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극기를 처음 제작하고 처음 사용한 사람은 누구인가?
82년 8월 9일 수신사 박영효 등 일행이 인천에서 일본 배를 타고 도일할 때 당장 게양해야 할 국기가 있어야겠다고 생각한 나머지, 그전에 이미 조정에서 대체적으로 정해진 국기 도안내용을 약간 고쳐 태극사괘의 도안이 그려진 기를 만들었다. 이들 일행은 8월 14일 고베(神戶)에 도착하여 숙소건물 지붕 위에 이 기를 게양했는데, 이것이 태극기의 효시다. - [네이버 지식백과] 태극기 [太極旗] (한국근현대사사전, 2005. 9. 10., 가람기획) -
1882년 수신사로 일본에 가던 박영효, 김옥균, 서광범 등이 태극사괘를 국기로 삼기로 의견을 모았다. 이들 일행은 일본 고베의 숙소 건물에 도안한 기를 게양했는데, 이것이 태극기의 효시다. - [다음 백과] -
2017년 현재 한국 사람이 가장 많이 보는 네이버와 다음 포탈의 태극기의 효시는 박영효라고 나온다. 1882년 8월 박영효과 일본에 수신사로 갔고 이때 국가 공식 업무시에 태극기를 최초로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왔다. 그런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그보다 더 일찍 태극기를 사용한 기록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처음 국기 제정 논의가 거론된 것은 1876년 1월이다. 일본군함 운양호사건으로 인한 강화도조약 진행 중 일본 측은 “운양호에는 엄연히 일본 국기가 걸렸었는데 왜 포격을 가했느냐”고 트집을 잡았다. 이것이 계기가 돼 조정에서는 국기 제작의 필요성이 거론되기 시작되었다.
1880년 8월에 수신사(修信使)로 일본에 갔던 김홍집(金弘集)이 청 참사관 황쥰셴(黃遵憲)에게서 받은 조선책략에서 중국 청나라의 깃발인 중국용기(龍旗)를 군기와 국기로 사용하도록 권유받았다. 용기(龍旗)는 청나라의 속국임을 뜻한다. 자존심 강한 고종은 이를 묵살하고 조선을 상징하는 별도의 국기를 원했다. 국기를 제정하는 과정에서 고종의 확고한 의지가 없다면 진행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조선이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자 미국도 조선과 수교를 서둘렀다. 미국은 청나라에 조선과 수교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을 요청했다. 일본 세력이 커지는 것을 경계하던 청은 조선에게 미국과 수교할 것을 권했다.
1882년 조미수호조약 당시 김홍집과 청나라 사신 마건충과의 필담기록인 청회문답(清回問答),동행초록(東行初錄) 등에 따르면 마건충은 우리측에 태극도형을 국기의 한 모형으로 제시한 것으로 알려진다. 또 조선 8도를 뜻한다는 점에서 8괘를 넣는게 어떻겠느냐는 마건충의 개인견해도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1882년 5월 14일 조미(朝美) 수호통상조약 미국 전권대사 슈펠트(Schufeldt) 제독은 조선 대표 신헌(申櫶)과 김홍집(金弘集)에게 조인식에 사용할 국기의 필요성을 얘기한다. 고종의 명을 받은 김홍집은 역관 이응준(李應俊·1832~?)에게 국기를 만들라 지시한다. 이응준은 1882년 5월 14일에서 22일 사이 미국 함정 선상에서 국기를 만들었고, 이 국기는 5월 22일 제물포에서 열린 조인식에서 미국 국기와 나란히 게양된다.
정리하면, 고종의 명을 받은 김홍집이 “국기를 만들라” 고 지시하여 역관 이응준(李應俊·1832~?)이 태극기를 제작했다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박영효가 당시 태극기를 다시 제작했다고 하더라도 역관 이응준이 태극기를 제작하여 1882년 5월 22일 조미 수호통상조약 조인식에 게양되었던 시기보다 4개월이나 지난후의 일이다. 결국 박영효는 태극기를 공식적으로 최초 사용하지도 최초로 만들지도 않았다.
이후 조선왕조실록 고종실록 1883년(기유년) 1월 27일(고종 20년) 기록에 의하면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에서 아뢰기를 '국기(國旗)를 이미 제정했으니 팔도와 사도(四都)에 행회(行會)하여 다 알고 사용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윤허했다"라고 나온다. 최종적으로 고종황제에 의해서 공식적인 국기가 제정되었고 1883년 3월 6일 고종의 명으로 이 ‘태극·4괘 도안’의 ‘태극기’를 국기로 제정·공포하게 된다.
다만, 태극도형과 사괘가 있는 태극기를 누가 만들었는가 하는 부분에서는 그것이 고종인지,김홍집인지 아니면 역관 이응준인지 명확하게 말하기 어렵다. 제작과정에 대한 좀더 구체적인 기록은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단지 국기 제작의 필요성으로 인해 여러번의 논의를 거쳐서 최종적으로 고종 임금의 윤허를 받아 세상에 태극기를 공포하게 된 것이다. 박영효가 최초는 아니다.
태극기는 우리나라의 국기이므로 또 다른 사실이 드러났을 때는 바로바로 반영해야 한다. 더군다나 평창올림픽과 같은 세계적인 행사를 앞두고 태극기의 유래는 반드시 정정되어서 알려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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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응준 태극기'로 알려진 1882년 5월 조미수호조약 체결 당시 사용된 태극기 도안. 2004년 미국 해군부 해상국 자료에 나옴. |
박지환 기자 youcontent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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