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오피니언 독자 투고
[독자투고] 하룻밤 여행에서 남는 상처와 기억

이 기사는 미국 인디애나폴리스에 사는 문 영임님의 독자투고 기사입니다. 작년 연말에 잠시 한국을 방문했다가 추억에 그리던 삼례와 나주를 둘러보며 느낀 점을 사진과 함께 글로 보내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편집인 주)


                                                                 문영임(Linda Moh)


여행 계획을 미리 준비한 경우에도 특별히 마음에 남는 게 없기도 하고, 우연히 간 장소가 오랫동안 마음에 남기도 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내일은 우리 집에서 자고 나랑 같이 나주에 가면돼” AOK(액션원코리아)의 대표인 정연진님의 이 말에 1박의 짧은 여행이 성사되었다.  

사실 여행이라고 할 것도 없었던 것은 어딜 가는지, 왜 가는지, 누굴 만날건지… 아무런 사전 설명도 없었고, 뭘 해야 하는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미리 예약해놓은 기차를 타고 가면서야, 내가 한국에 사는 동안 집과 학교를 벗어나 가 본 곳이 없었다는 말과 이번 서울 방문 기간엔 가능한 많은 지방을 다녀보고 싶었다라는 말에 안타까운 마음으로 데려가는 것이라고 했다. 그 자비롭고, 한량없는 마음이 얼마나 신기했는지 모른다. 

익산역에 내리면서 “여기가 원래는 이리역이였는데 대형기차 사고 이후에 이름을 바꿨데”라는 설명에 얼른 떠오른 것은 ‘이리? 그럼 쌍방울 속옷 공장이 있겠구나.’싶었다. 오래전에 돌아가신 엄마가 한동안 사업에 바쁘실 때에 가장 많이  하신 말이 ‘이리, 쌍방울 메리야스’였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하면 그 때 어머니의 연세가 지금의 나보다 한참 젊으셨을 때 같다. 

며칠씩 집을 비우고 이리에 다녀오시면 한 동안 바쁘게 사업이 돌아가는지 의욕이 넘친 엄마의 모습에 우리도 덩달아 신이 났던 기억이 있다. 무조건 따라나선 장소에서 돌아가신 어머니의 젊으셨던 시절을 생각하게 되니 왠지 익산으로 바뀐 역의 이름에 섭섭한 생각이 들었다. 

익산역에 내렸는데 삼례를 가야한다고 한다. 삼례는 또 뭐야 하는 호기심 잔뜩 느끼며 산만한 시내를 들어왔구나 싶더니 첫눈에 호감이 가는 ‘삼례문화예술촌’ 이름판이 눈에 띈다. 가운데 광장을 둘러선 각각의 건물들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많은 건물들이 있으니 예술촌이라고 부르나 싶었다. 여기서 ‘남북교류, 지금이 기회다’라는 제목의 로창현 기자님의 강연이 있으니 응원 차 잠시 들려보는 장소라고 했다.  
로기자님은 정연진님과 2018년 북을 처음 방문한 이후 본인처럼 북에 대한 편견을 깨고 나날이 발전되어가는 북에 대해서 일반인들이 자신과 같은 잘못을 하지 않기를 바라는 열정으로 팬데믹 발생 직전까지 3개월에 한 번씩 방북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평양여자 서울남자에게 길을 묻다’라는 책을 냈다. 

삼례문화예술촌 입구

강연장을 찾으려고 둘러보던 중에 이 장소가 예사롭지 않게 보였으나 건물이름만 있고 추가 설명이 없다. 영어가 본 건물이름인지, 영어를 읽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한글로 써놓은 게 건물이름인지 한글 이름만 읽으면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다. 건물이나 간판이름을 붙이는 이유가 세계화를 위한 것이란 주체성 없는 유행이 언제쯤 멈출지 안쓰럽게 여겨졌다. 

강연장소 시어터 애니 
소극장의 내부에서 바라 본 천장 창문과 높은 벽

삼례양곡창고, 이곳은 조정래 작가의 ‘아리랑’소설에 나오는 일제 강점기 동안 전남과 전북을 잇는 곡창지대인 호남평야, 그 중에 만경평야를 중심으로 조선 민중의 쌀독엔 쌀 한 톨이 남아나지 않게 온갖 방법으로 빼앗아 모았던 창고였다.  

