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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성관의 『우리 역사 현장 답사기』 (2)치우천황 묘에 참배하다
허성관 미사협 상임대표의 2016년 중국을 다녀오며 쓴, 우리역사 현장 답사기를 7회에 걸쳐서  연재합니다
 
(2016년 7월 30일, 토) 치박⟶곡부⟶치우총⟶하택 ②
 
■ 치우천황 묘에 참배하다

오늘은 곡부에 있는 공자의 유적을 찾아보고 치우천황의 무덤에 참배한 다음 하택(菏澤)시까지 가는 일정이다. 곡부까지 250km, 치우총까지 80km, 하택시까지 120km, 대략 450km를 이동해야 한다. 여전히 찌는 더위다. 치박시에서 머문 호텔을 나서자 곡부로 가는 고속도로의 가까운 진입구가 막혔다고 한다. 물론 이유는 알 수 없다. 중국 답사에서 흔히 당하는 사태라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운전기사가 다른 진입구를 찾느라 두 시간을 헤맸다. 오늘 최종 목적지인 하택시에는 늦게 도착할 수밖에 없다. 저녁밥을 제대로 먹기 어려울 것이다.
 
끝이 보이지 않는 평원이다. 지나는 길에 가끔 강이 보이기는 하지만 수량이 많지 않고, 무더운 여름이라 녹조도 끼여 있다. 제남(濟南)휴게소에 들어갔다. 휴게소 뒤로 소고산 저수지라는 제법 큼지막한 호수가 근사하다. 국수와 만두를 주문해서 점심을 먹었다. 습하고 더운 날씨에 소나기라도 한줄기 내려주기를 기대해 본다. 이 지역 휴게소들의 시설은 그런대로 괜찮다. 차량 통행이 많은 탓으로 신경을 쓴 결과이리라. 고속도로가 한산한 동북지방 휴게소 화장실은 상상을 초월한다. 여기서부터 산이 보이기 시작한다. 곡부로 가는 중간쯤에 창밖을 보니 바람이 세차게 불고 갑자기 하늘이 컴컴해지더니 소나기가 억수처럼 쏟아진다. 이상도 하다. 하도 더워 소나기라도 한줄기 오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소나기가 쏟아진다. 지나는 길에 추성(鄒城)이라는 지명이 보인다. 맹자의 고향이다. 곡부는 노(魯)나라의 중심이고 공자의 고향이다. 예의와 학문의 고장이라는 추로지향(鄒魯之鄕)의 원조가 여기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곡부 출구로 나와 공자 유적지 입구에 들어선다. 어! 그런데 근처에 소호 금천(少昊 金天)의 묘가 있다는 표지판이 보인다. 『사기』 <오제본기>에 의히면 소호는 황제 헌원과 부인 뉘조 사이에 태어난 큰 아들 청양(靑陽)으로 서기전 2474년부터 7년 동안 임금이었다. 소호 후손 중에 흉노 휴도왕이 있었고, 이 사람의 두 아들이 전한(前漢)의 무제에게 포로가 되었으나 본인과 후손들이 전한 조정에서 크게 성공했다. 후손 중에 김망(金莽)이 전한을 뒤엎고 신(新)나라를 세웠으나 곧 유수에게 망하고 후한(後漢)이 들어섰다. 김망이 소위 왕망이다. 김씨 일가는 망명할 수밖에 없었고 이들의 일부가 도착한 곳이 우리나라 남쪽이었다. 휴도왕 큰 아들 후손이 경주 김씨 시조인 김알지이고, 작은 아들 후손이 김해 김씨, 허씨, 인천 이씨 시조인 가락국 김수로왕이다. 기록이 맞는다면 소호는 역사에 나타난 필자의 첫 조상이다. 이 내용은 신라 문무왕 비문과 미수 허목(許穆, 1595-1687)의 『기언(記言)』에도 나와 있다. 후손으로서 마땅히 참배해야 하지만 단체 여행이라 후일을 기약해 본다. 소호의 묘가 이곳 곡부에 있는지는 몰랐다.
성을 만든 공자 유적들(공자묘 공자사당 가족무덤)


공자 유적지에 도착해서 차에서 내리니 더운 날씨가 시원하다. 세차게 내린 소나기 덕이다. 유적은 공자 사당, 묘, 일족들의 무덤으로 구성되어 있다. 유적 전체가 해자와 성곽으로 둘러싸여 있다. 문을 여섯 개 지나면 공자 사당인 대성전이다. 각 문은 송, 금, 청, 등 중국 역대 왕조 황제들이 건설했다고 표지판에 설명해 놓았다. 홍도문 대중문 대성문 등이다. 아마도 문이 많을수록 유적의 권위가 높아지는가 보다. 고목들이 무질서하게 서 있어 태풍이라도 불면 넘어져 건물을 손상할 듯하다.

