설립하였다. 국어, 수학, 역사, 지리, 체육 등을 배우는 현대식 학교 ‘봉오동사립학교’ 설립하여 마을의 아이들을 가르쳤다. 15리마다 학교를 세웠는데, 마을이 커져가면서 학교의 수도 비례하여 늘어났다.
이강훈은 봉오동에 대해서 “왕청현 봉오동은 두만강에서 40리가량 떨어진 산간이다. 장백산의 지맥인 고려령의 험한 산줄기가 사방을 병풍처럼 둘러치고 있다. 꾸불꾸불 갈 지(之)자형으로 장장 2십 리를 뻗은 계곡 지대에 1백 수십 호의 민가가 흩어져 있었다.
이 부락에는 최명록 3형제가 있어서 그들의 지도 밑에서 독립운동의 근거지로써 재류동포의 생활과 기타 모든 면에서 잘 짜여져 있었다. 가옥구조도 한국식이어서 마치 국내의 한 지방 같았다. 중국인 가옥이 몇 집 끼어 있어서 며칠 있어서 며칠 만에 한 번씩 중국 관헌이 순라를 돌 뿐 독립군의 자유무대였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당시 만주지역에서는 마적들의 횡포가 심해 경제력이 있는 집안에서는 사병을 두어 치안을 유지했다. 장작림 군대에서 일하며 동포들의 신뢰는 물론 중국 동삼성 지배세력인 장작림의 특별한 신뢰를 받고 있던 최운산은 1912년 조선인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겠다는 명목으로 자위부대 창설을 허락받았다.
중국군에서 1개 중대 이상(100여 명)의 병사를 모집하여 봉오동으로 데려왔다. 이 사병부대가 후일 무장독립군 부대의 모체가 된다.
장작림 군벌에서 인솔해온 병사들은 대부분 조선 사람이었다. 소수의 중국인도 포함되어 있었다. 중국인까지 최운산의 사병으로 들어올 만큼 그에 대한 병사들의 신뢰가 컸다. 이들은 중국군에서 입었던 군복을 그대로 착용했다. 그래서 최운산 휘하의 ‘도독부‘군은 군복 색깔이 중국군과 같아 잘 구별되지 않았다고 한다.
장작림군에서 군사훈련을 책임졌던 최운산장군은 1912년부터 봉오동에 군사훈련기관인 ‘봉오동사관학교’를 열어 독립군이 되길 원하는 애국청년들을 모두 정예 무장독립군으로 훈련하였으며 러시아에서 구입해온 신식 무기로 완전무장 시켰다.
당시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는 열정을 품고 두만강을 건너온 수많은 우국 청년들은 군사적 능력을 보유했을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안정되어 자신들을 정예 독립군으로 양성시켜주는 최운산 장군의 휘하로 속속 모여들었다.
겉으로는 비적들로부터 마을과 동포들을 지키는 자위부대였으나 내용적으로는 이미 독립군을 양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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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운산의 자위대는 1912년 창립 초기부터 100명이 넘는 병사로 조직되었기에 정규 군대와 같은 편제를 갖추고 있었다. 독립군의 숫자가 계속 늘어나 1915년에는 수백여 명에 이르렀다. 독립군들이 훈련하고 머물 공간이 더 필요해진 것이다.
최운산 장군은 부대원들과 함께 봉오동 산중턱을 개간하였다. 나무를 벌목하고 땅을 고르는 작업을 하여 군사훈련에 필요한 거대한 연병장을 만들었다. 그리고 벌목한 나무를 이용하여 주위에 대규모 막사 3동을 지어 군사들의 숙소를 마련했다.
또한 저택 둘레에 3000평 규모의 토성을 쌓았다. 토성은 강도를 높이기 위해 진흙과 짚을 섞은 흙덩이로 기초를 쌓고 말이 커다란 연자 맷돌을 끌면서 다진 후 그 위에 다시 짚과 흙을 개어 얹는 방식으로 켜켜이 쌓아올렸다. 두께가 1m도 넘는 커다란 토성은 웬만한 포탄에도 부서지지 정도의 강한 강도를 가지고 있었으며 이 성채의 동서남북 각 사방 경계에 포대를 쌓아 4대의 대포를 배치하였다.
