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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성관의 『우리 역사 현장 답사기』 1) 고구려 유민 이정기(李正己)의 자취고구려 유민 이정기는 영웅이었다

허성관 미사협 상임대표의 2016년 중국에 있는 우리역사 현장 답사기를 7회에 걸쳐서  연재합니다

허성관의 중국 우리 역사 현장 답사기(1) 고구려 유민 이정기(李正己)의 자취를 찾아서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가 주관하는 중국에 있는 우리 역사 현장 답사여행에 네 번째 함께했다. 2016년 7월 29일부터 8월 6일까지 11명이 참가했다. 이번 답사는 우리 고대사 관련 산동성 지역, 시원 문화 유적인 홍산문화(紅山文化) 지역, 강단사학자들이 떼쓰며 아니라고 우기는 고조선 서쪽 경계지역이다.

2016년 답사 노선

산동성 청도(靑島)에 내려 청주(靑州)로 가서 고구려 유민 이정기(李正己)의 자취를 찾아보고, 공자의 유적 곡부(曲府)를 둘러본 다음, 붉은 악마의 표상인 동이족의 천자 치우(蚩尤)천황의 무덤을 답사한다. 이어 공자가 성인으로 평가한 탓으로 우리 역사에 황당한 영향을 끼친 기자(箕子) 무덤을 찾은 다음, 북송(北宋) 수도였던 하남성 개봉(開封)을 둘러보고 정주(鄭州)로 이동해서 비행기로 북경에 가서 한국에서 오는 답사 2진과 합류한다.

북경에서 연암 박지원 선생의 열하일기에 열하(熱河)로 나와 있는 지금의 승덕(承德)으로 가서 청나라 황제들의 피서산장을 관람한다. 다음날 홍산문화 유적지인 내몽고 자치구 적봉(赤峰)시로 이동해서 홍산과 조선고성인 삼좌점 산정 유지를 살펴본 후 조양(朝陽)가는 길에 요(遙)나라 중경과 우하량(牛河梁)을 답사하고 하북성 노룡(盧龍)으로 간다. 노룡에서 백이숙제(伯夷叔齊)의 흔적과 우리 고대사에서 낙랑군 조선현 자리인 영평부(永平府) 고성을 둘러보고, 낙랑군 수성현(遂城縣)인 창려(昌黎)로 이동해서 고대사의 표지 지형지물인 갈석산(碣石山)에 오른 후 천진 공항에서 귀국한다.

(7월29일, 금) 청도⟶청주⟶제나라 임치성 유적⟶치박 ①

- 고구려 유민 이정기는 영웅이었다.
인천공항에서 아침 8사 10분에 출발하는 중국 산동성 청도행 비행기를 타야 한다. 5시 40분까지 공항에 집결하라고 한다. 마포에서 이덕일 소장 부부와 함께 4시 55분 첫 버스를 탔다. 지난해 1만원이었던 요금이 어느새 1만 5천으로 올랐다. 40분 걸려 공항에 도착했다. 지각한 일행이 없다. 준비물을 잘 챙기려 신경을 썼는데도 중국 도로망 지도를 빠뜨렸다. 청도까지 비행시간은 1시간 20분이다. 중국은 우리보다 1시간 늦다.

청도공항을 나서자 덥고 습한 공기가 확 몸을 덮친다. 고생 좀 하겠구나. 매년 통역 겸 답사여행을 안내하는 오선생이 북경에서 와 기다리고 있었다. 38인승 버스를 대절했는데 그런대로 쓸 만하다. 이곳 청도에는 사업에 성공한 가까운 친구가 몇 있지만 연락할 겨를이 없다. 산동성 서부 큰 도시 제남(濟南)으로 가는 고속도로를 탔다. 길 양쪽에는 버드나무 숲으로 가로수가 잘 조성되어 있다. 숲의 높이가 규칙적으로 차이가 나는 것으로 보아 베어내고 심기를 반복하면서 잘 관리하고 있는 것 같다.

