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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 열사는 자결했다. 일본은 한국에선 병사 했다고 유포하고 공문서엔 할복분사 했다 적어

헤이그 밀사 이준의 죽음이라는 돌발 사태에 당황한 일본이 병사설(說)을 급조해서 퍼뜨린 탓에, 병사의 원인으로 단독설, 등창설, 심장마비설 등 여러 풍문이 생겨났다는 주장도 있다. 다수의 사람이 제각기 거짓말을 하다 보니 사인이 일치될 수 없었다는 얘기다. 일본은 1907년이 채 가기도 전인 12월 20일에 ‘한국정미정변사’라는 책을 서울의 일한서방에서 발행하는데, 바로 이 책에서 병사설을 본격적으로 선전했다는 것이다. <조선일보 유석재 기자>

“헤이그 밀사로 갔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음을 택하게 되면
어느 누가 청산에 와서 술잔 부어놓고 울어 주려나
바람 눈 서리도 언 자리에서 내사 죽은 뒤에 
누구라 장차 좋은 술 가져다가 청산에서 울어 주려나
가을바람 쓸쓸한데 물조차 차구나
대장부 한번 가면 어찌 다시 돌아오리.”

헤이그로 떠나기 직전에 이준열사가 지인들에게 준 시(詩)는 뜻을 이루지 못하면
자결 할 것이라는 의미가 담고 있다.

만국평화회의보(1907년 7월 5일자) 1면에 실린 헤이그 특사들 사진. 왼쪽부터 이준, 이상설, 이위종.

이준과 이상설이 시베리아 열차를 타기 전날인 5월 20일, 한인 동포들은 이들을 위한 전별연을 열고 모금한 돈을 전달했다. 눈물을 참을 수 없었을 이준은 이 자리에서 시 한 수를 지었다. “가을 바람이 쓸쓸하고 물도 바뀌어 차가운데, 장사는 한 번 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으리(秋風蕭蕭兮 易水寒, 壯士一去兮 不復還).” 이 시를 접한 조선일보 유석재 기자는 깜짝 놀랐다. 어디선가 본 듯하다는 기시감(旣視感) 때문이었다. 그것은 이준 열사가 지은 시가 아니라, 맨 앞의 ‘추(秋)’자만 빼면 중국 전국시대의 자객 형가(荊軻)가 진시황을 암살하려 떠나기 전에 지은 시였다. 따라서 ‘물도 바뀌어’란 부분의 기존 해석은 ‘역수(易水)’라는 고유명사로 바꿔야 한다. 이것은 단순한 상징이었을까, 아니면 정말로 칼을 지니고 헤이그로 떠난다는 얘기였을까? 그는 그 칼로 과연 누구를 찌르려 했던 것일까? ” < 조선일보 유석재 기자>

헤이그에서 ‘만국평화회의보’를 발행하며 밀사들의 활동을 소상히 보도하던 영국 언론인 윌리엄 스티드(Stead)는 1907년 9월 3일 게재된 글에서 한국인들에게 “진정 독립을 되찾고자 한다면 더 이상 피를 흘리지 말고 국력을 기르라”고 충고한다. 그 ‘피’는 과연 누구의 피를 말하는 것이었을까?

블라디보스톡 신한촌에서 1912년 5월5일부터 발간 된 권업신문은 주필이 신채호 이상설(헤이그밀사) 이었다. 1912년 8월16일자 “더운피를 뿌린 이준”, 1914년 7월 19일자 “이쥰공이 피 흘린 날” 이란 논설을 하고 있다.
청산리 전투와 대한의용군 사령관과  군비단軍備團 사령관을 지낸 이준의 아들인 이용(李鏞 아호:秋山)이 황포군관학교에서 이객우(李客雨)이름도 사용 했는 데 

한국사 데이터 베이스 국외 항일운동자료 일본 외무성기록 機密公 제169호 4번째 장에 광동(廣東) 일본총영사가 외무대신에게 보낸 문서에 이객우를 설명하는 글을 보면 헤이그에서 “할복분사(割腹憤死)한 이준” 아들이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이동녕 안창호 이동휘..등과 함께했고 남경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시베리아 조선인 군대 와 북만주 방면 대일 반항 조직을 하였고 1925년(대정 14년) 광동에 와서 장개석 민국혁명에 참가 등... 소개를 하고 있다.

