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임시정부와 함께 ‘대한군무도독부’를 창설한 최운산 장군은 일본 정규군대를 상대로 무장독립전쟁을 하려면 독립군의 규모와 세력이 더 확대되어야 한다는 판단을 하였다. 3.1 혁명이후 간도로 들어오는 젊은이들이 계속 늘어났고 더 많은 독립군을 길러내기 위한 결단이 필요했다.
또 다른 부대를 창설하기로 결정한 최운산은 민족자결의 의기가 통하는 서일과 함께 ‘북로군정서’를 창설을 주도하였다. 자신의 소유지인 서대파를 ‘북로군정서’의 주둔지로 내어주고 무기와 식량, 군복 등 모든 군수물자를 제공하였다. ‘대한군정부’가 그동안 주목할 만한 군사력을 갖지 못했다가 1919년 ‘북로군정서’로 재편되면서 갑작스럽게 북만 제1일의 군사조직을 가진 세력으로 등장할 수 있었던 이유이다.
또한 3.1운동 이후 뜨거운 열망으로 모여드는 수많은 애국청년들을 무장독립군으로 집중 양성하기 위해 십리평에 6개월 단기군사학교 ‘사관연성소’를 설립했다. 당시 천 명이 넘는 이 두 부대의 창설과 운영에 필요한 군자금 지원과 무기구입 등으로 상당한 규모의 재산이 한꺼번에 소진되었으나 최운산은 이 모든 것을 기꺼이 감당하였다.
북간도의 무장독립운동에 대한 연구와 기록이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탓인지 ‘북로군정서’의 창설자가 김좌진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는 잘못된 내용이다. ‘북로군정서’의 총재는 서일이고 김좌진은 ‘북로군정서’ 설립과 함께 독립군 양성기관으로 창설된 6개월 과정의 단기군사학교 ‘사관연성소’의 소장으로 임명되어 독립군 훈련을 책임졌다.
1960년대 청산리전투를 그린 소설 “우등불”에서 김좌진을 북로군정서 총사령관으로 묘사한 이범석은 당시 20세의 사관연성소 교관이었다. ‘사관연성소는 ‘대한북로독군부’의 독립군을 양성하는 기관이었다. 장기간 무장독립군을 훈련 양성한 경험이 많은 ‘대한군무도독부’가 ’사관연성소‘ 운영을 지원하고 관리하였다.
’북로군정서‘의 병사인 이정(李楨)이 1920년 7월에서 9월까지 작성한 「이정의 진중일기」를 살펴보면 본부인 ’대한북로독군부‘에서 ’사관연성소‘를 시찰한 것을 기록했다. 김호석 등 이 내용에 등장하는 간부들이 ’대한군무도독부‘ 소속이다.
또한 이 진중일지 8월 13일 (금요일) 맑음 (경신 6월 29일)자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훈련생들의 분규가 있었고 이에 훈련소 관리의 책임을 맡은 김좌진을 비롯한 이범석 등이 본부로부터 징계를 받은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8월 13일 (금요일) 맑음 (경신 6월 29일)
소장 명령으로 본부 교사 이범석·학도단 제1 학도대장 최준형(崔峻衡)·제 2 학도대장 서리 오상세(吳祥世)는 1주일 경근신(輕謹愼)에 한건원(韓建源)·강화린(姜華麟)·백종렬(白鍾烈)·김훈(金勳) 제 구대장은 10일간 금족(禁足)에 각각 처벌하고 부총재 대리의 명령으로 소장(註 김좌진)은 2주일간 정직(停職)에, 교수부장은 1주일간 경근신(輕謹愼)에 각각 처벌하고 학도단장은 의원면직하다.”
이렇게 상부의 지시를 받고 문책을 받았던 사관연성소장 김좌진 장군이 그동안 ‘북로군정서’의 창설자로 알려진 것은 청산리전투에 대한 연구자들의 좁은 해석에 기인한 것으로 사료된다. 그리고 당시 김좌진은 ‘북로군정서’가 창설되기 전에 최운산장군의 자택에서 장기간 머물렀다고 최운산 장군의 큰딸 청옥이 증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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