한 참 지나자 고속도로 양쪽에 비닐하우스가 끝없이 계속된다. 북쪽에 흙으로 담을 쌓고 남쪽으로 비스듬하게 비닐을 설치한 하우스다. 자세히 살펴보니 흙담에 구멍을 내서 통풍이 되도록 했다. 우리나라와 비교해서 특이한 구조다. 이 더운 곳에 왠 비닐하우스냐는 생각이 들었지만 모두 채소를 재배한다고 운전기사가 설명한다. 노지에는 온통 옥수수 밭이다. 더덕을 재배하는 곳도 보인다.

고속도로 표지판에는 서주(徐州), 연주(兗州), 청주(靑州), 복양(僕陽) 등이 나타난다. 한국 사람들이 애독하는 『삼국지』 무대 중 한 곳이다. 특히 조조는 복양에서 여포를 격파하고 산동지방을 장악했다. 유비는 서주에서 어려운 시기를 보냈다. 중간에 휴게소에 들렀더니 초만원이다. 중국식 호떡으로 점심을 때웠다. 내 평생 이렇게 더운 날은 처음이다. 청도에서 대략 250km를 달려 청주박물관에 도착했다.

중국 동북공정이 이 박물관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은 것 같다. 동이족과 선비족의 역할을 잘 써주고 있다. 산동성이 상고시대에 동이족의 활동무대이며, 5호16국 시대 중원을 통일한 선비족의 북위(北魏, 386-534) 시기에 농업기술, 문화, 제도 정비, 민족 융합 등의 면에서 이 지역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고 기술해 놓았다. 『한서(漢書)』에 의하면 청도에서 북쪽으로 발해를 끼고 만리장성의 동쪽 기점인 갈석산 부근까지 연안 지역은 위만조선이 망한 후 우거왕의 아들 장항과 항복한 신하(참, 한음, 왕겹, 장, 최)들을 한 무제가 제후로 봉한 지역이다. 중국 역사에서 봉지는 제후들 자신들의 근거지임을 생각해 보면 이곳 산동반도 북쪽 해안지역과 발해연안이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위만조선에 앞선 고조선 강역이었을 것이다.

항복한 위만조선 신하들을 한나라가 제후로 봉한 지역 (자료 : 이덕일의 "고조선은 대륙의 지배자였다")

중국의 저명한 역사학자 여사면(呂思勉)의 『중국민족사』에 의하면 이 지역을 한 때 통치했던 모용(慕容)씨의 연나라와 고구려는 말이 통했다고 한다. 모용씨는 선비족 부족이다. 따라서 북위를 건국한 탁발(拓拔) 씨와 모용씨가 같은 선비족으로 서로 말이 통했을 것은 자명하니 북위와 고구려도 말이 통했을 것이다. 선비족은 우리와 뿌리가 같은 형제 민족이다. 전문 학자들이 깊게 연구해야 할 분야다.

산동성 지역은 춘추전국시대에는 제나라 강역이었다. 이어 진시왕의 진, 한나라, 조조의 위, 사마씨의 진, 산비족의 위, 동위, 고구려 고씨의 북제 강역에 속했다가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하면서 온전한 중국의 영토가 되었다. 이어 들어선 당나라가 쇠퇴기에 접어들면서 고구려 유민 이정기(李正己 732-781)와 그 후손들이 산동성과 하북성 및 하남성 일부와 낙양까지 장악하여 중국 대륙에서 당(唐, 618-907)과 55년 동안 대치했다. 유일하게 청주박물관에만 이정기를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소개하고 있다.

청주박물관의 이정기에 대한 설명

이정기는 지금의 요녕성 조양(朝陽)에서 태어났다. 자신의 실력으로 765년 나이 33세에 평로치청절도관찰사, 해운압신라발해양번등사(海運押新羅渤海兩番等使), 검교공부상서, 어사대부, 청주자사가 되었다. 이 중에서 평로치청절도사는 낙양 동쪽 15개주를 관할하는 절도사이고, 해운압신라발해양번등사는 신라 발해 왜와의 모든 왕래를 관장하는 직책이다. 나중에는 재상 직책인 동서문화평장사에 봉해졌다. 당 조정의 이정기에 대한 이러한 대접은 이정기의 협조 없이는 동쪽 지방의 통제가 불가능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정기가 죽자 아들 이납이 정식으로 제(齊)나라를 건국했다. 제나라는 광활한 평야지역의 생산력과 북방무역 및 소금 거래를 통해 막대한 재부를 축적했다. 특히 제나라는 막강한 군사력과 함께 중국 물류 중심인 운하의 요충을 차지하여 당나라를 압박했다.

