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뒤안길로 서서히 저물어가는 경자년 올해는 제국주의 일본 식민지로부터 자유와 광복을 맞이한 지 제75주년이 되는 해이다. 동시에 6월 7일과 10월 21일은 항일무장투쟁사에서 신기원으로 기록된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에서 각각 승리를 거둔지 100주년이 되는 뜻깊은 날이기도 하다.
그 동안 여러 매체와 언론을 통해 봉오동·청산리 대첩 100주년에 대한 소식을 전해들었지만 실제로 이 두 대첩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둘 수 있었던 외부적인 요인에 대해서는 밝혀진 바가 그리 많지 않다.
봉오동·청산리 대첩 100주년, 승리의 숨은 조력자, ‘체코군단’에 대해 그 동안 연구하며 자료를 수집해 오던 상생문화연구소의 정원식 박사로 부터 자세한 이야기를 전해 듣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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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오동 전투 지역과 청산리 전투 지역> |
독립전쟁 제1차 대승리, 봉오동 전투
100년 전 1920년 6월 7일 봉오동 전투는 우리 독립군 연합부대가 두만강을 넘어 일본군을 공격하여 괴롭히자, 이에 일본군은 별동부대를 편성하여 지린성 왕칭현 봉오동 근거지를 토벌하려다가 우리 독립군의 유인작전에 걸려 대패한 전투를 말한다.
봉오동 전투 발발 전 1920년 3월에 작성된 일본 정보자료에 의하면, “1920년 1월부터 3월까지 우리 독립군은 총 24회의 국내 진공작전을 실시하여 일본군에게 많은 피해를 주었다.” 또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 1920년 12월 25일자 기사에는 “1920년 3월부터 6월 초까지 우리 독립군이 일제 관공서를 파괴한 곳이 34개소에 달한다.”고 보도하였다.
이는 일본군에게 상당한 압박감으로 작용하여 일본군이 토벌을 감행할 수 있는 요인으로 작용을 했다. 이때 우리 독립군 부대는 소대, 혹은 분대 단위로 익숙한 주변 지형과 지물을 활용하여 치고 빠지는 게릴라전법을 적극 구사하였다.
실제 일본군이 토벌군을 편성하여 소탕에 착수하게 된 것은 바로 봉오동 전투가 벌어지기 이틀 전 1920년 6월 5일 대한신민단의 독립군 부대가 함경북도 종성군 강양동에서 일본군 순찰소대를 타격한 사건에서 비롯되었다.
다음날 6월 6일 일본군 1개 소대 병력이 두만강을 건너 추격해오자, 최진동·운산·치흥 삼형제가 이끈 군무도독부와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그리고 안무의 대한국민회군 등이 연합하여 결성한 ‘대한북로독군부’의 독립군은 삼둔자(三屯子)에서 일본군 추격대를 공격해 큰 피해를 입혔다. 이때 이화일 소대장의 유도작전이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이에 일본군 야스카와 지로(安川二郞) 소좌는 이를 구실로 함경북도 나남에 주둔하던 제19사단 월강추격대대와 남양수비대 1개 중대 총 500여 명을 이끌고 독립군 근거지인 봉오동 토벌에 나섰다. 이때 대한북로독군부와 한경세의 대한신민단의 독립군 연합부대(1,200여 명)가 일본군 토벌대인 최정예 정규군에 맞서 싸워 승리한 전투가 바로 ‘봉오동 전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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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군의 봉오동-청산리 대첩과 일본군 토벌작전 현황 |
상해 임시정부의 기관지인 독립신문은 1920년 12월 25일 자에 “일본군 전사자 157명, 중상 200여 명, 독립군 전사자 4명, 중상 2명”이라고 발표했다. 또한 이 봉오동 전투는 1월 7일 상해 임정이 무장독립전쟁을 선포한 지 5개월 만에 거둔 승리로써 “독립전쟁 제1차 대승리”라고 규정했다.
- 정원식 박사 약력 -
⦁중국 북경대학교 대학원 국제정치학 석사
⦁중국 북경대학원 국제관계학(동아시아 해양안보 전공)박사
⦁재한국북경대학대학원교우회 초대회장
⦁약산 김원봉 장군 기념사업회 이사
⦁재향군인회 안보전략연구원 논문심사 위원
⦁상생문화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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