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우키시마호를 알고 있다"
1. 일본은 끝까지 악마를 택했다
2. 우키시마호는 어떻게 침몰했나
3. 나는 우키시마호를 알고 있다
4. 한·일 정부는 해원(解寃)에 나서라
5. 오늘 우리는 역사에 탄원한다
“소용돌이치는 물속에 조선인 여자와 아이들이 빨려 들어가며 힘을 다해 손을 쳐들고 ‘아이고! 아이고!’ 소리치며 울부짖었다. 그리고는 물에 잠겼다. 지옥 같은 상태였다…”
진실은 묻혀 있어도 증발하지 않는다. 역사는 말이 없어도 천지는 인간의 사연을 하나도 빠짐없이 아로새기고 있다. 일제에 잡혀가 참혹한 강제노동과 학대, 학살의 지옥에서 고통받다 가까스로 살아남은 생존자와 가족들은 여전히 끔찍한 트라우마로 고통받고 있다. 학살당한 원혼들은 아직도 야만의 땅에서 기약없는 귀향의 꿈을 꾸고 있다. 구천에 사무친 원통한 사연은 근본적인 해원이 없으면 ‘시간이 약’이 될 수 없다. 그들의 피를 토하는 증언은 지금도 우리 곁에 살아 있다. 아래 제시하는 모든 내용은 전재진 우키시마호폭침진상규명회 회장이 제공한 기본자료와 72년간 수집한 수많은 생존자들의 증언과 조사자료 등 사실에 근거한 것임을 밝혀둔다. 아프고 불편하지만 묻혀진 역사의 진실과 마주서보자. /편집자 주
◆일제는 무슨 짓을 했나
일제가 당시 한국인 징용자들에게 자행한 잔인무도한 만행은 안간힘으로 버텨낸 생존자들의 생생한 증언을 통해 전해지고 있다. 그 수위는 상상을 뛰어넘는다. 나중에 우키시마호를 타게 되는 한국인 징용자들의 주된 노동현장이었던 일본 본토 최북단 아오모리현(靑森縣) 시모키타반도(下北半島) 지역을 중심으로 참혹한 강제노동의 실상을 짚어본다.
1941년 태평양전쟁 발발 뒤 시모키타반도까지 끌려간 한국인들은 제1선 상비노동력으로 투입됐다. 전쟁 발발 이전엔 주로 군수공장이나 석탄광산, 비철광산에 투입됐으나 개전 이후엔 군사요충지의 최전방인 북해도, 치시마열도, 사할린, 캄차카반도, 아오모리현 시모키타반도 등에서 연합군의 일본 본토 상륙을 대비한 군사시설 공사장에 투입됐다. 이때 한국인들의 노동 현장은 험준한 산악지대인데다 공사를 시급히 끝내야 했기 때문에 더욱 가혹하게 운영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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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담요 한 장으로 다다미 위에서 잤다. 다다미가 없는 데가 더 많았다. 보통 2층으로 된 판잣집이었으며 가운데에 난로가 있었다. 베개가 없고 통나무를 베개로 쓰게 해 아침에 일어날 때 통나무를 빼내거나 두들기고 굴려 일어나도록 하였다 (한국인 숙소 전경 사진=전재진 회장) |
그들은 악명 높은 ‘타코방’에 수용됐다. 환경과 처우는 짐승우리보다도 열악했다. 가혹한 노동과 학대에 못 이겨 탈출해 거리나 기차역으로 나가면 日 해군과 헌병에게 붙들려 다시 타코방으로 넘겨졌다. 일제의 간교한 술책에 속은 것을 뒤늦게 알아도 벗어날 길이 없으니 절망밖에 안 남는다. 현장 주위는 공사 하청업체의 감독들이 감시의 눈초리를 늦추지 않았다. 이는 당시 강제연행과 강제노동이 정부와 기업 간의 공조체제로 이뤄졌다는 것을 입증한다. 오늘날 일본은 이를 뻔뻔히 부인한다.
시모키타반도 일대에는 일본 대본영(왕실=침략전쟁 본부)의 10개 원청업체(세자키조·아이자와조·고야나기조 등)와 4개 기업(철도공업·도호공업(東邦工業)·일본국철·일본통운), 오미나토해군경비부 소속 해군 부대 등이 산재해 있었다. 이들은 대본영이 발주한 군사시설공사 임무를 띠고 있었다. 세자키조 등 원청업체들은 홋카이도에서도 악명 높았던 ‘타코방’(이들은 한국인을 ‘모집’으로 위장해 공사장까지 유인한 다음 일정액을 선금(원금)으로 지급하고 매월 월급에서 제해나간다.
그러나 그 선금에는 월급보다 더 많은 이자가 붙기 때문에 시간이 갈수록 원금(빚)은 쌓여만 간다. 원금을 갚지 못하면 식대나 다른 비품대금에서 공제했다. 결국 노동자들은 먹을 것도 입을 것도 없이 빚만 남게 된다. 이러다가 ‘굶주려 제 발을 뜯어 먹는 문어꼴이 된다.’ 해서 한국인이 합숙한 판잣집을 ‘타코방(문어방)’이라 한 것)식 노무관리제를 도입해 오미나토 해군시설부와 관련된 비행장 건설, 1만톤급 도-크 건설, 군항만 수리, 방공호 파기, 터널 뚫기, 석탄 운반, 산림 벌채 그리고 수많은 사상자를 낸 오마철도 공사 등을 한국인의 인력으로 강행했다. 원청업체는 다시 하청업체에 공사를 맡겼고, 이들 하청업체는 시모키타반도의 곳곳에서 참혹한 강제노동을 강요했다.
