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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주의 봉오동전투 이야기』 통합부대 대한북로독군부의  창설 

당시 간도에는 무장·비무장의 수십 개의 독립운동 단체들이 있었다. 그러나 일본군을 상대로 무력투쟁을 할 수 있는 전투력을 갖춘 단체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대부분의 단체는 자신의 역량에 따라 게릴라전을 벌이기도 하면서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러나 3.1 독립선언 이후 무장독립운동 세력의 분위기가 변화하기 시작했다. 북간도 독립군의 수가 불어나고 상해의 임시정부도 1920년을 ‘독립전쟁 元年의 해’로 선포하고 만주의 무장독립군들로 하여금 무력투쟁을 최우선 과제로 선택하도록 적극 독려하였다. 

최운산 장군도 이에 부응하여 여러 독립군부대를 통합하는 단일사령부 설치를 추진하였다. 일본 정규군대에 대적하려면 소규모 개별부대의 게릴라식 전투가 아니라 대규모 독립군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명령계통이 확립되어야 한다는 판단을 하고 이를 실행에 옮긴 것이다. 

최운산 장군은 만주 각지에서 산발적으로 투쟁하던 독립군부대장들을 만나 통합부대의 필요성을 설득하였다. 사실 당시 북간도 일대 독립군부대나 단체 중 최운산의 재정적 지원을 받지 않은 곳이 거의 없었다고 할 만큼 이미 그들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 

어느 시대나 무력전에서는 무기와 식량공급이 전쟁의 승패를 가르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다. 간도의 독립군 단체들은 봉오동 주변에 안정적으로 주둔할 수 있도록 주둔지를 제공하고 무기와 식량 등 필요한 군자금을 지원할 것을 약속하며 무력투쟁을 함께 하자는 요청을 받아들였다. 이에 대해 『한민족독립운동사』는 북간도 독립군이 대한민국 국군으로서 한국인들의 독립전쟁과 독립의 희망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가 상해(上海)에 수립되고 만주지역이 군사적 기능을 실질적으로 담당하게 되자 그 중요성이 더해 갔다........ 내외국민에게 독립전쟁에 대한 각오와 군사행동에 대한 노력을 당부하였고 끝내는 장기전쟁계획이 시정방침으로 발표되었다...... 이로부터 만주의 한인 독립군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군사적 임무를 담당한 국군으로서 국내의 한인의 여망을 받게 되었다.”고 기록하였다.

당시 무장독립군 단체들이 대통합을 이루기까지 지난한 과정이 있었다. 각 단체들의 특성과 관계를 정리하기 위한 수차례의 회의를 거쳐야 했다. 다음은 1920년 5월 3일 국민회·군정서·신민회·군무도독부·광복단·의군단의 6개 단체 대표들이 봉오동에서 협의한 18개항이 담긴 서약서다. 

    「在北墾島各機關協議會誓約書(재북간도각기관협의회서약서)」
    본협의회는 북간도각기관의 정신통일과 사업발전을 위하여 다음과 같이 서약을 체결한다.

    ① 본협의회의에 참가한 신민단·군정서·도독부·광복단·국민회·의군단은 5월 11일 음력 3월 23일에 모연대를 소환한다.
    ② 각기관내 군적軍籍에 등록한 군인은 상호강제로 편입할 수 없게 한다.
    ③ 차후로는 지방기관설립과 인원모집은 민의에 따른다.
    ④ 각 기관은 모금이 필요할 시에는 협의회의 의결에 의한다.
    ⑤ 어떤 기관과 어떤 기관이 쌍방 암의頷意로 연합할 시는 협의회에서 찬성한다.
    ⑥ 각 기관의 지방기관에 대하여 상호 침해할 수 없다.
    ⑦ 자단체自團體의 통신기관에 대하여는 물론 각 단체의 통신을 급속, 신실하게 전달한다.
    ⑧ 각 단체의 어느 기관을 불문하고 경보警報있을 시는 합력 구원한다.
    ⑨ 사업 진행상의 비시卑狋기관의 능력으로 처결할 수 없을 시는 협의회에 제출한다.
    ⑩ 금일 회의에 내참來參하지 않은 단체에 대하여 상호 성의로 권고하여 본회에 참가한다.
    ⑪ 협의회기관보를 발행한다.
    ⑫ 매월 1일·15일을 협의회정기회기로 정한다.
    ⑬ 특별사항이 있을 시에 2개 기관 이상이 동의하면 특별회를 개최한다.
    ⑭ 협의회의원은 각 기관으로부터 2인씩 매차每次파견한다.
    ⑮ 결缺
    ⑯ 일후日後긴요사정에 의하여 위의 제반조건은 협의회의 결의로 증산增刪할 수 있다.
    ⑰ 이상 조약에 위반하는 기관이 있을 시는 2차 권고로 반성하지 않으면 최후의 수단을 쓴다.
    ⑱ 위 서약 기일은 오는 11일로 한다.

