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탁은 한국인의 민족의지를 세계만방에 알리고 외세의 침략을 국민에게 알리는 일이 시급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대한매일신보]입니다. 대한매일신보는 우리 독립운동사의 중요한 페이지를 장식한 신문이므로 꼭 기억해두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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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매일신보 영국인 베델 사장 |
당시 대한매일신보는 영국인 베델이 사장이었기 때문에 일본의 감시망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울 수 있었습니다. 독립운동, 특히 의병 활동을 상세히 소개하여 높이 평가하고 항일의식 고취에 앞장서는 등 민족의 신문이라고 불릴 정도였습니다. 이때는 신문지법에 의해 일체의 기사를 검열했기 때문에 대한매일신보는 단비 같은 존재였음을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소식을 경사 났다고 알린 것은 큰 화제가 되었습니다.
1907년 1월 대구에서 시작한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적으로 확대되자 대한매일신보에서는 신문사 안에 국채보상지원금총합소를 개설하여 돈을 모금하기 시작했습니다. 일본은 당시 총무직을 맡고 있던 양기탁에게 터무니없는 혐의(국채보상금 횡령)를 씌워 구속했습니다. 사장인 베델이 억지 혐의임을 증명하여 결국 무죄로 풀려났지만 두 달 동안 모진 고문을 당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양기탁의 강한 정신력과 독립에 대한 의지는 모진 고문으로도 꺾이지 않았습니다. 감옥에서 나온 직후 독립운동가 안창호와 함께 비밀결사인 신민회를 창립합니다.
신민회는 구한 말, 최대 규모의 비밀결사 단체였습니다. 1907년에 국내에서 결성되었고 1911년에 해산되었는데 독립운동가 안창호, 양기탁, 이승훈 선생을 중심으로 우리에게 매우 잘 알려진 이회영, 신채호 등의 독립운동가들이 함께 활동하였습니다. 국내와 국외의 정세가 다르다보니 국내에서는 실력 양성 운동에, 국외에서는 독립 운동 기지 건설에 힘썼습니다. 따라서 국내에서는 이승훈 안창호 선생이 각각 설립한 오산학교와 대성학교가 있으며, 신민회 기관지로 대한매일신보를 지정 조선을 도운 영국인 항일운동가 베델을 사장으로 활동했습니다. 국외에서는 만주 삼원보 지역에 신흥강습소를 건설합니다. 신흥강습소가 신흥무관학교가 되며 신흥무관학교는 1951년 故조영식 박사가 인수하며 1960년 경희대학교로 개칭됩니다.
양기탁은 당시 독립운동가 및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긴밀한 유대관계를 맺고 있었고 국민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습니다. 이에 따라 양기탁은 신민회 총감독을 맡고, 안창호가 집행을 담당하게 됩니다.
신민회 본부는 대한매일신문사 안에 두고 지방지국을 연락망으로 구성했으며(영국인 항일운동가 베델의 역할이 컸습니다.) 조직을 도,군,반 단위까지 세포 조직화하여 누가 회원인지 알 수 없게 했습니다. 창건 위원들은 신민회 창립 후 즉각 자신의 영향력 안에 있는 인사들을 가입시켜, 1910년경에는 회원이 약 800명으로 늘었습니다. 이는 당시 영향력 있는 애국 계몽 운동가들을 거의 전부 망라한 것으로 신민회의 규모와 창건 멤버들의 역량을 짐작하게 합니다.
190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 일본의 의병 탄압이 극심해서 의병활동이 위축되었습니다. 이때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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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매일신보 |
민회는 해외에 독립군 기지를 건설하고 독립군대를 만들기 위해 양기탁의 집에서 모임을 가졌습니다. 이들은 국외에 독립군 기지를 건설하여 무관학교를 설립하고 기회를 보아 국내진입 작전을 펴서 국권을 회복하자는 결론을 내립니다. 이렇게 해서 설립된 학교가 신흥무관학교입니다. 이제는 우리에게 친숙한 의열단! 그리고 영화 <암살>에 나오는 ‘속사포’가 신흥무관학교 출신입니다.
뒤이어 일본은 데라우치 마사타케 총독 암살 모의 사건(일명 105인 사건)을 꾸며내어 전국에 있는 신민회 회원(독립운동가 지도층) 800명을 체포합니다. 이중 105인이 투옥되었기 때문에 105인 사건이라고 불립니다. 양기탁도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고 징역 10년을 선고받습니다. 그리고 이송 중 탈출에 성공하여 만주로 건너가게 됩니다. 양기탁은 신흥무관학교와 광복회에서 활동하는 데 헌신합니다. 하지만 일본 경찰에게 붙잡혀 2년 동안 수감되었고 옥중에서 3.1운동을 맞이하게 됩니다.
1920년에 석방된 양기탁은 서울에 들어와서 동아일보 고문이 됩니다. 그해 미국 의원들이 아시아 3국 순방의 일환으로 우리나라를 방문했을 때 그는 서울역에서 독립만세를 부르다 체포되어 또다시 투옥됩니다. 양기탁의 어머니는 이 소식을 듣고 숨을 거두게 됩니다. 그는 이를 계기로 잠시 방면된 틈을 타서 다시 한 번 탈출에 성공하여 만주로 갑니다. 양기탁의 일생은 이런 사건들의 반복으로 점철됩니다. 돌아가시기 전까지 그의 머릿속에는 오직 조국만이 있었습니다. 탈출, 투옥, 탈출, 투옥, 그리고 다시 탈출, 투옥. 왜 그는 이토록 조국을 위해 헌신했을까요? 젊은이들에게 무엇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일까요? 어쩌면 오늘날 우리가 당연히 여기는 ‘권리’와 ‘의무’때문이 아니었을까요?
대한민국 헌법 제1조 2항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옵니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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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공간' 출판의 '한국의 독립운동가들' 035 양기탁 (표지 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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