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키시마호는 어떻게 침몰했나…‘조선인섬멸작전’
1. 일본은 끝까지 악마를 택했다
2. 우키시마호는 어떻게 침몰했나
3. 나는 우키시마호를 알고 있다
4. 한·일 정부는 해원(解寃)에 나서라
5. 오늘 우리는 역사에 탄원한다
광복 직후 “귀국시켜줄게” 조선인 수천명 태워 일본 연안 수장
해방의 감격을 지옥으로 앙갚음…해양사상 최대 참극 연출
9년간 방치하다 인양 때 다시 폭파…원혼까지 ‘부관참시’
일제 강점기 강제징용의 참상을 제대로 보여주리란 기대감 속에 7월 말 개봉했던 영화 ‘군함도’가 657만 관객을 동원했다. 결과는 관객 수에 걸맞지 않은 혹평에 시달렸다. 36년간 벌어진 일제의 잔악한 만행의 실상은 여전히 수면 아래 숨어 있다.
광복의 감격과 함께 일제가 제공하는 제1호 귀국선에 올랐던 수천 명의 한국인들은 왜 72년간의 기나긴 귀향을 아직도 끝내지 못하고 있을까? 우키시마호폭침진상규명회 전재진 회장이 제공한 자료와 그동안 드러난 사실들을 기본으로 사건 개요와 발생 배경을 정리해본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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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섬멸작전
일제는 허울 좋은‘대동아공영권’을 빌미로 일으킨 침략전쟁에 인력과 물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해지자 한국인을 강제로 잡아다가 인력을 보충했다. 남자는 총알받이·군무원·노무자 등으로 부리고, 여자는 노무자·성노예로 마음껏 ‘써먹었다’. 그들에게 한국인은 싸워주고 대신 죽어주고 일해주고 욕정 해결해주는, 한 마디로 총칼만 들이대면 모든 게 해결되는 소모품 같은 존재였다.
그러다 전쟁에서 패하자 그들은 잡아간 한국인에게 마지막으로 천인공노할 선물을 안겨줬다. 가차 없는 폐기처분이었다. 그들은 한국인의 폭동과 기밀 누설이 우려된다는 등의 이유로 이른바 ‘조선인섬멸작전’이라는 광란의 학살을 자행했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상상조차 어려운 지옥도를 연출한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의 주역인 독일은 유태인 600만명을 학살했다고 전해진다. 독일은 아우슈비츠로 상징되는 강제수용소 등에서 대량 학살에 나섰다. 강점기 36년 동안 일제가 학살한 한국인도 결코 이보다 적지 않을 거라는 시각이 우세하다. 한국인에 대한 일제의 학대와 학살방법은 인간이 얼마나 잔악해질 수 있는지 극악무도의 끝을 보여준다. 이에 대해선 3편에서 생존자와 관련자들의 증언과 함께 자세히 다루기로 한다.
◆우키시마호 침몰까지
우키시마호 사건이 일어나게 된 시대적 배경은 뭘까? 1937년 중일전쟁을 도발한 일제는 인력과 물자 부족이 심각해졌다. 이에 그들은 1938년 '국가 총동원법'을 통해 한국에 대한 인적·물적자원 강제 수탈을 본격화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모집’이라는 가면을 쓰고 한국인들을 강제로 군인, 군무원, 강제노역(군수공장·탄광·조선소·군사기지·기반시설·토목공사 등) 등에 동원했다. 1939년엔 ‘국민징용령’을 공포해 한국 청·장년을 강제 연행, 노동력 수탈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1945년까지 150만여명을 해외 강제징용에 끌어가고, 600만여명을 한반도 강제징용에 투입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들은 징용영장에 의한 징용이 부진하자 트럭을 몰고 농촌지역을 돌다가 일하는 농부들을 강제로 실어다가 징용에 보내는 등의 만행을 예사로 저질렀다. 1941년엔 태평양전쟁을 도발했고, 1943년엔 ‘학도지원병제도’를 통해 전문·대학생 4천500여명을 강제 징집했다. 광복 전해인 1944년엔 ‘징병제도’로 패전 때까지 20만여명의 한국청년들을 강제동원해 총알받이로 군대에 보냈다.
또 그해엔 ‘여자정신대근무령(女子挺身隊勤務令)’으로 12~40세 처녀 수십만명을 강제 징집해 군수공장에 사역시키고 중국·남양지방 전선에 성노예로 보내 유린했다.
미국은 1945년 8월 6일 日 히로시마에, 이어 9일엔 나가사키에 원자탄을 투하했다. 9일 日에 선전포고를 한 소련 극동군이 사할린·홋카이도·일본본토를 향해 남하를 시작하고 일본군은 밀리기 시작했다. 8월 15일 침략전쟁의 괴수인 히로히토 日왕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日 군·경은 본토로 퇴각하며 곳곳에서 닥치는 대로 한국인 대학살을 자행했다.