창고 밑에서는 썩어나가도록 많이 쌓인 쌀이 컨베이어 벨트로 군산 항구까지 실려 나갔던 그 양곡창고다. 추수 때는 물론이고 춘궁기에도 쌀을 실은 달구지가 줄을 이어 드나들던 곳이다. 

당시 일본은 조선남자들을 동원해 강제노역을 시키며 부산을 중심으로 남북을 관통할 수 있는 철도를 놓고, 원산과 인천, 군산, 목포에는 큰 배가 들어 날 수 있는 항구를 만들어 식민지 조선의 온갖 자원을 일본으로 실어갔다.  

원산에서는 목재가, 군산에서는 쌀이, 목포에서는 목화가 컨베이어 벨트를 이용하여 조선의 농수산물들을 최대한 많이, 최대한 빨리 수탈해 갈 수 있는 방법을 총동원했다. 그때 설치되었던 컨베이어 벨트 모습이 광장 가운데에 그대로 놓여있으나 이것이 무엇인지 아무런 설명도 없이 조명시설을 해 놓아 광장의 중심 장식물로 이용되었다.  

컨베이어 끝인지 광장 중심인지 모르겠지만 그 컨베이어 흔적 끝에는 맹꽁이 형상물을 만들어 일제 수탈 창고 이전엔 맹꽁이와 개구리가 살기 좋은 자연생태지역이였다가 예술촌으로 개발한 이후에 다시 맹꽁이가 와서 살 수 있는 자연환경을 회복했다는 내용이 적힌 큰 돌석 안내판이 있다. 

창고 밖에서 볼 수 있는 높은 창문과 광장을 관통하는 컨베이어 시설
컨베이어 끝에 세워진 맹꽁이 석상

 1900년대부터 들어오기 시작한 일본인들은 호남의 광활한 농지를 경쟁적으로 사들였다. 뿐만 아니라 총독부는 토지조사사업을 빌미로 조선인들의 농토를 빼앗았고, 동양척식회사를 통해 자기 땅을 대책 없이 잃어버린 사람들을 대거 모집해서 서해의 넓은 뻘밭을 농경지로 만들기 위한 간척 사업에 투입시켰다.  

하지만 간척사업이 끝난 후에 대부분의 농경지는 일본 이민자들에게 배당되었고, 조선인들은 다시 일본인들의 소작인이 되는 악순환의 연속이었다.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아 농사지으며 살던 땅을 하루아침에 빼앗기고 전국의 민중이 배를 곯으며 초근목피로 끼니를 때우고 소작인으로, 도시의 날품팔이로, 막막한 만주로 떠나야 했던 잊을 수 없는 역사적인 사실을 외면한 채 내가 서 있는 이곳, 일제에 의한 자본과 노동력 수탈이 진행된 역사의 현장이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고 자연을 살리며 문화인으로 살아보자는 의도로 변형되었는지 안타깝기만 했다.   

삼례문화예술촌은 일제의 창고 관리인이 머물던 관사를 포함하여 목조 4개, 벽돌 2개, 6개의 창고는 곡식창고의 환기를 위하여 지붕에 만든 열개식 창문과 높은 위치의 창문들의 구조로 각각의 건물이 모두 저장창고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더하여 광장 끝에 있는 벽돌금고는 창문도 없고, 밖으로 굳게 닫힌 철문엔 아직도 굵은 열쇠가 달린 이 금고는 당시에 미국에서 수입한 최첨단 금고시설이라고 한다. 

일본인 관사로 쓰였을 건물의 모습
삼례 양곡창고에 대한 유일한 안내판

현재는 각 창고의 내부공간은 전시장과 공연, 책방, 카페와 목공소등으로 이용되고 있다. 물론 높은 천장과 넓은 공간, 양곡보관을 위하여 잘 설계된 창고는 전시와 공연장으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건물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2013년 12월 문화재청은 이 삼례 양곡창고를 등록문화재 제 580호로 지정했고, 대한민국 공공건축 대상을 수상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참고: 지역N문화 www.ncms.nculture.org)  인터넷으로 삼례문화예술촌을 찾으면 양곡창고에 대한 간단한 배경설명 이후에 예술촌으로 변신한 이용가치와 관광객을 끌기 위한 행사안내, 다양한 문화공간을 동시에 즐길 수 있었다는 후기뿐이다. 물론 예술촌 입구와 안내서에도 일제 수탈에 대한 짧은 설명이 나오기는 한다. 

