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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주의 봉오동전투 이야기』 기미년 만세시위를 이끌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국내외의 만세시위에 대한 연구가 집중되기도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연구가 국내에 집중되어 있고 해외사례는 제대로 발굴되지 못하고 있다. 

특히 무장독립운동이 가장 가열차게 일어났던 중국과 연해주의 만세시위를 제대로 정리하지 못하고 100주년을 보내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 크다. 

1919년 3월 26일, 왕청현의 중심지인 백초구에서 최운산 형제들이 수천 명의 군중을 이끌고 시위에 나가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일제 밀정보고서에 그날의 상황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간도 백초구에서는 예전부터 3월 26일 오전 11시를 기하여 독립선언 시위운동을 개시하려는 것을 공공연히 말하였는데, 드디어 당일 대경자, 목단강, 하마힌, 대왕청, 나자구(백초구에서 26리)등에서 집합한 자가 약 1천 5벽명(이 중 사립학교 및 서당의 조선인 학생 약 2백명 및 중국인 약 1백명)은 백초구 왕청현서(경찰서)에서 북방 약 10정(일본영사분관에서 10정)의 산록에서 선언식을 거행하였다. 수괴자는 귀화 조선인 최명록 및 최모 등으로 구 한국기 또는 지나국기를 게양하고 각자는 작은 깃발을 손에 들고 만세를 높이 불렀으며, 식장에는 단군교, 시천교, 예수교의 목사 등이 차례로 일어나 연설을 하였다. 이 중 부인(여성) 연설자도 있었다고 함.....(후략) 

『중국조선족역사연구』는 "3월26일 왕청현 백초구에서 5천여명의 조선인들이 반일집회를 거행할 때 최진동장군과 박영은 봉오동, 석현, 대감자 일대의 시위군중들을 지휘하여 시위에 참가하여 왕청 일대 반일독립운동의 반일기세를 더욱 높은 단계로 이끌어갔다. 

백초구의 시위에는 조선인뿐만 아니라 일부 한족들도 참여하였는데 왕청현 경찰국장도 대회에 참가하여 조선인들의 반일투쟁을 고무하고 지지 성원하는 연설을 발표하기도 하였는데...” 라고 기록했다. 

일본경찰이 용정 3.13만세시위는 무력으로 대응했으나 이날 백초구의 독립선언식에서 시위군중에게 총을 쏘거나 사람들을 붙잡아 잡아갈 수 없었다. 최운산 형제들이 친분이 있는 중국 사람들을 만세시위에 초대했고 100명이 넘는 중국인들이 한국 사람들과 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무장부대 ‘도독부’를 운영하고 있던 최운산 장군이 독립군들로 하여금 곳곳에서 보초를 서게 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당시 최진동군은 중국 백초구의 순경국장(보안단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최진동 최운산 형제들은 이외에도 4월 26일, 29일에 왕청현 대감자 일대에서, 각각 3천명, 2천 명의 동포를 규합하여 독립만세 시위를 이끌었고, 5.18일 양수천자에서 수백 명의 민중이 모여 만세시위를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만주지역 독립운동에 대한 연구가 아직 제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는 탓인지 이러한 내용들이 3.1운동 100주년이 된 올해의 연구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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