    대한민국2년 5월 일
    신민단 대표 김준근·이흥수, 군정서 대표 나중소·김좌진, 군무도독부 대표 최진동·이춘범, 광복단 대표 전성륜·홍두극, 국민회 대표 김병흡·김규찬, 의군부 대표 김종헌·박재눌

이 서약서에 기록된 날짜가 대한민국 2년 5월이다. 북간도의 독립군들이 대한민국의 군인으로 독립전쟁에 임했다는 것을 명확하게 알 수 있는 근거다. 그들이 원하는 독립은 이미 사라진 나라 조선을 되찾자는 것이 아니었다. 상해의 임시정부를 받아들이고 인민들이 주인이 되는 새로운 나라 대한민국을 함께 건설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한 것이다. 봉오동의 무장독립군기지는 오랜 기간 민족적 열망이 결집된 곳이다. 이후 5월 19일 통합이 마무리되어 <대한북로독군부>가 창립되었다. 

「誓約書」 

我兩機關은 민족정신의 통일과 軍務勢力의 확장을 讓하기 謨[?]하기 위하여 永久合一할 것을 확실히 서약한다. 

- 국민회의 군무위원회와 군무도독부의 명칭을 취소하여 기관을 통합하여 大韓北路督軍府라고 개칭한다. 
- 국민회는 행정기관, 대한북로독군부는 군사기관으로으로 하여 사무를 각각 집행하는 것으로 하여 국민회는 북로독군부를 보조하고 일체 군무를 籌備할 것. 
- 前대한군무도독부의 지방기관인 地方局은 국민회에 귀속할 것. 
- 위 서약은 양 기관 대표 날인일로부터 시행한다. 

대한민국 2년 5월 19일 
전 대한군무독군부 대표 최진동, 대한국민회 대표 김병흡, 군무위원 대표 안무

최운산의 부인 김성녀 여사는 “각각 개별적 활동을 하던 북만 독립군들이 여러 차례의 회동을 거쳐 봉오동을 근거지로 대동 통합하게 된 원인 중 최대 요건은 독립군의 무기 및 모든 장비, 피복, 식량 등 제반 자금 문제를 최운산이 모두 책임지기로 합의한 것에 있다.”고 기록하였다. 

통합군단 ‘대한북로독군부’의 병력은 수천 명에 달하였다. 명실공히 대군단이 탄생한 것이다. 대한군무도독부의 사령관 최진동이 통합부대 대한북로독군부의 총사령관 府長에 취임하였다. 최운산은 참모장으로 재정과 행정을 책임졌을 뿐만 아니라 군사정보를 수집하고 작전회의를 이끌었고 전투에 참전하였다. 

홍범도 부대원이었던 이종학은 후일 간도에서의 무장독립전쟁에 참가한 회상기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한 부대원의 회상기라 비록 정확한 문서는 아니지만 대략의 규모와 당시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전략) 그해 음4月쯤에 국민회군대(안무 홍범도), 도독부(최진동), 이군부(허영장) 신민단 군인, 맹??(필자주-맹호단), 7개 무장대가 합하여서 독군부라고 명칭하고 부장 최명록, 사회장 홍범도, 군부총장 안무였다. 그러니 총 군인수가 二千名에 달하였다. 그해 음사월쯤이다.(취떡과 취샘이를 먹고 조가 자주 났던 때이다.) 우리 군대들은 봉우골 산을 가운데 두고 자우꼴 안에 거주하는 조선 농촌에 널려 동쪽이나 西쪽 山앞은 全部 우리 차지였다. 봉우골 어구와 기타 지점에 보초가 있었고, 각처를 경찰隊들을 보내서 적정을 탐지하였다.”

