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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청각에서 석주 이상룡의 시대정신을 만나다

"임청각 앞 철길 방음벽 드디어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구름 한 점 없는 겨울의 찬 바람이 귓불을 때리는 오후 시간에 가까운 지인과 들른 곳은 그 유명한 안동의 임청각이다.

오늘 이곳에는 몇몇 남성들이 이리저리 물건을 옮기며 뭔가를 준비하고 있었다. 작업하는 분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우연히 들른 오늘은 일제가 민족정기를 끊겠다며 놓은 중앙선 철로를 매일 다니던 기차가 오늘 오후 7시 30분을 마지막으로 그 운행을 마친다.”고 한다. 그리고 “마지막 운행 기차를 끝으로 임청각과 철로를 막고 있던 철길 방음벽을 내일 철거하는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국무령 이상룡의 생가 명패가 보인다

 

임청각의 입구에 서니 왼쪽에는 임청각길 63이라는 도로명 주소가 붙어있고 그 오른쪽에는 국무령 이상룡의 생가라는 명패가 찾아오는 이를 반기고 있었다. 

 

수많은 독립열사들이 묵은 군자정의 모습

 

바로 맞은 편에는 수많은 독립열사들과 시인 묵객들이 묵어갔다는, 조선시대 양반주택의 별당형 정자인 군자정이 자리하고 있었고, 그 왼쪽으로는 정승이 태어난다는 이야기와 함께 진응수가 나는 용천이 바로 방 밑에서 솟는다고 하여 불려진 우물방이 있다. 그 옆으로는 안방과 부엌 그리고 창고 등이 있는 내당이 펼쳐진다.

 

행랑채와 창고 그리고 사랑채가 보인다.

 

입구 왼편에 길게 늘어진 행랑채와 창고 및 사랑방은 지금까지 임청각이 견뎌 올 수 있었던 세월을 이야기하는 듯 뭔가 덤덤한 표정을 짓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군자정 오른편에는 사당 한 채가 세월이 야속함을 이야기하듯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이상룡 선생은 독립운동을 위해 떠나면서 “나라를 되찾지 못하면 가문도 의미가 없다.”고 하며 조상의 신주를 땅에 파묻어 현재의 이 사당에는 봉안된 신위가 없다고 한다. 

‘동쪽 언덕에 올라 길게 휘파람 불고 맑은 시냇가에서 시를 짓는다’는 도연명의 「귀거래사」 시구를 빌려 그 이름을 지은 임청각은 조선시대 민간 가옥 중 가장 큰 규모의 양반가 주택으로 500년 역사를 간직한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이다.

 

 

임청각은 사당과 별당형 정자인 군자정, 그리고 본채인 안채, 중채, 사랑채, 행랑채가 영남산과 낙동강의 아름다운 자연과 조화롭게 배치되어 있는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주택으로, 일제강점기 중앙선 철도 부설로 99칸 건물 중 부속건물이 철거되어 현재는 60여 칸만 남아 있다. 

임청각은 1519년(중종 14)에 낙향한 이명이 지었으며, 1767년 봄에 허주 이종악李宗岳(1726~1773)이 고쳐 지었다. 

또한 이곳은 석주石州 이상룡李相龍(1858~1932) 선생을 비롯한 선생의 동생 이상동. 이봉희 아들 이준형, 조카 이형국. 이운형. 이광민, 손자 이병화, 손부 허은, 당숙 이승화까지 11명의 독립운동가가 건국훈장을 받은 역사의 현장이다.

 

 

올해는 항일무장투쟁사에서 길이남을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가 대승을 거둔 100년이 되는 해이다. 그 어느 누구인들 귀하지 않은 목숨과 재산이 있겠는가만은 이 나라 이 민족이 오늘날의 모습으로 선진 대한민국을 만들어 올 수 있었던 근저에는 석주 이상룡 선생의 가족들처럼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양반으로서의 기득권을 버리고 조국과 민족을 위해 모든 것을 내놓은 분들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오른편의 행랑채가 보이고 왼편에는 일제가 민족정기를 말살하기 위해 놓은 중앙선 철도의 기차 소리를 막기 위해 설치한 방음벽이 보이는데 내일 이를 철거함에 드디어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나라를 지키고 역사를 지켜나간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생각해보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역사의 현장에 서서 당시 그 분들의 생각과 모습을 그려보는 소중한 시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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