한국사 데이터 베이스 국외 항일운동자료 일본 외무성기록 機密公 제169호 4번째 장

문서철명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支那各地 4 
문서번호 機密公 제169호
문서제목 要視察 鮮人의 言動 및 略歷에 관한 件
발신자 森田寬藏(廣東總領事)
수신자 幣原喜重郞(外務大臣)
발신일 1926년 04월 30일
색인어이름 : 谷山(一名 羌世宇), 金元鳳 劉徹壽, 李英駿, 呂運亨, 金嚴海, 李客雨, 李儁, 李東寧, 安昌浩, 李東輝, 李宗萬, 孫斗煥, 姜波, 吳佩孚
지명 : 黃海道, 上海, 安南, 支那, 臺灣, 京畿道 長端, 西伯利亞(시베리아), 滿州, 雲南, 廣東, 平安北道 碧同, 慶尙北道 大邱, 奉天省 寬甸縣, 海牙, 平安南道
단체 : (上海)假政府, 義烈團, 廣東大學, 被壓迫民族聯合會, 露國共産黨, 國民黨, 講武堂, 黃埔軍官學校, 大沙頭航空學校, 鐵血團, 南京士官學校, 韓國革命軍人會, 韓人親睦會

사건 : 要視察 朝鮮人 谷山 등의 言動 및 略歷

에고 있다. 또 다른 일본 공문서도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다른 증거로는 이준 열사의 부인 이일정 여사가 1907년 7월 15일 오후 2시쯤 이상설로부터 “남편이 자결했다”는 전보를 받았다는, 국내 한 신문의 1959년 11월 23일자 보도도 있다. 

1935년 5월 15일 동아일보

<이 양재 선생>

이위종은 이준이 죽기 직전에 했던 말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우리나라를 도와주십시오… 일본이 우리를 짓밟고 있습니다!” 그것이 돌아오지 못한 밀사의 마지막 유언이었다.

이준의 관을 살 돈조차 없었던 이상설은 두 달 뒤인 9월 6일에야 이위종과 함께 다시 헤이그로 와 102달러 75센트를 주고 정식 장례를 치를 수 있었다.

이준열사 집안에 민영환공이 자결한 칼이 있었다고 한다.
이준열사가 고종의 밀명으로 외교적으로 우리의 처지를 알리려고 상해로 나갔는데 민영환공이 돌아가시자 급거 귀국한다. 그 때 민영환공 집에서 칼을 전달 받은 것 같다.
민영환공과 이준열사는 얼마나 절친 했는지는 나중에 밝혀 드리겠다.

그 칼을 가지고 가셨을 것이라고 한다. 헤이그로 출발한 후 그 칼이 없어졌다고 한다.
1962년 공훈심사 때 일이다. 이준열사가 자결이냐 병사냐 논쟁이 벌어졌다고 한다.
병사로 의견이 모아 질 때 민족을 위해 살아오신 분들이 많이 생존해 있었으므로 사실대로 기록하라고 했던 모양입니다. 

당시 공훈 심사는 국사편찬위원회에서 하였다. 국사편찬위원장이 이병도 못지않은 우리의 역사를 식민사관으로 만든 조선사편수회 출신인 신석호였다. 당연히 일본 측 눈치도 보아야겠기에 할복분사에서 할복을 제외한 분사로 기록하여 지금까지 인용되고 있다.

 

글 : 조근송 (이준열사기념사업회명예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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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댓글 1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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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메로니아 2019-04-22 07:21:20

    역사를 거짓으로 만들지 마세요.
    자결했다는 기레기 기사가 무슨 증거입니까?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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