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단군릉 발굴
1993년 평양 강동현에 있는 대박산의 동남쪽 경사면 기슭에 단군릉이 발굴되었다. 여기에서는 왕과 왕후로 보이는 유골이 발견되었으며, 북한은 단군릉을 거대하게 개건하여 성역화하였다. 과연 단군릉은 실제 있는 것인가? 아니면 북한의 조작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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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동 단군릉에 대해서는 다양한 문헌의 뒷받침이 있다.
1530년에 완성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강동에는 두 자리의 큰 무덤이 있는데 그 하나는 현의 서쪽 3리에 있으며 둘레 410자나 되는 큰 무덤이 있는데 이를 단군묘라고 한다”고 기록되어있다.
'조선왕조실록'의 '숙종실록' 1697년 7월 14일에는 강동 단군묘에 대한 이인엽의 청을 윤허했다는 기록이 있다. 每歲修治江東檀君墓、平壤 東明王墓, 竝允之。해마다 강동(江東)의 단군묘(檀君墓)와 평양(平壤)의 동명왕묘(東明王墓)를 손질하여 가다듬도록 청하자, 모두 윤허하였다.
'영조실록'에는 1739년 5월 23일과 1763년 4월 22일 두 차례에 걸쳐 영조가 평양감사에게 단군묘를 잘 보수 관리할 것을 명령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정조실록'에는 1786년 8월 9일에 승지 서형수가 “신이 강동(江東)에 벼슬할 때에 보았는데, 고을 서쪽 3리쯤 되는 곳에 둘레가 4백 10척쯤 되는 무덤이 있었습니다. 옛 노인들이 서로 단군의 묘소라고 전하고 있었으며, 유형원(柳馨遠)의 《여지지(輿地志)》에 기록되어 있으니, 그것이 참인지 거짓인지를 막론하고 어떻게 황폐해지도록 놔두고 사람들이 마음대로 땔나무를 하거나 소와 말을 먹이도록 놔둘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자 정조가 평양감사에게 단군의 묘지기를 정하고 매년 봄과 가을에 묘를 둘러보는 것을 제도화하라는 지시를 내렸다는 기록이 있다.
고종실록에는 1900년 의관(議官) 백호섭(白虎燮)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평양(平壤)은 바로 단군(檀君), 기자(箕子), 동명왕(東明王) 세 성인이 수도를 세운 곳입니다. 단군은 맨 먼저 나타나 태고 시대에 나라를 여셨는데 그가 나라를 세운 것은 당요(唐堯)와 때를 같이 하였고, 나라를 보전한 것은 천 년이나 오래되었습니다. 지금 그의 능(陵)이 강동군(江東郡) 읍치(邑治)에서 서쪽으로 5리(里) 떨어진 태백산(太白山) 아래에 있습니다. 이것은 이 고을의 읍지(邑志)와 《관서문헌록(關西文獻錄)》에 명백히 실려 있습니다. 그리고 고(故) 상신(相臣) 허목(許穆)이 지은 《단군세가(檀君世家)》에 이르기를, ‘송양(松壤) 서쪽에 단군총(檀君塚)이 있는데 송양은 곧 오늘의 강동현(江東縣)이다.’라고 하였으니, 확실한 증거가 참으로 명백한 것입니다. 이 고을의 산림을 봉식(封植)하자는 내용으로 여러 번 부군(府郡)에 청한 것이 문서와 편지에 가득 쌓여 있으니 이것은 누가 시켜서 그렇게 하였겠습니까?
순종실록에 보면 1909년
(순종께서) 조령(詔令)을 내리기를,,"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나온 성인인데 사당의 모습이 고요하다. 숭령전(崇靈殿)에 평안남도 관찰사(平安南道觀察使)를 보내어 치제(致祭)하도록 하라. 듣건대 묘소(衣履之藏)가 강동(江東)땅에 있으며 지금 그것을 가리켜 단군릉(檀君陵)이라고 하는데, (聞衣履之藏, 在江東地, 至今指點謂檀君陵) 잡초가 우거진 채로 거두지 않고 있다고 하니 높이 받드는 예차가 전혀 없다. 이제부터 관리하고 수호하는 절차를 마련하여 거행하도록 하라.“
의리지장(衣履之藏)은 하나의 장례와 묘제의 형태이긴 하지만 실제로 묘안에 시신(屍身)을 묻지 않은 장례를 말한다. 시신없이 치우는 장례를 말함.
