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문수(성균관석전교육원 교수)
앞서 말한 바, 천상열차분야지도는 대륙 고조선의 하늘을 반도의 하늘로 이식(移植), 재탄생되었다. 단군조선의 흔적은 아예 지워버린 것이다. 권근(權近)의 ‘천문도(天文圖)의 지(誌)’에 따른 고찰이다. (참조: 한눌의 ‘천문도(天文圖)의 비밀, 단군을 삭제하라’)
성경(星鏡)은 1861년 남병길(南秉吉 1820-1869)이 저술한 천문(天文) 설명서로 ‘별을 비추는 거울’을 뜻하며, 3원 28수의 별자리와 각 별자리에 대한 실측값을 수록했다.
“28수(宿)의 체계에서 사방신수(四方神獸)를 동방의 청룡(靑龍), 서방의 백호(白虎), 남방의 주작(朱雀), 북방의 현무(玄武)라 하나 한(漢)나라 시대에는 동방의 구미호, 서방의 백토, 남방의 삼족오, 북방의 두꺼비의 사방(四方) 신수(神獸)의 체계가 있었다.”
이는 원가(袁珂)가 저술한 《중국신화대사전 中国神话大词典》에서 “한(漢)나라 시대의 석각화상(石刻畵像) 및 전각화(磚刻畵)를 고찰해 보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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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천가(步天歌) |
항상 구미호(九尾狐)와 백토(白兎), 두꺼비(蟾蜍), 삼족오(三足烏)의 무리들이 서왕모(西王母)가 앉아 있는 곁에 나란히 있는데 이는 상서(祥瑞)러움을 나타낸다.”고 밝혔다.
부도지(符都誌)에서 말하는 해혹복본(解惑復本)이라는 위대한 종교적 메시지 또한 이에서 나오지 않았는가.
이 기록으로 보면, 우리가 알고 있는 사방신수는 漢나라가 고조선의 천문역사를 탈취, 풍수지리(風水地理) 별자리(星座) 오행(五行) 용어마져 기묘하게 바꾸고 단군조선의 천문 문명을 지워 버렸음이 확인되는 대목이다. 천문 용어해설에서 참으로 유의하고, 가슴에 깊이 새겨야 할 부분이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에게 예의를 갖췄으면 좋겠다.
고사서에서 다시 그 흔적을 찾아보자. BC 2086년 혼천기(渾天機)를 만들었다. 단기고사(檀奇古史)의 기록이다. 혼천기(機)는 한(漢)나라가 혼천의(儀)라 바꿨다. 3,519년 지난 1433년 세종 15년 박연(朴堧) 등 3인이 만들어 혼천의라는 이름을 그대로 답습했다.
BC 2084년 감성관(監星官) 황보덕(皇甫德)이 50년 동안 천문관측을 통해 태양계의 운행을 확인했다. 천체 중심축인 북극성과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 등도 관측했다. 이를 토대로 역서를 완성, 조선역서(朝鮮曆書)라 최초로 이름했다.
창사(長沙) 마왕퇴(馬王堆)에서 출토된 한(漢, 武帝 BC 134년) 때의 역서를 최고(最古)의 고대 역서라 불리고 있으나, 고조선이 이룩한 지 1,950년 후의 일이다. 당력(唐曆) 또한 822년, 887년 간(刊)으로 비교가 되지 않는다.
BC 1916년 감성(監星, 天文臺)을 설치했다. 이 또한 2,548년 후인 632년 신라 선덕여왕이 첨성대(瞻星臺)로 이름을 바꾸었다.
BC 1836년 11세 도해(道奚) 단군 때 천문경(天文鏡), 자명종(自鳴鐘), 양우계(量雨計), 측풍계(測風計), 황룡선(黃龍船), 양수기(揚水機), 자행륜거(自行輪車), 경기구(輕氣球), 자발뢰차(自發雷車), 조담경(照膽鏡) 등 26종의 발명품이 나왔다고 단기고사(檀奇古史)는 전하고 있다.
곽수경(郭守敬 1231~1316)이 수시력(授時曆)을 만들기 위해 간의(簡儀), 규표(圭表), 앙의(仰儀) 등 12종의 관측기구를 설계, 제작했다고 했다. 곽수경이 석각(石刻)에 탁본된 연화루(蓮花漏, 시계의 일종)를 보고 그 제조 원리와 방법을 유추해 냈다는 기록에서 확인되듯, 단군조선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닌가.
