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역사상 가장 치열했던 동계전투"
"현대사에서 美⋅中이 최초로 싸운 전쟁"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철수 사례"
장진호 전투는 1950년 11월 26일부터 12월 11일까지 17일간 영하 30~40도 혹한속에서 美 제1해병사단과 우리 육군이 함경남도 개마고원 장진호 인근을 둘러싼 중공군 12만여 명의 포위망을 뚫고 흥남으로 철수했던 작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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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재인 대통령이 방미 첫 일정으로 버지니아주 미 해병대 국립박물관 내 장진호 전투 기념비를 찾아 헌화 후 기념비를 살펴보고 있다 |
美 제1해병사단 1만 5,000명이 중공군 7개 사단 12만 명의 포위망을 뚫고 함흥으로 철수에 성공함으로써 훗날 흥남 부두의 피난민 10만여 명을 남쪽으로 피난시킨 ‘크리스마스의 기적’, 흥남철수작전을 가능케 하였다.
이 전투로 美해병를 주축으로 한 UN군은 전사 2,500여 명, 실종 219명, 부상 5,000여 명, 중공은 25,000여 명 전사, 12,500여 명 부상 등 많은 사상자를 낳았는데 당시 혹독한 추위 때문에 전투로 죽은 사람보다 동상으로 죽은 사람이 더 많았다고 한다.
당시 개마고원 장진호 일대는 해발 1,000미터 이상의 산악지대로써 낮기온 영하 20도, 밤기온은 영하 30도 이하로 체감온도는 영화 40도를 기록했다. 혹독한 강추위는 중기관총은 반드시 부동액을 채워야 했고 경기관총은 불발을 방지하기 위해 목표가 있건 없건 주기적으로 사격을 해야 했다.
공중에서 투여되는 보급품도 땅 표면에 부딪혀서 깨지는 바람에 탄약의 경우는 25% 정도만이 사용 가능한 상태였다. 차량도 일정간격으로 가동을 시켜주지 않으면 시동이 걸리지 않았다. 땅 표면도 두껍게 얼어있어 참호를 파거나 축성을 하는 일은 극심한 노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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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년 12월 장진호 전투에서 중공군의 포위를 뚫고 흥남으로 철수하던 미 해병대원들이 눈 위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 |
가장 큰 문제는 동상 방지였는데 전투나 작업 후에 땀을 흘리고 나면 발과 발싸개 사이에 얇은 얼음막이 생겨 양말을 갈아신지 않을 경우 대부분 동상에 걸렸다. 부상자를 위한 수혈관이나 모르핀도 얼어버려 사용이 어려웠으며 부상자를 위한 붕대도 함부로 갈 수 없었다. 전투식량도 일일이 녹여 먹을 수 없어서 얼음조각이 있는 상태로 먹었기 때문에 전투 기간 내내 병사들은 심한 장염과 설사에 시달려 그야말로 생지옥과 같았다.
미 해병대 3대 전투이자 6.25전쟁 3대 전투로도 알려져 있는 장진호 전투는 역사적으로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세계사적으로 볼 때 ‘현대사에서 美⋅中이 최초로 싸운 전쟁’ 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뿐만 아니라 모스코바 전투,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함께 세계 역사상 가장 치열했던 동계전투로 유명하며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철수 사례로 손꼽히고 있다.
장진호 전투로 인해 미군을 포함한 UN군에도 많은 피해를 줬다. 자칫 미 제1해병사단이 중공군의 포위망에 갇혀 전멸할 수도 있었다. 이 전투에 대해 미국의 뉴스위크지는 ‘진주만 피습 이후 미군 역사상 최악의 패전’이라고 기록한 바 있으며, 미군의 전사에는 ‘역사상 가장 고전했던 전투’로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이 전투는 1만 5천여 명의 미군 대비 10배가 넘는 중공군의 공격을 지연시키고 중공군에게 막대한 손실을 입혀 중공군 지휘부가 3개월에 걸쳐 부대를 재편성하기 위해 후방으로 철수하는 등 연합군이 전열을 정비해 다시 반격태세를 갖출 수 있게 했다.
대한민국을 수호하기 위해 수많은 유엔 참전용사들이 엄동설한의 혹독한 추위와 함께 밤에는 적과 맞서 싸워야 했으며 결국 이 땅에 숨져갔다. 그들의 고귀한 희생이 있었기에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을 수 있고 그 속에서 우리들은 소중한 자유를 만끽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병락 기자 byunglak169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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