공자사당 대성전

대성전 규모가 엄청난데 그 앞에 연기가 자욱하다. 보니 향을 피운 것이다. 대성전 안에는 공자의 초상과 신주를 모셨다. 엉뚱하게도 돈을 넣는 큼지막한 상자가 버티고 있다. 돈 내고 소원을 빌어보라는 의미인가 보다. 원래 유학은 내세관이 없어 종교가 아닌데 세월이 지나면서 이렇게 변질된 것이다. 이는 절대로 공자가 원하는 바가 아닐 것이다.

대성전 내부 공자 위패
김대중 대통령, 베트남의 호지명, 북한의 김일성도 이곳을 다녀갔다고 한다. 우리나라 유학자들에게는 이곳이 성지다. 우리나라에서는 각 군마다 있는 향교에서 매년 공자를 제사하는데 중국 사람들도 믿기 어려운 현상일 것이다. 언젠가 한국 유림 3천명이 이곳에 모여 제례를 올렸다고 한다. 중국 사람들도 깜짝 놀랐을 것이다. 문화혁명 시절 공자도 반대하고 임표도 반대한다는 비림비공(非林非公)이 구호였는데 지금은 중국에서도 공자는 존숭의 대상이다. 정권이 안정되면 통치이념으로 유학만큼 번듯한 사상은 없다. 인의예지의 정치, 모두가 행복한 대동(大同)사회, 예(禮)로 다스리는 소강(小康)사회를 지향하겠다고 선언하면 국민들의 기대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기 때문일 것이다. 유적지 밖에 장사가 너무 많다. 공자의 명언을 인쇄한 부채를 샀다.
 
곡부를 떠나 치우(蚩尤)천왕 묘로 향했다. 『한서』 <지리지>에는 산동성 동평군 수장현 감향성에 치우천황 묘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지금 행정구역으로는 산동성 제녕시 문상현 남왕진이라고 하지만 어쩐지 찾기가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든다. 치우천황은 월드컵 축구 경기 때 우리 응원단 붉은악마의 표상이다. 『사기』 주석서인 『사기집해』는 “치우는 옛날의 천자”로, 『사기정의』는 한(漢)나라 때 사람 공안국(孔安國)을 인용하여 “구려의 임금 칭호가 치우(句麗君號蚩尤)”라고 기록하고 있다.
 
『사기』 등 중국 역사서들은 치우가 한족의 조상인 황제 헌원과의 전쟁에서 패해 살해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한나라 고조 유방은 전쟁에 나가기 전에 치우천황에게 제사부터 지냈으니 중국 역사에서 치우천황은 군신(軍神)이었음을 알 수 있다. 중국 역사서의 기록과 당시 현실이 일치하지 않는다. 게다가 『관자』에서 지하자원을 이용하는 정책을 논한 <지수(地數)>편에서 광산을 관리하는 황제의 신하가 치우라고 기술했으니 앞뒤가 맞지 않는다. 치우천황에 관한 우리 기록은 중국 기록과 다르다. 『환단고기』 <신시본기>는 배달국 14대 치우천황이 황제 헌원과 10년 동안 73회 싸워 마침내 굴복시켜 신하로 삼았다고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중국 역사서들은 치우천황의 머리는 구리이고 이마는 무쇠라는 동두철액(銅頭鐵額)의 무시무시한 사람으로 표현했다는데 이는 우리 기록과 일치한다. 치우 집단이 가장 먼저 금속무기로 무장한 전사였던 사실을 이렇게 기술한 것이다. 지금 하남성과 산동성을 가로지르는 회수(淮水)와 산동성의 태산(泰山)을 중심으로 하는 회대지역이 치우천황이 활동했던 지역이라는 데 중국과 우리 기록이 일치한다. 지금 북경 북서쪽 탁록에서 황제와 치우천황이 싸웠다는 기록도 같다.
 
