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부터 호탕하고 기백이 남달랐던 노백린은 일본으로 유학하여 군사지식을 습득하고 군사전문학교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습니다.
그 후 1900년 10월 육군 참위(오늘날 육군 소위)에 임관되었고 한국무관학교 보병 교관으로 활동했습니다. 이때 수많은 한국 군인을 양성했고 꾸준히 승진하여 육군무관학교장 및 헌병대장을 역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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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운동가 노백린 선생 (1875. 01. 10 ~ 1926 .01. 22) |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며칠 후 이토 히로부미는 서울에 통감부를 설치하고 한국 측 고관들을 초청하여 연회를 열었습니다. 이 자리에 노백린도 참석하게 되었는데 현장에는 친일파 매국노 이완용, 송병준이 미리 도착해 있었습니다. 노백린은 그들을 향해 “워리, 워리”하며 개를 부르는 것처럼 불렀습니다.
그때 그 말의 의미를 파악한 일본군 사령관 하세가와 요세미치가 칼을 빼들자 노백린도 칼을 빼어 대응하려 했습니다. 이토 히로부미가 황급히 하세가와 사령관을 말려 더 큰 화는 막았으나 연회 분위기는 엉망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후 노백린은 미국에서 귀국한 독립운동가 안창호, 양기탁, 이동녕 등과 함께 비밀결사 조직인 신민회를 결성하여 국권회복을 위해 온몸을 바치게 됩니다.
1910년 우리나라를 빼앗은 일본은 노백린에게 회유와 협박을 동시에 하며 일본을 위해 일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만큼 그의 실력과 군인으로의 기백이 뛰어났기 때문입니다. 노백린은 의연하게 거절하면서 자신의 길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러던 중 중국시찰이라는 명목으로 중국에 갈 수 있는 기회가 생기자 독립운동가 조명구와 함께 상하이로 가서 배를 타고 미국으로 망명하게 됩니다. 그는 하와이에서 ‘국민군단’을 창설하여 독립군 양성을 위해 힘썼습니다.
나라를 빼앗긴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 노백린과 국민군단의 병영 완성을 축하하는 낙성식에 참석한 약 600여 명의 하와이 교포들은 감격과 조국의 독립을 향한 결의로 가슴이 벅차올랐습니다.
1916년 캘리포니아 주에 정착한 노백린은 샌프란시스코에서 잡지 『태평양시보』를 만들어 조국의 실상과 독립운동을 미주에 알리는 활동을 했습니다.
그 후 군인으로서의 선견지명으로 앞으로 전쟁은 육군보다 공군력이 좌우할 것이라고 믿고 비행사를 양성해야한다는 신념으로 지역 유지들을 대상으로 공군창설모금운동에 나섰습니다.
그것이 대한민국 공군의 탄생을 알리는 역사적인 순간이었습니다.
그의 열의에 감동한 국민회 중앙총회 총무 곽임대(郭林大)는 매달 600달러씩 지원하기로 약속받고, 1919년 1월 20일 미국 캘리포니아 주 북방 윌로우스에 기지를 건설했으며 1920년 2월 20일 비행사 양성소를 설립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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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노백린은 곽임대의 주선으로 캘리포니아 주에서 ‘쌀의 왕’으로 불리던 자본가 김종린을 소개받았습니다. 노백린이 김종린을 만나 새로운 비행군단 창설의 필요성을 역설하자 그는 양성소 건설에 필요한 각종 항공시설 일체를 도맡을 것이며 매달 3천 달러를 지원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비행군단 조직은 김종린을 총재로 추대하고 노백린이 총무, 곽임대가 훈련생 감독을 맡기로 했습니다.
1920년 5월, 드디어 역사적인 한인비행사학교를 열었습니다. 훈련용 비행기 2대를 도입하고 비행사 노정민, 박남선, 우병옥, 오임하, 이용선, 이초를 초빙하여 교관으로 삼았습니다. 그 후 훈련용 비행기는 5대로 늘어났으며, 1922년 6월에는 예비 조종사가 41명에 달하고 1923년에 드디어 11명의 파일럿을 배출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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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공술을 배운 졸업생들은 의기가 충천하여 “도쿄로 날아가 쑥대밭을 만들자”고 호언하기도 했습니다. 타국에서 조선인의 손으로 비행사를 양성한다는 것은 생각하지도 못한 일이었습니다. 또한 독립전쟁을 위한 항일 비행군단을 조직한 것은 우리 공군 역사에서도 매우 의미 있는 사건입니다. 즉 대한민국 공군의 창시자들(아버지들)이 독립운동가라는 의미가 되며, 이것은 대한민국 공군 건립의 역사적 배경, 독립운동의 역사가 대한민국 국군의 역사와 직접적으로 연결된 연계성, 그리고 선배군인(‘독립운동가’)과 후배군인(‘대한민국 국군’)으로 이어지는 국가관과 애국심 함양과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다 말할 수 있습니다. 병역의 의무를 수행하는 대한민국의 아들들이 독립운동가가 자신의 ‘선배’라는 생각을 받아들이게 된다면, 독립운동가를 향한 그들의 역사관은 분명 지금과는 크게 달라질 것입니다.
장군이 평소 가족에게 했던 “국가와 민족을 사랑하라”는 말은 유언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는 그토록 소원하던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한 채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그의 죽음과 관련하여 밀정에 의해 암살당했다는 말도 있지만 정확한 기록은 없습니다. 후학들은 그의 죽음을 깊이 애도했으며 나라 잃은 슬픔을 다시 한 번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오늘날 대한민국 공군을 만든 초대 지휘관으로 인정받으며 대한민국 제 1대 참모총장으로 역사에 기록되어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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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의 정신은 후대로 이어졌습니다. 장남 노선경은 만주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한 뒤 대한독립단에서 활동했고, 둘째 아들 노태준은 광복군 구대장(훈련병의 내무생활을 지도, 관리하는 조교)으로 항일전선에 나섰습니다. 셋째 딸 노순경은 3.1만세시위에 참가했다가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른 뒤 중국에서 독립군을 지원했습니다. 셋째 딸 노순경의 남편 (장군의 사위) 박정식은 세브란스병원 의사로 근무하면서 독립군에 자금을 지원했고, 하얼빈으로 건너가서 직접 독립군을 치료하기도 했습니다. 박정식은 대한제국 군대 해산에 항거하며 권총 자살을 했던 박승환의 아들입니다.
이처럼 조국을 사랑하는 마음이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주춧돌이 되었기에 노백린 장군의 가문에 진심으로 존경을 표합니다.
* 위 글의 일부는 ‘독립운동가 앱’과 도서 『잊혀진 영웅들, 독립운동가』에서 발췌하였습니다.
김만섭 기자 kmslove2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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