1930년대 평안남도 강동 대박산 단군유적보존운동
1932년 5월 평안남도 강동 대박산의 단군릉의 수축사업이 알려지면서 단군유적보존운동이 대대적으로 전개되었다. 단군 묘로 알려진 이 능이 일제하에 들어 황폐해지자 이를 증수하고 수호각을 세우기 위해 평안도 강동 지방 유지들이 ‘단군릉수축기성회’를 발기하였다.
이 운동은 동아일보의 언론에서 주목하면서 전국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킨 운동으로 전환되었다.한편 단군릉 수축을 위해 1934년 봄까지 성금은 총 3600여 원이 들어왔으나 재원에 턱없이 부족했다. 결국 수호각은 건립하지 못하고 1935년 10월 단군릉제를 끝으로 단군릉수축기성회의 활동은 마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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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동 단군릉은 초대 단군왕검이 아닌 후대 단군
『환단고기』 단군세기에는 “ 七月 帝南巡 歷風流江 到松壤 得疾尋崩 葬于大博山 BC 2092년 7월 구을단군이 남쪽으로 순수하여 풍류강을 건너 송양松壤에 이르러 병을 얻어 곧 붕어하시니 대박산大博山에 묻히셨다.”라고 기록되어있고
『단기고사』엔 풍류강을 비류강이라 하였는데 송양도 강동江東이라 하여 그곳에 묻혔다고 하였다. 『신단실기』도 『강동릉변』에서 송양을 강동현이라 했으며 제1세 단군왕검의 릉이 아니라 후대 단군의 릉이라 하였다. 지명과 기록이 세 사서가 모두 일치하고 있다. 그중에서 단군세기에서는 『신단실기』에서는 초대 단군왕검의 흥이 아닌 후대단군이라고 하였고 환단고기에서는 정확하게 5대 구을단군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북한의 단군릉 어떻게 볼 것인가
1993년 평양 강동현에 있는 대박산의 동남쪽 경사면 기슭에 단군릉이 발굴되었고 왕과 왕후로 보이는 유골이 발견되었다. 북한은 평양 ‘단군릉’에서 출토된 사람 뼈에 대해 ‘전자 상자성 공명법’이라는 방식을 적용해 서기전 3000년께 조성된 단군의 무덤이 확실하다고 발표했다
물론 5천년전 단군무덤이라는 자체는 말이 안된다. 잘못된 측정일 수 있다. 초대 단군왕검의 연대로 보아도 그보다 수백년이 앞선 연대측정이다. 게다가 환단고기 기록으로 보아 발굴된 단군무덤이 초대 단군이 아니라 5대 단군이라고 한다면 북한의 측정치는 1천년이나 앞선 연대가 된다. 북한이 측정치를 높였다거나 어떤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단군릉을 조성하였는지는 북한과 남한의 학계가 재조사해야할 바다. 그러나 <강동 단군릉 또는 강동 단군묘>에 관한 내용은 조선왕조실록을 보나 여러 다른 문헌을 보나 실제로 단군릉이 존재했던 것은 확실한 만큼 이 조차 부정해서는 안된다.
지금 강단사학계는 이를 완전히 부정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여러 임금들이 강동 단군릉에 대한 제사와 예우에 신경쓰고 여러 조치를 취하는 내용들이 확실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이토록 단군릉에 무관심하고 의도적으로 회피하는 것인가? 단군신화로 남아야 하는데 어찌되었던 실체가 있다면 곤란한 것인가? 자신들의 편협한 이론 때문에 국민들이 뿌리와 조상을 잊어버려야 한단 말인가? 북한의 조작과 과대포장도 문제이지만 지금 학계의 무관심과 무시작전은 더 큰 직무유기일 뿐이다.
박찬화 기자 multikorea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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