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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규의 「잊혀진 영웅들」 '이윤재' 편조선어사전 편찬에 인생을 걸었던 국어학자

조선 사람에게 조선말 사전이 한 권도 없구나!

 

이윤재 선생


우리는 독립운동가를 무력투쟁가, 교육투쟁가 등으로 나눕니다.
교육투쟁가는 학교를 설립하거나 교편을 잡고 젊은이들에게 민족정신을 가르치는 애국지사를 가리킵니다. 이중에서도 우리의 역사와 한글을 중요시하여 이 분야에서 이름을 남긴 분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분이 주시경, 이윤재, 한징입니다. 이윤재는 우리의 말과 글, 그리고 역사를 중요시한 숨은 독립운동가입니다.

1904년 2월 일제는 러일전쟁을 일으켰고, 1905년에는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우리의 외교권을 빼앗았습니다. 이러한 시기에 이윤재는 민족의 실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외세에 대항하지 못하고 이런 일이 벌어졌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리하여 민족교육운동에 전념하기 시작합니다.

이윤재는 1908년부터 김해 지역에서 교사로 재직하며 교육 계몽운동에 참여했습니다. 이와 동시에 대구에서 고등교육을 받으며 우리의 역사와 우리말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고, 이 분야의 권위자인 주시경을 찾아가 그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약 5년 동안 주시경 밑에서 연구를 하다가 마산 창신학교에서 교편을 잡게 됩니다. 창신학교는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학교였습니다. 의열단장 김원봉의 고모부이자 의열단 창립멤버인 경남 밀양출신 황상규가 민족 교육을 위해 설립한 사립학교였습니다.

김원봉과 조선어학회 회장을 역임한 이극로는 이 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이윤재는 조선어를 가르쳤으며 일제의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우리 역사를 교육하여 청년들에게 민족 정체성과 독립정신의 불꽃을 일으켰습니다.

1919년 3.1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이윤재는 즉시 운동에 참여했으며 평안도 영변 지역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했습니다. 이 일로 인해 현장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갖은 고문을 받았습니다. 1년 6개월간의 옥살이를 마치고 출옥한 후 중국으로 망명했고, 그곳에서 우리 역사를 연구하던 민족주의 역사학자 신채호를 만나게 됩니다.

이윤재는 신채호를 만난 뒤 베이징대학 사학과에 입학하여 3년 동안 근대사를 배웠습니다. 이때부터 민족의 주체는 민중이며, 민중이 직접 혁명에 뛰어들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많은 글을 게재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기관지 『동광』에 [쾌걸 안용복]을 발표한 것이 유명합니다.
안용복은 조선 숙종 때 일본 어민들을 물리치고 울릉도와 독도를 사수한 사람입니다. 안용복의 활약상을 소개한 이 글을 통해 그가 청년들에게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지 가늠해볼 수 있습니다.

분실되었던 큰사전 원고

1927년 이윤재는 우리말로 된 사전이 한 권도 없다는 것을 깨닫고 이를 부끄럽고 안타깝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조선어연구회에 가입하여 사전 편찬 작업을 시작합니다. 조선어학회의 전신인 조선어연구회에 대해 조금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1910년 일제의 식민 지배가 시작되자 우리말과 우리 역사에 대한 연구와 보급이 완전히 중단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큰 역할을 한 사람이 주시경입니다. 주시경의 제자들은 스승의 의지를 이어받아 1921년에 조선어연구회를 조직했고, 그 의지가 이윤재에게 이어지게 된 것입니다.

조선어연구회의 표면적인 목적은 '우리말의 정확한 법리를 연구함'이었지만, 실제로는 우리말과 글을 보급하여 민족의 독립을 추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조선어연구회에 가입한 이극로, 이윤재 등의 활약으로 조선어학회는 전성기를 맞게 됩니다.

"말은 민족의 단위를 결정하는 가장 큰 요소이고, 말의 단위가 곧 민족의 단위이므로 조선말이 곧 조선 겨레다."