‘도독부(都督府)’는 개인이 창설한 사병부대로부터 시작되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규모가 커지고 정식 무장독립군부대로 성장하였다.
각 지역에 地方局을 열어 간도로 들어오는 젊은이들이 봉오동으로 모여들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였다. 1915년 대규모 군사훈련을 위한 연병장과 막사 등을 건축하고 외형적으로도 군부대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최운산 형제들과 각별한 관계를 유지했던 당시 중국 동삼성 정부가 이를 묵인하고 동조하였기에 봉오동에 이런 대규모 독립군조직을 편성, 유지할 수 있었다.
최운산 장군의 부인 김성녀 여사는 1969년 국가에 제출한 서훈신청서에서 “지리적으로 한만 국경 근처인 석현, 봉오동, 양수천자 일대는 최운산장군의 자령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중국관헌에게 신임을 받고 있었다.”고 밝히고 있다.
봉오동전투 당시의 상황을 전하는 기사에서도 당시 봉오동의 모습을 어느 정도 상상할 수 있다. 매일신문은 “...그 부락은 과반수는 신축한 가옥으로 되었는데 그 정비된 것은 도저히 다른 촌락에 비할 수가 없고 더욱 수령되는 최명록의 주택 같은 것은 굉장하며 주위에는 담을 둘러쌓았더라.”고 당시 봉오동 마을의 상황을 전하고 있다.
이강훈은 "독립군을 편성할 때에 사령부를 봉오동에 설치하기 위하여 기성 촌락을 군사촌으로 개발한 것은 주로 최진동 동생되는 최운산과 최치흥 형제의 노력의 결과이다.“ 라고 밝히고 봉오동에 대해서도 “봉오동은 대부분이 새로 지은 번듯한 가옥인데다가 특히 상촌은 도로망까지 정리되어 있었다. 이곳은 천연적으로 일부당천 만부부당한 요새로 된 것을 인공을 가해서 어떠한 공격에도 견딜 수 있도록 꾸미자는 계획이었다. 마을 한쪽에는 새로 지은 목조 교사가 있었으며, 교사 앞에는 독립군의 연병장이 있었다.” 라고 설명하고 있다.
독립군본부였던 최운산 형제의 저택은 경신참변 때 전소되으나 최운산 형제들이 봉오동 중촌에 다시 집을 지어 거주하였다. 그후 재혼한 최진동 장군이 1932년 도문으로 이사하였고 이후 최운산 장군도 봉오동 입구마을 수남촌에 거주하였다. 토성은 1943년 대규모 홍수에 훼손되었으나 해방 후까지 그대로 남아있었다. 그러나 토성을 양질의 비료라 여긴 마을 주민들이 남아있던 토성을 계속 헐어서 농사에 사용하느라 모두 없어져버렸다고 한다.
최운산 장군이 1945년까지 거주하던 수남촌의 저택은 그 마을에서 유일하게 펌프가 있는 제일 큰 집이었다. 해방 후 공산당이 그 집을 빼앗아 마을회관으로, 구락부로, 유치원으로, 공동작업장으로 사용되다가 1980년대 중반에 허물었다고 한다.
지금 수남촌 최운산의 집터는 다른 주택이 들어서 있다. 1970년대 후반 중국정부는 물이 맑은 봉오동 계곡 아래에 댐을 쌓고 대형 저수지를 만들었다. 봉오동전투 전적지임을 알리는 기념비도 저수지 대문 안쪽에 세워져 있다.
댐건설로 봉오동의 주민들은 모두 이주하고 수자원 보호구역으로 출입이 금지된 상촌 마을은 시나브로 사라져 풀이 무성한 숲이 되어 있다. 다행히 봉오동 입구의 수남촌이 중국 정부로부터 조선족 전통마을로 지정되어 봉오동의 역사를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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