우리 옛말에 ‘부자 하나가 나오면 마을 셋이 망한다’라는 말이 있다. 축구장만한 양곡 창고 하나 하나에 쌀가마니가 쌓이려면 세 마을이 아니라 전라도 인근의 양곡이 다 모아져야 하지 않을까싶다. 

부모의 원수를 잊지 않기 위해 와신상담, 곰의 쓸개를 핥고 장작 위에서 자지는 못할망정 제 나라를 잃고 일제의 채찍과 수탈을 견뎌야 했던 우리의 치욕적인 역사적 시설을 제대로 보존하고 기억하지는 못해도 마치 잊어진 과거처럼, 치욕의 역사를 빼버리고 맹꽁이가 살던 시절을 재현한 것은 역사왜곡에 가깝다고 느꼈다.  

물론 해방 후 2010년까지 농협이 사용하다가 방치된 후에 완주군에서 그나마 일제의 수탈의 증거물로 보존하기 위하여 문화예술촌으로 탈바꿈시킨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그 증거를 위해서 창고의 외벽을 원형대로 보전했다는 안내글은 눈물겨울 만큼 고맙다. 만약 외벽까지 탈바꿈시켰다면 감쪽같이 이곳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었는지 우리의 과거에 무슨 일을 당했는지 세상은 알지 못했을 것 같다. 

다음날, 나주에서 만난 분들이 가자는 곳을 무작정 따라간 골목엔 일제의 적산가옥 외형이 그대로 보존된 채로 홍어전문 식당들이 간판을 달고 줄지어 있었다. 이곳에 얼마나 많은 일본인들이 살았으며, 그들과 함께 살아야했던 조선인들의 삶은 어떠했을까 싶은 의구심이 들었다.  

홍어거리를 지나 ‘영산나루’라는 펜션에 닿았다. 나주를 방문한 여행객들을 위한 식당과 찻집 그리고 고풍스럽게 꾸며진 정원까지 주인장의 안목이 돋보이는 장소다. 이른 아침부터 찾아간 우리를 위해서 손수 만든 다과와 차를 내주신다고 해서 들어가려던 찻집 입구에 이 장소의 역사적 사실을 쇠판에 새겨 넣은 안내판이 눈에 확 띈다. ‘나주 영산포 농지를 수탈한 동양척식회사 영산포지점의 문서를 보관했던 곳’으로 시작되는 이 알림판에는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는지 사실적인 역사가 간략하게 기록되어있다.

나주 홍어거리에 있는 적산가옥들
영산나루 펜션 모습
영산나루 펜션에 세워진 문서고

일상에서 벗어나 며칠 색다른 곳에서 쉬고, 지방 특유의 음식을 시식하고, 일회용 컵에 쭈루룩 따라주는 커피가 아니라 정성스럽게 달인 차를 외국 여행을 하는 기분으로 마시며 여행기분을 만끽하고 싶은 충동이 멈칙할 만큼 그래서 이 장소가 더욱 가치 있고 의미 있어 보이는 이 안내판이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히고 겸손한 마음을 갖게 만들었다. 

만약 삼례문화예술촌이 일본에 의한 양곡수탈 중심지역이였던 군산, 익산, 김제의 광활한 토지로부터 양곡수탈의 중심창고로 이용된 삼례양곡창고였으며, 이 창고에 쌓인 쌀가마니의 양이 얼만큼이였는지, 어디로 왜 나갔는지를 각각의 창고가 내부단장을 할 때에 각 창고의 이름판과 함께 역사적인 설명을 돌판에 박아놓았더라면 미술관, 디지털 아트관, 소극장, 책공방, 목공소와 문화카페라는 현대적인 문화시설이 우리의 치욕적인 역사를 딛고 훌륭하게 재탄생되었다는 자부심을 방문자들에게 심어줄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3.1절이니 8.15광복절이니 국가적인 행사에서만 역사를 기억하자는 목소리를 높일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 짧은 여행이나 잠시 생활에서 벗어난 시간 속에서 자신이 찾은 곳의 역사를 배워나가는 것이 역사를 잊지 않고 세계화로 가는 기본이 되지 않을까싶다. 

 

 

차보람 기자  carboram@hanmail.net

<저작권자 © 한韓문화타임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차보람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