조선어학회 회원들

1929년 10월 이러한 교육 신념을 가진 각계의 저명인사 108명이 모여 조선어사전 편찬위원회를 조직했습니다. 이곳에서 이윤재는 『동아일보』에 [세종과 훈민정음]이라는 글을 기고하고, 『별건곤』에 [세종성대의 문화]를 발표했습니다. 1928년에는 직접 『한빛』이라는 잡지를 창간했습니다.

1933년 10월 드디어 우리말로 된 사전이 완성됩니다. 이윤재를 비롯한 18명의 집필위원들이 심혈을 기울여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만들어 발표했습니다. 하지만 이 작업에 참여한 교육 지도자들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고, 이윤재 또한 서대문형무소에 갇혀 모진 고문을 당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윤재는 출옥 후 다시 사전 편찬에 매진하여 1940년 한글 맞춤법 통일안과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을 발표합니다.

1941년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일본에게 필요한 것은 군인의 수였습니다. 일본을 위해 전쟁에 희생양이 되고 싶지 않았던 조선인들에게 일본이 내세운 것은 '내선일체론' 이었는데, 이것은 ‘한국인과 일본인은 본래 하나다‘라는 논리였습니다. 이를 위하여 한국어를 완전히 금지시키고 창씨개명을 시도합니다.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고 조선어학회에 속해있던 한글학자들은 어학 독립운동을 지속하였고 한글 사용 금지라는 정책을 어겼다는 이유로 조선어학회와 관련된 인물들이 체포되는 '조선어학회 사건'이 발생합니다. 조선어학회의 후신이 오늘날 '한글학회'이며 이곳에서는 당시 조선어학회 사건을 '조선어학회 수난'으로 지칭하고 있습니다.


우리말과 글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고, 일본어 사용을 강요하는 시민정책에 정면으로 대치되는 이윤재의 활동은 일제에겐 눈엣가시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일제는 조선어학회 회원들과 사전 편찬 후원자들까지 검거했으며, 사전 편찬 원고와 수십만 장의 한글 자료를 압수하고 조선어학회를 강제 해산했습니다. 이후 1년여 동안 조선어학회 회원들에 대한 고문과 취조가 이어졌는데, 일제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습니다.

"민족운동의 한 가지 형태로서 소위 어문운동은 민족 고유의 어문의 정리, 통일, 보급을 도모하는 하나의 민족운동인 동시에 가장 심모원려를 포함한 민족 독립운동의 점진형태다."

이에 따라 조선어학회 사건 관련자들에게는 치안유지법 제 1조 내란죄가 적용되었습니다. 일제는 그들에게 '육전', '해전', '공중전'이라고 불리는 잔혹한 고문과 악형을 가했습니다. 특히 이윤재는 더 끔찍한 고문을 당했다고 합니다. 과거 3.1만세시위운동에 참여했고, 민족주의 사학자 출신인 데다 우리말 사전 편찬에 누구보다 열정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윤재는 잔혹한 고문을 받다가 1943년 12월 8일 새벽, 차가운 시멘트 독방에서 55세의 나이로 순국하셨습니다.

수감 도중 옥사한 한글학자는 이윤재, 한징 두 명이며 나머지 한글학자들은 1945년 해방이 되며 모두 석방되었습니다. 아래는 끝까지 조선의 말과 글을 알리고 사전을 편찬하여 오늘날 우리가 우리의 말을 잊지 않고 사용하는데 목숨을 바쳤던 한글학자들입니다.

이극로, 최현배, 이희승, 이병기, 이윤재, 정인승, 정태진, 김도연, 김양수, 이인, 김법린,
장지영, 이중화, 이우식, 정열모, 한징, 김윤경, 권승욱, 이야자, 이병린, 이강래, 김선기,
이고루, 정백수, 윤병호, 서승효, 장현식, 신윤국, 김종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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