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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재 신채호, 1925년의 유감

‘영토를 잃은 민족은 재생할 수 있어도 역사를 잃은 민족은 재생할 수 없다“

“인류 사회의 我(아)와 非我(비아)의 투쟁이 시간으로 발전하고 공간으로 확대되는 心的(심적) 활동 상태의 기록이니...”

누구의 말씀일까? 묻는다면 많은 사람들이 단재 신채호라고 분명하게 말할 것이다. 그 만큼 우리는 신채호 선생을 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단재 신채호 선생이 어떤 역사학자로서의 업적을 남겼는가를 물어본다면 답할 사람이 많지 않을 것이다. 사실 대부분은 단재 신채호를 알다고 하지만 그를 잘 모르고 있다. 

사실 역사학자보다는 독립운동가라는 인식이 강하다. 아니 그 부분을 누군가 강조한 느낌이다. 대부분 학창 시절 국사교과서에선 신채호 선생님의 역사적 견해는 단 한 줄도 배울 수 없었다. 그저 그는 멋진 인용할만한 명언을 외치는 명언가요 독립운동에 투신한 어찌보면 투쟁적이고 혁명적인 인물이라는 이미지로 각인되어있다. 스스로 <조선상고사> 등 그의 역사 책을 읽기 전까지는 말이다. 

단재 홍보관 1925년 유감 
대전에는 단재 신채호 생가가 있다.  2015년 12월에는 단재 홍보관이 생겼다. 그동안은 생가만을 돌아보았는데 이제는 신채호 선생의 삶과 생애를 알게끔 정보를 준다.  글과 그림 영상 등으로 친절하게 설명해준다. 

 그런데 한곳이 눈에 들어온다. 신채호 선생 생애 연보다. 그의 삶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생애 연보가 그의 짧은 인생을 연도별로 자세히 설명해주고 있다. 

 

대전 단재 신채호 홍보관 내 생애연보 일부

차근차근 보고 있노라니 먼가 아쉽다. 1925년이다. 25년에 있었던 역사학자로서의 신채호 선생이 했던 주장을 담은 기록들이 빠져 있는 것이다. 

대전 단재 신채호 홍보관 내 생애연보 일부 확대

“<동아일보>에 낭객의 신년만필 기고 . 무정부주의 동방연맹에 가입함” (1925년)"

1925년의 그의 행보는 이것이 전부다. 글씨를 쓸 수 있는 공간은 25년조의 아래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1925년경부터는 무정부주의 독립운동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단재 선생으로 각인된다. '무정부주의 동방연맹'에 가입했다는 사실을 부각시켰다. 그리고 그 시기는 단재 신채호의 삶의 새로운 단계로 들어섰는 듯 다른 색깔로 표시되어있다. 이 때는 무정부주의 운동기라고만 표시되어있다. 마치 이때는 역사운동이나 역사연구가 없었던 듯이 설정되어있다. 1928년 감옥에 갇힌후에도 그는 자신의 역사연구를 완성하지 못하였음을 한탄하였다. 그가 감옥을 가지 않았다면 <조선상고사>를 미완으로 남겨놓지 않고 완성시켰을 것이다. 

1925년에는 그의 역사학자로서 가장 중요한 연재글을 실었던 해다. 

1925.02.09 동아일보 5면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캡쳐화면)

1924년 10월 13일부터 1925년 3월 16일까지 《동아일보》에 역사 글을 《조선사연구초》라는 이름으로 연재하게 된다.  연표에서는 전혀 언급이 없다.  이때 연재한 글을 1929년 조선도서주식회사에서 《조선사연구초》라는 제목으로 간행했다. 이에 대해서도 1929년이 연도표에 있어야 하는데 아예 없다.  《조선사연구초》가 사라진 것이다.  (홍보관에는 저서를 나열할때 한번 '조선사연구초' 책 이미지가 나온다)

 《조선사연구초》에 6편의 논문은 주로 한국고대사에 관한 것으로  〈고사상이두문명사해석법(古史上吏讀文名詞解釋法)〉, 〈삼국사기중동서양자상환고증(三國史記中東西兩字相換考證)〉, 〈삼국지동이열전교정(三國志東夷列傳校正)〉, 〈평양패수고(平壤浿水考)〉, 〈전후삼한고(前後三韓考)〉, 〈조선역사상일천년래제일대사건(朝鮮歷史上一天年來第一大事件)〉 등의 제목으로 되어있다.