이납이 34세로 요절하고, 그의 아들 이사고도 일찍 죽고, 이사고의 이복동생 이사도가 제나라 3대 왕이 되었다. 당시 당나라 사정이 얼마나 어려웠던지 신라에 원병을 요청했다. 『삼국사기』 헌덕왕 11년(서기 819) 조는 장군 김웅원의 지휘 하에 군사를 3만 명 파병했다고 적고 있다. 아마 우리 역사 최초의 대규모 해외 파병일 것이다. 동북아 해상왕으로 알려진 장보고도 이 지원군의 일원으로 참가해서 두각을 나타내어 성공의 기초를 닦았다.

그러나 819년 당나라 조정에서 보낸 자객에게 낙양에서 이사도 부자가 암살되어 역사 속으로 제나라는 사라졌다. 중국 역사책 『당서』는 제나라에서 고구려 말이 사용되었으며, 고구려계가 지배층이었고, 한민족 풍습이 유행했다고 쓰고 있다. 이정기는 그 시대의 영웅이었다.

청주박물관을 떠나 가까운 곳에 있는 고차(古車)박물관을 찾았다. 고대의 마차를 전시해 놓았는데 몇 년 전에 서안박물관 등에서 본 것과 별 차이가 없다. 이 지역은 춘추전국시대 제(濟)나라 수도인 임치(臨淄) 부근이다. 제나라 박물관은 수리 중이어서 관람이 불가능하다.

옛 임치성을 찾았다. 고성 일부만 남아 있고 더 이상 훼손을 막기 위해 건물을 지어 유적을 가둬 놓았다. 내부가 지저분하다. 성의 기반은 판축으로 조성했고 성벽은 판축에 벽돌을 덧입힌 것으로 보인다.

제나라는 강태공이 제후로 봉해진 곳이고, 후일 환공이 재상인 관중의 보좌로 춘추시대 최초 패자가 된 나라이다. 관중의 언행을 모은 『관자(管子)』는 동양 사상의 원형이다. 관중은 서기전 7세기 사람이다. 동양사상의 원형이 이곳에서 형성된 것이다. 유가와 법가는 모두 『관자』를 자기들의 비조로 받들었다. 관중의 사상은 시대를 뛰어넘는 나라를 다스리고 조직을 운영하는 근본을 설파한 이론과 실천이다.

제나라는 임치성 서문 밖에 오늘날 연구단지에 해당하는 시설을 마련해 놓고 각 나라의 학자들을 초빙해서 우대하여 학문 증진에 노력했다. 이 때 모여든 학자들이 소위 직하(稷下)의 학사들이다. 학자들의 환심을 사려는 왕의 허세도 있었겠지만, 이로 인해 중국 특유의 다양한 학문인 제자백가(諸子百家) 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것도 사실이다. 학자 출신인 필자로서는 부러운 역사적 사실이다. 서문 터를 찾아보고 싶었지만 날이 어두웠다.

춘추전국시대 제나라 수도 임치성 표지

버스 타고 지나가는 길에 임치성 남문 터라는 표지석이 보인다. 이 남문 근처 어디에서 고조선이 제나라와 싸워 이겼다. 『단군세기』에 의하면 고조선은 서기전 707년 장군 조을을 보내 연(燕)나라 도읍을 돌파하고 제나라 군사와 임치 남문교외에서 싸워 승리했다. 이 근처가 바로 그곳이다.

임치성 남문 부근

임치성에서 35km 쯤 떨어진 치박(緇博)시 은좌화미달대주점(銀座華美達大酒店) 호텔에 첫 날 여장을 풀었다. 이 호텔은 라마다 호텔과 연계되어 있는데 은좌라는 일본식 용어가 생경하다. 오늘 이동한 거리가 대략 320km이다.

 

 

                허성관(許成寬) 전 행정자치부 장관, 현 미사협 상임대표

 

 

 

박찬화 기자  multikorea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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