곡물상과 축산업으로 이미 러시아와 장기간 무역 거래를 하고 있었고, 가까운 연해주의 독립군들과도 관계가 깊었던 최운산 장군은 지속적으로 러시아에서 무기를 구입하고 있었다. 

그러나 1919년~1920년 사이 급작스럽게 늘어난 독립군들을 모두 무장시키기 위해서는 한꺼번에 많은 무기를 구해야 했다. 무기 공급처와 막대한 비용이 필요했다. 

그때 마침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체코군단이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속속 블라디보스톡으로 집결하고 있었다. 더 이상 무기가 필요 없어진 체코군에게 무기를 대량으로 살 수 있었다. 

대규모 토지와 목장을 소유하고, 국수공장, 콩기름공장, 성냥공장, 비누공장, 양조장을 비롯한 다양한 생필품 공장을 운영하던 간도 제1의 거부였던 최운산은 독립전쟁이 한 고비를 넘어갈 때마다 자신의 재산을 줄여가며 군자금을 마련했다. 

1920년 1월 5만 원에 팔았던 석현의 땅에 후일 종업원 이만 명이 넘는 대규모 제지공장이 세워졌다. 석현지역의 2/3에 이르는 그 제지공장은 지금은 생산이 멈추었지만 건물 등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대한북로독군부’의 모든 부대의 간부들은 수시로 본부를 드나들며 군수품을 지원받았다. 특히 본부인 최운산 장군의 집에서 장기간 머물기도 했던 김좌진을 비롯해 연대장 홍범도 등이 주둔지로 돌아갈 때는 식량을 실어가는 수레 행렬의 끝이 보이지 않았다고 최운산 장군의 큰딸 청옥은 증언한다. ‘대한북로독군부’ 군의 군복 제작과 식량보급을 책임지며 부대 운영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최운산장군의 처 김성녀가 기록한 ‘대한북로독군부’의 조직은 다음과 같다. 

개편 후의 북로독군부 조직

총재 겸 사령관 최진동
부관 안무
참모장 최운산
참모 최치흥(일명 명순)
참모 이태범
의무원장 박영
특별부대장 이원
제1연대장 김좌진
제2연대장 홍범도
제3연대장 오하묵
  대대장  최태례
  대대장  최도례
 제1중대장 이천오
 제2중대장 강상모
 제3중대장 강시범
 제4중대장 조권식

통합 후 장비 및 인원은 다음과 같다.
1. 대포 10여 문,  
2. 기관총 수십 정,  
3. 장총 천여 정,  
4. 권총 수백 정,  
5. 수류탄 수천 개,  
6. 실탄 수만 발,  
7. 병력 수는 수천에 달하였고 군복은 중국 군인복과 동일하였다. 

봉오동전투 직전인 1920년 당시 중국 동북삼성을 다스리던 순열사 장작림에게 일본의 봉천총영사가 보낸 외교문서를 보면 북로독군부가 성립된 5월의 북간도 상황을 비교적 객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이 공문은 압록강 방면과 두만강 방면에 대한 보고로 나누어져 있고 ‘두만강 방면의 개황’ 내용의 대부분은 봉오동과 관련된 보고로 채워져 있다. 

이 문서는 “봉오동 불령선인은 미싱 8대를 매입 독립군의 군복을 피복을 만드는 중이다. 왕청현 봉오동과 부근 부락에는 불령선인 약 1,000명 산숙(散宿)하는 연병장 2개소를 설치 매일 교련을 실시하고 있고 차(且)시(時) 부근 부락을 배회 시위운동을 한다.“고 ‘대한북로독군부’의 상황을 파악하고 있다. 

이렇게 봉오동전투는 ‘대한군무도독부’를 중심으로 수천 명에 이르는 독립군이 주둔 무기와 식량, 군복 등 모든 면에서 잘 준비된 현대전이었다. 1912년 이래로 체계적으로 무장독립전쟁을 준비한 최운산 장군의 헌신과 노력으로 신한촌 봉오동은 독립군의 대규모 통합부대 ‘대한북로독군부’가 주둔하는 군사기지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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