치우천황 상징인 둑기와 도깨비상(출처:조성제 불로그)
우리 민간 신앙에는 치우천황과 관련된 설화와 무속이 면면히 전해지고 있다. 그래서 월드컵 축구 시합 응원단의 상징이 치우천황을 표상하는 붉은 악마가 되었을 것이다. 왕조 시대 군대에는 둑기라는 치우를 상징하는 깃발이 있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뚝섬에 둑신사라는 치우천황 사당이 있었다. 아래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둑기와 도깨비 상이 이 사당에 있었다. 사실 뚝섬이라는 이름도 둑기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치우천황 무덤을 찾아가는 것은 우리 민족 시원 조상에 다가가는 것이다. 문상현 남왕진에서 치우묘를 찾았으나 아는 사람이 없다. 전자 길안내기에 나타난 치우묘 자리는 마을 골목인데 무덤이 없다. 주민들의 말로는 옛날에 여기에 사당이 있었다고 한다. 마침 택시 기사에게 물었더니 안내해 주겠다고 한다. 반신반의 하면서 택시를 앞세우고 버스로 뒤를 따랐다. 남왕진 네거리에서 좌회전해서 1.5km 정도 가자 오른쪽에 버드나무 숲이 있고 숲 사이로 길이 나 있다. 버스에서 내려 얼마 걸어가자 버드나무 숲이 끝나는 곳에 치무천황 묘가 있다.
 
치우천황릉( 중국 산동성 문상현 남왕진 소재)
묘 주위에 해자를 둘렀으나 물은 없다. 해자를 건너는 돌다리가 반쯤 무너져 있고 주위가 지저분하다. 봉분이 크지는 않으나 우뚝하다. 봉분 꼭대기로 올라가는 길이 있다. 평원에 있는 무덤이다. 묘 앞에는 무섭게 생긴 돌사자(?) 두 마리고 지키고 있다. 이곳에 치우총이라는 옛날 글자로 쓴 고비가 있었다고 하는데 흔적이 없고 최근에 새긴 표지석이 있을 뿐이다. 마을 주민 얘기로는 고비를 지난해에 도둑맞았다고 하는데 아마도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을 것이다. 치우천황 묘를 답사한 것만으로도 여행비용이 아깝지 않다.

주위가 어둑해지는데 우리 동이족의 영웅, 위대한 조상 묘가 부실하게 관리되고 있어 마음이 씁쓸하다. 이 묘를 찾은 우리나라 사람도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 곳 외에 여러 곳에 치우천황 묘가 있다. 그러나 치우천황의 주된 활동 지역이 이곳 회대지역이므로 여기 무덤이 실제 무덤일 가능성이 크고, 『한서』 <지리지>의 기록과도 부합된다. 북경 서북쪽 탁록에도 치우천황의 무덤이 있다. 그 곳의 묘는 아주 반듯하게 관리되고 있다고 김병기 박사가 전한다.
 
탁록에는 중국 3대 조상을 모시는 삼조당(三祖堂)이 있는데, 삼조가 염제 신농(神農), 황제 헌원, 치우천황이다. 동이족의 선조인 치우천황을 우리들이 신화로 취급하고 도깨비로 알고 지내는 동안 중국인들이 자기네 조상으로 입양한 것이다. 치우(蚩尤)에서 蚩(치)는 벌레, 어리석다, 더럽다는 뜻이다. 尤(우)는 더욱더 라는 뜻도 있지만 수상하다, 괴이하다는 뜻이다. 결국 치우는 ‘괴이한 벌레 같은 놈’이라는 이름이다. 자기 조상 이름을 이렇게 나쁘게 짖는 후손이 있겠는가! 이러니 치우천황이 한족의 조상일 수 없다. 사실 중국 사학자들은 이웃 나라 민족들 이름을 표기할 때 자기들 귀에 들리는 음을 나쁜 뜻의 한자로 표기해 왔다. 예를 들어 우리 민족을 예맥(濊貊)족으로 기록했는데 ‘더러운 고양이 비슷한 놈’이라는 뜻이다. 절대로 우리가 한자로 표기해서는 안 되는 호칭이다.
 
황하가 가까운 하택시에 저녁 9시가 넘어 도착하자 여기저기 거리가 물바다다. 소나기가 세차게 내린 탓인데 이 도시 이름대로 지대가 낮아 물이 잘 삐지지 않는 지역인가 보다. 숙박하기로 되어 있는 수읍백청주점(水邑柏靑酒店) 호텔 옆 동네 식당에서 늦은 저녁을 먹었다. 값이 싸고 맛도 괜찮으나 퀴퀴한 하수도 냄새가 거슬린다.
 
 
                 ◆ 허성관(許成寬) 전 행정자치부 장관, 현 미사협 상임대표
 
 

박찬화 기자  multikorea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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