명분은 한국인들이 폭동을 일으킬 우려가 있고 소련군의 스파이로 활약한다는 것. 실제로는 핵심 군사시설 등에 동원했던 한국인들의 기밀 누설과 차후 전범재판에서의 증언 등을 막기 위한 ‘증거인멸’이 주된 이유임은 쉽게 알 수 있다.
그들은 패전과 동시에 강제연행한 한국인 징용자·징병자·군인·군속 등의 명단과 관련문서들을 조직적으로 소각 폐기해 문서상의 증거를 없애고, 입막음을 통한 완전범죄를 위해 인명 대학살에 나선 것이다.
8월 19일 우키시마호(浮島丸)를 이용한 한국인 송환을 지시하는 지령이 떨어지자 일본은 즉시 대대적인 한국인 승선을 진행한다. 3일 만인 21일 한국인 8천~1만2천명(日해군 255명 포함)을 승선시키고, 22일 오후 10시에 아오모리현 오미나토(大湊)항에서 출항했다. 24일 교토(京都) 마이즈루(舞鶴)만에서 우키시마호는 의문의 폭발로 침몰했다. 주로 한국인인 승선자 대부분은 배와 함께 수장됐고, 생존자는 1천여명뿐이었다. 폭발 직전 배를 빠져나간 日해군은 25명 외엔 모두 생존했다(배에 남겨진 정확히 10%의 인원은 폭발임무 완성과 확인사살을 위한 희생양이란 걸 유추할 수 있다).
◆침몰 이후
사고 당시 미리 빠져나간 日해군은 수천 명이 살려달라고 절규하는데도 구경만 하고 있었고, 일부 인근 어부들만 소극적인 구조에 나선 것으로 증언되고 있다. 지옥에서 살아난 생존자들은 공포 속에 인근 군부대에 격리 수용된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의문의 폭발사고가 일어나 수십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살려 보내지 않으리라…’ 소름끼치는 악귀 같은 집착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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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3년 10월 우키시마호 인양 당시 건져 올린 유해. 9년 동안 해저에 유기되어 두개골과 굵은 뼈만 남았다. 이 때 사망자 수를 계산할 때 두개골과 골반뼈 하나에는 1명으로, 대퇴골이 3개일 때는 2명으로 계산했다.(마이즈루우키시마호사건진상구명회 회장 리병만 제공) |
9월 1일 일본은 선체 인양이나 정확한 현장검증 등도 없이 침몰사건 조사 결과를 서둘러 발표했다. 침몰원인은 ‘촉뢰(미군 기뢰에 접촉)에 의한 폭파’이며 탑승자는 조선인 3천725명과 日해군 255명, 사망자는 조선인 524명과 日해군 25명 등 549명, 실종자와 생존자 수는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침몰선은 일본정부의 철저한 외면 속에 그대로 방치되다가 1954년 日 이노사루베지社에 의해 ‘고철을 재활용하기 위해’ 선체 인양이 이뤄진다. 이때 조일우호협회가 “유해를 보존해달라”고 요청했으나 이들은 배를 다이나마이트로 폭파한 후 인양했다. 차가운 바닷속에서 햇빛을 볼 날만을 기다리던 원혼들은 ‘부관참시’보다 더한 ‘폭탄세례’를 받았다. 이로 인해 유해는 또 다시 대량 멸실될 수밖에 없었다. 9년 전 日 정부가 사망자 524명이라고 발표했으니, 이를 감안한 사망자 축소 내지 은폐 의도가 다분한 처사임이 능히 짐작된다.
2015년 8월 부산에서 열린 ‘우키시마호사건 진상규명 국제세미나’에선 우키시마호 폭침설을 입증할 자료인 日방위청 문서 ‘발신전보철(發信電報綴)’이 공개됐다. 김문길(72) 우키시마호폭침 한국인희생자추모협회 고문이 제시한 이 자료는 1945년 8월 22일 19시 20분 日 해군 운수본부장이 우키시마호 선장에게 내린 ‘항해금지 및 폭발물처리’ 지시문(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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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키시마호 출항과 관련된 지시 공문 ( ‘항해금지 및 폭발물처리’ 지시문 ) |
내용은 △1945년 8월 24일 18시 이후, 지금 출항중인 경우 이외는 항행 금지하라 △각 폭발물의 처리는 항행 중인 경우 무해한 해상에 투기하라 △항행하지 않은 경우 육지 안전한 곳에 넣어두라(격납) 등이다. 세미나에선 이 문서와 그동안 축적한 각종 증언·자료들을 근거로 우키시마호 침몰원인을 ‘폭발물 장치에 의한 자폭’으로 결론 내렸다.
◆뻔뻔한 일본, 침묵하는 한국정부
1975년 태평양전쟁유족회가 발족했고, 이를 중심으로 일본과 국내의 우키시마호 희생자 유가족과 시민단체 등은 생존자 증언과 관련 자료 등을 근거로 日정부에 진상 재조사와 관련자료 공개 등을 계속 요구해왔다.
