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청이 2015년 4월 미국 시애틀미술관으로부터 돌려받은 덕종 어보가 1471년에 만들어진 원품(原品)이 아니라 일제강점기인 1924년에 다시 제작된 신품(新品)으로 드러났다. 덕종어보는 1924년 분실 됐고, 미 박물관 측으로부터 돌려받은 덕종어보는 재제작품, 즉 모조품에 불과한 것이다.
사실 덕종어보를 포탈에 검색만 하더라도 1924년 분실사실은 쉽게 누구나 찾을 수 있다. 이미 알고 있었다는 의혹을 받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기도 하다.
![]() |
동아일보 1924년 4월 12일과 4월 13일자 신문에 덕종어보 분실사건이 나와 있다. 과연 24년에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동아일보 속으로 한번 들어가보도록 하자. 그 기사 내용 전문을 현재 읽힐 수 있는 문장으로 수정하여 싣는다.
![]() |
| 종묘전내에 의외사변 덕예양조의 어보를 분실 동아일보 1924. 04.12(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캡쳐) |
종묘전내에 의외사변 덕예 양조의 어보를 분실 (동아일보 1924. 04.12)
종묘전내 의외사변
덕예양조의 어보 분실
전각의 자물쇠를 털고 9일밤에 도적한 일
이왕전하께서는 침담을 폐하셔
이조 오백년대제왕의 사위를 봉안한 종묘에 도적이 들었다. 재 작십일아침에 종묘를 수직하는 직원이 아침 봉심을 하던 중 우연히 첨첩히 잠긴 종묘의 자물쇠가 비틀어져 있는 것을 보고 황겁하게 이 사실을 즉시 장관에게 보고하매 장관이하 책임자가 되는 예식과장이 종묘에 이르러 문을 열고 살펴보니 과연 덕종,예종 양조 신위앞에 놓여있는 보가 간곳이 없었다.
본시 이 '보'라는 것은 생시에 쓰시던 인장으로 재료는 백철 종료이라 그다지 갑진 것은 아니라 고물이나 또는 역사로는 극히 귀중한 것이니 분명히 어떠한 자가 돈에 욕심이 나서 대담한 짓을 한 것인 듯 하다하며 이 놀라운 소식을 들으신 이왕전하께서는 십일밤을 새우시며 이왕직 책임관리와 창덕궁 경찰서장을 시시로 부르시어 "보"를 찾었느냐고 초조히 지내시는데 대하여서는 근시자들은 다만 황송히 지낼뿐이오 십일일 저녁까지는 범죄의 단서를 잡지 못하고 시야 창덕궁 경찰서장은 부하를 독려하여 대활동을 계속 중이라 한다.
범인미상
수사에 고심중
시야 창덕궁 서장담
종묘에는 예식과에서 십여명의 관원이 있어서 수직의 책임을 지고 있음으로 자기가 직접 책임은 질것이 아니라 임의 그 같은 불상사가 난 이상에는 한시라도 바삐 범인을 잡으려 보를 찾아 전하의 진념을 덜어드리라고 합니다. 임의 다소간 짐작나는 곳이 있어서 상당한 계책을 세우고 있으니 불일간 찾기는 할듯하나 그동안에 전하께서 침담이 불안하시로고 초조히 지내는 것은 황송무지한 일이오
![]() |
| 종묘내의 절도는 오백년래 처음일 (동아일보 1924년 4월 13일) |
종묘내의 절도는 오백년래 처음일 (동아일보 1924년 4월 13일)
종묘내의 절도는 오백년래 처음일
종묘안에 도적 들어갔던 말
범인수색은 단서도 못 얻어
종묘안 영녕전에 안치하여있던 덕종 예종 양조의 어보가 분실되었다함은 괴보한바이어니와 당일밤에는 전사보 홍성두 씨가 수직을 하였었는데 전례에 의하야 밤 열시와 새벽 세시에 두번이나 순시를 하였으나 발속에 가려있는 자물쇠가 비틀어졌으며 도적이 들었던 것은 꿈에도 몰랐었다하며 전사 정만조시는 노병으로 인하여 자리에 누었다가 이 사변이 나면서부터는 병든 몸을 무릎쓰고 매일 창덕궁에 출근하여 무슨 처분이 있기만 기다리는 중인데 아직도 범죄의 단서는 얻지 못한 모양이며 시야 창덕궁 경찰서장은 작십이일에는 아침부터 종로서와 경찰부를 방문하고 범인 체포할 계획에 대하여 협의가 있었는데 본시 종묘는 창덕궁 경찰서에서 경위할 책임이 없는 곳임으로 이번 기괴한 절도사실도 종로서 사법계에서 중심이 되어 처리할터인데 경찰부형 사고를 위시하여 종로서의 사법계와 그외 각 경찰에서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오백년이래로 이같은 사변은 한번도 없었으며 다만 이제로부터 삽십년 전에 어떠한 자 한명이 종묘 앞전 안에 들어가 숨었던 사실은 있었으나 이번같은 피해는 없었으며 조사한 결과는 그자는 정신병자인 것이 판명되어 즉시 방면된 일은 있었다더라.