1434년(세종 16) 해시계 앙부일구(仰釜日晷), 청동 물시계 (경점기), 자격루, 천상시계 옥루 등이 이순지(李純之), 장영실(蔣英實), 김빈(金鑌) 등의 손을 빌어 제작된다. 단군조선이 만든 천문관측의기(天文觀測儀器)들은 원, 명을 거쳐 3,270년 긴 잠에서 깨어나 신생 조선을 깨우는 불쏘시게가 되었음이다.
BC 1733년 '무진오십년 오성취루(戊辰五十年五星翠樓)', 13세 흘달(屹撻) 단군 50년 화성 수성 토성 목성 금성이 달과 함께 모인 오성취루 기록이 단군세기에서 확인된다. 앞서 혼천기로 별자리를 헤아렸고, 감성관 황보덕이 관찰한 결과를 토대로 이룬 성과가 아니던가. 천문학자들은 ‘천문현상을 임의로 맞춘다는 것은 확률상 불가하다’는 결론을 내려 단군역대 천문기록이 정확하다는 것을 증빙했다.
고인돌에 천문을 새겨 천추(千秋)를 숨 쉬게 했다. <부도지> 제14장을 보자.
“(제사 지내는) 존귀한 자리를 북진(北辰)과 칠요(七搖)의 위치를 잡아 정했다. 반석(盤石) 위에 제물을 놓고 번제를 지내서 부정을 씻었다.(又尊定北辰七搖之位 燔贖於盤石之上)”라 했다.
북진과 칠요(北辰 七搖:七曜)는 북극성과 북두칠성이요, 번속(燔贖)은 속죄제로 해혹복본(解惑復本)이다. 반석(盤石)은 고인돌을 말한다. 1만 여 년의 천문역사가 시작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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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성취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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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인돌의 천문도 |
고구려를 침공한 唐은 석각도(石刻圖)를 수장하고 동이의 천하관(天下觀)을 불용했다. 그러나 고구려는 벽화(壁畵)로 그 자취를 남겼다.
백제는 545년(성왕 23) 역박사(曆博士) 고덕(固德) 왕보손(王保孫) <日本書紀>, 602년(무왕 3) 승려 관륵(觀勒)이 역본(曆本)과 천문서(天文書)를 일본에 전하고 가르쳤다고 했다<海東繹史>.
선대의 찬란한 천문연구서들은 다정가(多情歌)로만 남아 나는가?.
천문, 산학(算學)자들을 발굴하여 고조선의 천문을 재현하게 한 세종, 훈민정음 창제를 ‘조상의 글자를 본떴다(字倣古篆)’ 고백했듯, ‘조상의 하늘을 본떴다(天倣古篆)’라 고백했다면 어떠했을까?.
그러나 군왕은 고조선의 찬란한 문화와 문명에 대해서는 끝내 입을 다물었다. 조선 사대부들은 다투어 단군시대는 미개(未開)했다고 외쳐 폄하하고 비하했다. 자주적 국가가 되지 못하고 속국의 암울한 시기였다고 변명하기에는 석연치 않은 부분들이 산재해 있다.
32년 통치 기간 고려사(高麗史) 편찬과정에서 단군 기록은 전면 삭제되었고, 조의선인(皁衣仙人) 후예들은 백정(白丁)이 되어 한(恨) 오백 년 굴욕적 삶을 살아 온 것도 보았다. 1424년 영락제의 죽음 앞에서 27일 동안 서쪽을 향해 지극한 부모상(父母喪)의 예(禮)로 사대모화(事大慕華)에 충심을 다한 것도 보았다.
1426년 한양 도성의 대 화재에서 32명이 숨져 갔고, 1만여 명 이재민의 생사는 도외시한 체 사냥터 사기소(沙器所)에서 머문 임금도 보았다. 단, 이순지를 통해 천문류 초(天文類秒)로 비기의 일말을 내비추어 고뇌를 갚았다 자위한 것일까?
이 기록은 천문분야에 가공할 위력을 발휘하게 하는 동력이 되었고, 만세에 찬란한 업적으로 남아 칭송되었다. 사람들은 이 시기를 불러 감히 태평성대(太平聖代)라 말한다.
“盡入書雲觀所藏《天文秘記》于內” 13자(字)의 비밀스러운 이 기록은 단군조선의 천문을 덮은 체, 이 후 조선에서 영구히 사라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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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섭 기자 kmslove2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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