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K-history 독립운동사
100년 전 1921년의 독립운동의 몇가지 순간들

100년 전, 1921년의 독립운동사

 

▶ 상하이 영안백화점 옥상에 있는 기운각(綺雲閣, 비단 구름의 누각) 앞에서 임시정부 요원들이 1921년 신년회 기념사진을 찍었다.

▶미국에 체류하고 있던 이승만은 1920년 12월 8일 상하이로 들어와 임시정부의 대통령 직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이승만과 국무총리 이동휘는 임시정부의 운영과 정책을 놓고 날카롭게 대립했다. 이동휘는 임시정부 명의로 모스크바에서 받은 자금의 행방을 추궁당하자 1921년 1월 총리직에서 사임했다.  1월 24일 상해임시정부를 탈퇴하게 된다. 1921년 5월에는 한인사회의 여러 공산당조직의 갈등 속에서 고려공산당을 창당하여 독립운동을 계속 하였다.   

▶당시 상해임시정부는 많은 내부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조직 개편이 필요했다. 그래서 1921년 2월에 박은식(朴殷植)ㆍ김창숙(金昌淑) 등이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주장하는 촉진선언문을 상해에서 발표했다. 

▶1921년 양력 4월 22일이 음력 3월 15일 어천절이었다.  이승만 상해 임시정부 대통령은 단군 어천절 기념식 석상에 참석했다. 개신교 신자였던 이승만은 단군왕검 어천절 찬송사(讚頌詞)를 낭독하여 단군 황조의 뜻을 계승하겠다고 다짐했다. 

▶정의부와 보천교의 연계. 보천교 간부 김응두는 1919년 대황산에서 60방주를 고명(告名)할 때 북방주의 직책을 맡은 김영두(金英斗)로 짐작된다. 그는 1921년 음력 3월경 교도들로부터 군자금으로 모집한 20만엔(円)을 갖고 나가 행방불명이 되어, 이에 정읍경찰서가 탐지하고 그의 소재를 수사하고 있었다. 

▶김숙자는 휴교령에 고향인 평안북도 영변으로 내려간 뒤 1919년 8월 여성 비밀 독립운동 조직인 ‘대한애국부인회’ 평북조직책으로 활약하다 1921년 5월 일경에 붙잡힌다. 그의 활약상은 수원대 박환 교수가 최근 찾아낸 ‘매일신보’ 1921년 6월 24일자 기사 ‘여자 정치범 검거, 독립운동의 거괴(巨魁) 김숙자’에서 확인할 수 있다. 기사에 따르면 김숙자는 독립운동 군자금을 모집하다가 체포됐다.

▶궁인성 단학회 자성 분회장은 1921년 체포되어 평양지방법원에서 징역 12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으며  정부는 2011년 궁인성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1921년 04월 13일 매일신보[每日申報])

▶1921년 8월 2일 이유항은 청수읍 대안 태구(靑水邑對岸台溝) 뒷산에서 전택춘(全澤春)·전택수(全澤秀) 등과 함께 적진 습격을 계획하던 중 일경의 포위 공격을 받고 교전하였다.

▶1921년 9월 의열단원 오성륜이 조선총독부에 폭탄을 던지고, 이듬해 3월 오성륜, 김익상 등이 상해 황포탄 부두에서 일본의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를 저격하는 등 정확한 타격 대상을 선정해 행동에 나섰다. 

▶이덕수 선생은 1921년에는 양승우(楊承雨)와 같이 벽창(碧昌) 청년의용대를 조직하여 총지휘에 임명되었다. 

▶서간도의 핵심 독립운동조직인 서로군정서도 1921년 5월에는 본부를 길림성 액목현으로 이동하여 독립운동의 전략적 기지로 삼는 등 만주지역은 독립운동의 터전이었다

▶ '부산경찰서 폭탄 투척 의거'  박재혁 의사 1921년 5월 5일 면회 때는 무릎의 상처가 아물었는데, 박재혁은 "왜놈 손에 사형당하기 싫어 단식 중"이라고 하면서 사식으로 가져간 달걀 꾸러미를 돌려주었다. 그리고 엿새 후인 5월 11일(음력 4월 4일) 오전 11시 20분, 박재혁은 사형 집행 전 12일간의 단식 끝에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거두었다. 향년 26세. 
   
▶1921년 6월 자유시 참변 :  1921년 6월 28일 이르쿠츠크 한인 공산당과 소련 공산당에 의해 3,500명의 독립군이 궤멸당했다.

▶최진동은 자유시 참변 후에도 무장 항쟁을 지속했다. 그는 1921년 9월에 흑하 일대에 근거지를 두고 무장대원을 지휘해 왕청현 라자구 방면에 있던 일제 관공서를 공격했다.

▶ 보천교는 1921년 황석산에서 고천제(告天祭)를 하면서 시국(時國) 건설을 내세웠다.

▶1921년 6월에는 박진순, 이극로와 함께 인도양, 수에즈 운하, 지중해, 알프스산맥, 독일을 거쳐 4개월만인 10월에 레닌그라드에 도착하였고, 레닌과 독립운동 전반에 대하여 논의하고 독립운동자금도 얻어왔다.

▶1921년 개천절을 맞아 상해임시정부에서는 개천절 기념식을 행했을때도 신가(神歌)를 독창했다고 되어있는데 이 신가가 바로 어아가다.   

▶1921년 10월 초 신규식은 임시정부의 국무총리대리 겸 외무총장, 그리고 특사의 자격으로 광동을 방문하여 손문을 만났다

▶단군교 기관지 『단탁』 창간호 (1921년 11월)  
첫문장을 해석하면 이렇다 " 제(계연수)가 일찍이 스승님으로부터 다음과 같이 들었습니다. "라고 말한다. 약초캐는 것만 강조하는데 중요한 것은 계연수 선생은 스승이 있었다. 해학 이기선생이다. 

▶1921년 11월 11일부터 개막되는 워싱턴회의를 앞두고 임시정부는 여기에 파견할 한국외교후원회를 조직하고 대(對)태평양회의 선언서와 결의문을 발표했다. 이 한국외교후원회에 보천교 대표 2명이 포함되었다

▶  주시경의 제자들은 스승의 의지를 이어받아 1921년 12월 3일에 조선어연구회를 조직했다. 

▶ 홍범도가 모스크바에 도착한 것은 1921년 12월이었다. 홍범도가 도착하자 먼저 모스크바에 와 있던 이동휘가 홍범도가 묵고 있던 여관을 찾았다. 두 독립운동가는 2년 만에 낯선 타향 땅에서 손목을 맞잡고 쌓아두었던 이야기 보따리를 풀었다

 

 

박찬화 기자  multikorean@hanmail.net

<저작권자 © 한韓문화타임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박찬화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