 이는 광복후 7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논란이 되고 있는 내용들로써 신채호 선생의 핵심 글중에 하나다. 「평양패수고」는 고대의 평양·패수가 오늘날의 평안도 평양·대동강이 아니라 만주 봉천성의 해성현(海城縣)과 점우락(蔪芋濼)임을 고증했다. 또한 신채호는 낙랑국과 낙랑군을 구별하였다. 평양에는 최씨 낙랑국이 있었고 한나라 식민지 낙랑군은 한반도에 없었다는 주장을 폈다.  

2016년 6월 21일 패수의 위치에 관한 학술대회 장면

이는 광복후 7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논란이 되어서 학술논쟁을 하고 있는 <패수>와 <낙랑군> 문제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무엇이 상고사에 있어서 쟁점이 될지를 알고 있었다. 

이어진 <전후 삼한고>는 단재 선생 최고의 역사적 업적이라고 할 수 있다. 삼한은 한반도 남쪽의 삼한만이 아니라 그 전에 북삼한이 있었다는 것이다. 전삼한이 대륙삼한이고 이것이 후에 한반도 남쪽의 삼한(후삼한)이 되었다는 주장이다. 지금 학계가 인정하고 있는 것은 남삼한 뿐이다. 첨예한 대척점이다. 이처럼 <전후삼한고>는 『조선사연구초』에서 가장 야심적이며 학술적 영향도 큰 논문이다. 

충북 청원군 소재 단재 신채호 사당 기념관 전후삼한고 설명문

「조선역사상일천년래제일대사건」은 어떠한가? 

“만일 김부식이 패하고 묘청 등이 승리했더라면 조선사가 독립적·진취적 방면으로 진전했을 것이니, 이 전역(戰域, 전쟁)을 어찌 ‘일천년래 제일대사건(一千年來 第一大事件)’이라 하지 아니하랴.”(신채호, [조선사연구초]) 

이 전쟁에서 김부식파가 승리하여 이후 유교사상에 입각한 사대주의·보수주의로 전락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자주독립 사상이 사대주의 사상으로 변화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신채호 선생은 보았고 이는 국사교과서에서도 많이 들어서 알고 있는 바이다. 

이렇듯 동아일보에 기재한 조선사연구초는 너무나 중요한 신채호 선생의 주장이었다. 이런 1925년의 신채호 선생의 주장이 누군가에게는 심기가 불편한 것인가? 우리 학계와 정반대의 주장을 하는 논문을 발표했다고 아예 없는 듯이 하는 것인가? 단체관람을 오는 학생들에게 이 부분은 설명하지 말라는 것인가? 

역사는 다양한 관점이 있다. 자신과 다르더라도 실제 있었던 일은 그대로 실어놓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사실 단순한 누락이라고 보기 어렵다. 단재 신채호 선생의 역사학자로서의 관점에 대해서 비판적이고 어떨 때는 비하적이기까지 한 지금 학계의 주장이 이 삭제와 누락에 들어있지 않나하는 의심을 지우기 어렵다. 

대전은 독립운동가이자 뛰어난 역사학자셨던 단재 신채호 선생이 태어난 곳이다. 그 뜻을 깊이 새기기 위해서는 그가 어떤 역사관과 어떤 역사적 주장을 했는지에 대해서 명백히 있는 그대로 기록하고 알려야 할 것이다. 

생애연보 1925년 기록 부분은 빈공간이 많이 있다. 신채호 선생의 업적과 활동 내역이 그대로 채워지기를 기대한다. 

 

단재 신채호 선생 생가 신채호 동상

박찬화 기자  multikorea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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