당시 배를 탔던 21명과 희생자 유족 59명 등은 1992년부터 3차례 日정부를 상대로 공식사죄와 손해배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2001년 8월 日교토지법은 “원고 중 15명에 대해 각각 300만엔씩 모두 4천500만엔의 위로금을 지불하라”는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다. 공식사죄 청구부분은 기각했다. 그러나 2003년 5월 항소심인 일본 오사카고등재판소는 원고패소 판결을 내려 희생자와 생존자, 유족들을 좌절시켰다.
침묵하던 한국 정부는 2005년에야 진상규명에 나서 2010년 말 ‘진상조사 보고서’를 발간했다. 하지만 사건의 핵심인 폭발 원인이나 사망자 수 등에 대한 결론을 도출하지 못하고 일본정부 탓만 해 ‘하나마나한 조사’라는 비난을 받았다.
◆침묵과 외면의 뿌리에는 무엇이 있나
日정부가 일제 피해 생존자와 유족들의 진상규명과 사죄, 배상 요구에 대처하는 기조는 지금까지 일관돼왔다. 발뺌 또는 무시하거나 대응하지 않고, 사실을 부정하거나 미화·왜곡하고, 어쩔 수 없이 인정해야 할 경우엔 가해규모를 최대한 축소하고, 그마저도 어려울 경우엔 1965년 한일협정으로 배상이 완료됐다며 책임론을 일축한다. 더 나아가 그들은 일제 강점기가 한국의 근대화에 큰 계기가 됐다며 ‘시혜론’마저 주장하는 뻔뻔함도 서슴지 않는다.
日정부는 그렇다 치더라도 한국정부의 대응은 왜 이토록 미온적일까?
원죄는 군사정변에 성공한 박정희 정권이 1965년 거국적 반대를 무시하고 日정부와 조인한 한일협정에 있다. 박 정권은 ‘앞으로 식민지배와 관련해 더 이상 배상을 요구하지 않겠다.’는 약속과 함께 일본으로부터 6억 달러를 받아왔다. 그마저도 반은 빚(무상 3억 달러, 차관 3억 달러)이다. 경제개발에 필요한 자금을 끌어들이는 데는 성공했을지 몰라도 역사는 이 협정에 대해 ‘36년 식민지배로 받은 민족적 고통을 외면한 굴욕적 흥정’으로 평가를 내리고 있다.
하지만 이 협정은 1945년 8월 15일까지의 범죄행위에만 해당한다. 우키시마호 사건은 8월 15일 이후 저질러진 범죄이므로 한일협정과는 관련이 없다. 그런데도 한국정부가 진상규명과 사죄, 배상 요구에 대해 미적대고 있는 이유가 뭘까?
민족성에 대한 자학적 반성이나 여러 이유를 들지만, 광복 후 제대로 청산되지 않고 정계, 재계, 학계 등 사회 곳곳의 정점에 자리잡은 친일파들의 뿌리를 지적하는 목소리가 많다.
우리는 일제 36년의 혹독한 식민지배를 겪고도 ‘친일하면 3대가 흥하고, 독립운동하면 3대가 망한다’는 속설이 낯설지 않은 괴이한 나라에 살고 있다. 불의한 역사에 대한 상징적 자조적인 표현이겠지만 불행하게도 현실은 이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사회지도층으로 변신해 ‘잘 먹고 잘사는’ 친일세력들은 일제의 죄상을 들추는 게 달갑지 않다. 자기들의 아킬레스건과 추행이 드러날 우려가 높아지기 때문이다. 그들은 일제의 만행을 들추고 불의한 역사를 바로잡으려는 이들을 그들의 권력과 사회적 권위, 언론 등 인맥 카르텔을 이용해 교묘하게 매도하고 희화화시켜 왕따로 만든다.
◆우리는 잊지 않는다
1995년 일본 도쿄에서는 《아시안 블루-우키시마호 사건》이라는 영화가 제작돼 양심 있는 일본인을 중심으로 일제 징용의 잔학상을 돌아보자는 움직임이 일었다. 1999년 북한에서도 이 사건을 다룬 영화 《살아 있는 령혼들》이 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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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에서 만든 영화 “우키시마호사건-아시안블루”의 한 장면. <시모키타지역문화연구소 제공> |
올 1월 부산에서 우키시마호폭침한국희생자추모협회와 우키시마호폭침진상규명회는 영화제작사 관계자 등과 함께 ‘우키시마호폭침 국민영화전략포럼’을 열고 우키시마호 사건을 영화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2012년 8월 24일엔 우키시마호 희생자추모협회가 부산에서 희생자 위령제(8000위)를 엄수했고, 이후 매년 개최하고 있다. 한일 양국 정부는 이런저런 핑계로 뒷짐을 지고 있지만, 양국 민간인과 사회단체들은 인도(人道)를 저버린 최악의 만행을 잊어선 안 된다며 사필귀정(事必歸正)이 진리임을 입증하기 위해 힘겨운 싸움을 진행하고 있다.
박달 기자 pc2000u@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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