책임여하
비밀탄로된 것만 면복이 없다하는 민장관의 말
이번 사변에 대하여 이왕직 민장관은 말하되 뜻밖에 이 같은 일이 일어나 실로 황공무지한 일이나 이미 당한일이라 어찌하는 수 없으며 비밀에 부친일이 신문에 발표되어 참으로 세상에 대하여 면목이 없소. 이제로부터 삼십년 전에 어떠한 광객이 앞전에 뛰어들어갔을 때는 전사는 징계를 면하고 다만 전사보 지객이 되는 사람만 면관된 전례가 있으매 과연 이번 사변에 대하여 그 책임자를 어느 정도까지 징계를 할런지는 아직 미정이요 요컨대 비록 책임자라 할지라도 뜻하지 않은 사변이니까 다소 간량해할 여지는 있을 줄 아오"하며 조전차관은 다만 "황송할 뿐"이라는 외에 입을 열지 아니하더라
체포가 급무 처분 기다리는 예식과장의 말
이번 사변에 직접 책임자가 되는 예식과장 이항구 씨는 말하되 "황송한 말이야 어찌 입을 여러 다 하겠소이까마는 이왕 당한일이니 다만 처분만 바랄 뿐이요 무슨 짓을 하던지 어보나 온전히 찾아놔야 하겠는데 도무지 그 자체가 묘연하니 큰 걱정이요"
전사는 병중이오 전사보는 등신
종묘를 수호하는 책임자는 전사 정만조씨이며 그날 밤의 숙직을 하던 사람은 전사보 홍성두씨인데 정만조씨는 말하되 " 종묘의 전사되는 책임 상실로 황송한 일이나 자기는 병중에 있었음으로 도무지 어찌된 지를 모르며 만일 찾지 못할 때에는 다시 만들어 안치하는 외에는 도리가 없을 줄 아오 " 하며 홍성두는 낯에 창황한 빛을 띄우고 "누가 발뒤에 잠겨 있는 자물쇠까지 야순시때이기로 살펴보았겠오 자고보니 그 같은 변이 생기었으니 필경 밤 열시 뒤이나 새벽 세시 뒤에 일어난 일 같으며 하필 두분의 어보만 가져간 것은 그 두개는 문을 열면 바로 정면에 있는 것이라
골프노리에 취한 이왕직 차관과 예식과장
종묘에 사변이 일어나자 위로는 이왕전하를 위시하여 창덕궁 내는 주야로 초조한 빛에 쌓이었으며 더욱이 전하께서는 거의 침담을 잊으시고 "어보를 찾았으냐"고 시시로 근시에게 하문이 계시어 실로 답할 길을 모르는 이때에 이왕직의 주뢰자가 되어 소위 이번 사건의 직접 책임자가 된다하는 이왕직 차관 조전치책씨와 예식과장 이항구 씨는 재작십일일 아침부터 자동차를 몰아 용산효창원에 이르러 날이 맛도록 골프놀이에 정신이 없었다 하니 과연 이것이 그들이 취할 바 가장 온당한 도리이었겠는가 차관과 장관은 골프 놀이에 재미만 보고 지내니 그럴 도리가 있을까 하여 이왕직 안에도 불평이 많으며 이 사건에 대하여 민장관은 다만 낯을 숙이고 묵묵히 있을 뿐이니 과연 그들의 태만한 죄책은 어찌나 증치되겠는가하여 종척과 귀족 간에 임의 비난이 높다더라.
- - -
이 나라를 일본에 팔아넘긴 매국노 이완용의 아들인 이항구이기에 덕종어보가 분실되어 나라가 크게 근심을 하고 순종을 비롯한 모든 관료들이 물건을 찾고자 애를 쓰고 있는 상황 속에서도 무책임하게 골프를 치러가는 이 사건을 우리는 결코 쉽게 넘겨버릴 수는 없는 것이다.
더욱이 그가 바로 덕종어보를 재제작한 당사자이기에 이 사실을 알고 있는 문화재청에서 모조품 전시를 멈추지 않고 있다는 것은 문화재청이 문화재 관리 및 역사에 대한 국민 정서를 제대로 읽지 못하고 있다는 하나의 반증이 될 것이다.
![]() |
| 이완용 가족사진 (뒷줄 가운데가 이항구) |
**시노다 지사쿠 : 篠田 治策 (1872년 ~ 1946년) 일본의 법학자, 관료. 고종실록 찬술 초대위원장에 일본인 이왕직차관 시노다 지사쿠[條田治策]가 취임하나, 그가 이왕직장관에 서임되자 부위원장 직제를 신설하고 조선인 이항구(李恒九)가 차관으로 승격, 부위원장이 되어 실록찬술 책임을 맡았다.
박찬화 기자 multikorean@hanmail.net
<저작권자 © 한韓문화타임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문국’ 망령의 부활인가… 남원문화원은 누구를 위한 역사를 가르치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