"그렇게 한국인들의 피땀을 짜내 종자돈을 거머쥔 회사들은 오늘날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해 세계를 주무르고 있다 "
일본의 돈과 기술의 바탕에는 이처럼 우리 선조들의 피와 절망과 통한이 스며있는 것이다. 지금 그 후손들은 일본이 이룬 발전과 저력에 존경을 표하기까지 한다. 어이없고 서글픈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들이 어떻게 우리 선조들의 피땀을 짜내 배를 불렸는지 생생한 증언들을 들어보자.
▲짐승보다 못한 처우= △옷과 신발은 단 한 번만 지급됐다. 겨울에도 여름옷을 입어야 했고, 여름에는 거의 신발을 신지 못했다. 겨울에는 시멘트 종이로 둘둘 말아 끈으로 묶고 다녔다. 영하 30~40℃의 혹한 속에서 해진 옷을 걸치고 무자비하게 쏟아지는 매질까지 견뎌야 했다 △옷은 군속으로 배속됐을 경우에만 지급했는데 해군 헌 군복 한 벌과 모자 한 개와 담요 한 장이었고 양말이나 속옷은 없었다. 신발(지까다비)은 한 켤레뿐이었다. 죽은 사람의 옷을 다투어 벗겨 입었다 △음식은 도저히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돼지에게 준 먹이통에서 밥을 건져 먹었다. 오징어나 호박, 무 한 조각이 반찬의 전부였다. 바닷물을 끓여 국이라고 먹으라 했다 △담요 한 장으로 다다미 위에서 잤다. 다다미가 없는 데가 더 많았다. 보통 2층으로 된 판잣집이었으며 가운데에 난로가 있었다. 베개가 없고 통나무를 베개로 쓰게 해 아침에 일어날 때 통나무를 빼내거나 두들기고 굴려 일어나도록 하였다 △임금은 일본인 임금의 절반 수준이거나 아예 지급하지 않았다. 국민저축이라는 명목으로 공제하면 일본인 임금의 1/3 수준에도 못 미쳤다 △노동시간은 오전 6시에 나가 오후 6시 또는 10시에 숙소로 돌아오는 사례가 많았고 12시간 노동은 다반사였다 △출퇴근, 휴게의 자유도 휴일도 없었다 △공사장으로 나갈 때나 합숙소로 돌아올 때 해군이나 업체 감독들은 끝에 뾰족한 못을 박은 몽둥이로 꾹꾹 찌르며 인솔했다. 굶주려 허덕이다 쓰러지는 노동자들을 가죽채찍이나 곡괭이 자루를 휘두르며 노동을 강요했다 △합숙소는 ‘타코방’식으로 운영했다 △합숙소에서 탈출하다가 잡혀온 한국인은 감독실의 천장에 매달아놓고 밑에 장작불을 피워 ‘천천히’ 태워 죽였다 △오미나토해군시설부 헌병분소 지하실에 거꾸로 매달아놓고 몽둥이로 온몸을 떡 치듯 쳐대는 고문을 당했다 △일하다가 다친 상처에 구더기가 우글거려도 치료해주지 않는 건 보통이었다 △손가락 골절상이나 근육 자상 정도는 치료하지 않았다 △영하 40도를 오르내리는 겨울에도 판잣집에서 담요 한 장으로 잠을 이뤄야 했다 △노동 조건과 숙박시설에 항의하는 경
우 북방지역으로 강제 축출하거나 혀를 자르고 칼로 베어 죽였다 △낙반사고나 붕괴사고로 다수의 사망자가 발생했을 경우 사망자의 신원을 파악하지 않고 한꺼번에 매장했다 △굶주린 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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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마철도 구간의 한 터널 공사장에서는 일하던 조선인이 죽으면 콘크리트를 붓던 속에 시체를 밀어넣고 매립했다 △오마철도 공사장에서 탈출을 시도한 한국인이 계곡 개울이나 숲 속에서 한국인의 굶어죽은 시체가 발견되기도 했다. 이곳은 산 쪽으로 향하면 절벽이고 바다를 향하면 태평양이었다.(사진제공=전재진 회장) |
동자가 일하다가 현기증으로 졸도하면 감독이 곡괭이 자루나 삽자루, 몽둥이로 머리를 내려쳐 죽으면 구덩이에 그대로 매립했다 △오마철도 구간의 한 터널 공사장에서는 일하던 조선인이 죽으면 콘크리트를 붓던 속에 시체를 밀어넣고 매립했다 △오마철도 공사장에서 탈출을 시도한 한국인이 계곡 개울이나 숲 속에서 한국인의 굶어죽은 시체가 발견되기도 했다. 이곳은 산 쪽으로 향하면 절벽이고 바다를 향하면 태평양이었다.
▲사망 사례= △감독의 몽둥이나 곡괭이에 맞아 죽음 △부상당해 열병에 걸려 죽음 △산 채로 불에 그을려 죽음 △탈출하다가 산속에서 굶어 죽음 △폭약 폭발로 죽음 △공사장에서 영양실조로 쓰러져 죽음 △산채로 제물로 매장당해 죽음 △‘귀국’시켜준다며 낡은 선박에 태워 바다 한 가운데서 침몰시켜 죽임 △경찰서 건물 안에 모두 넣고 밖에서 문을 잠그고 기름을 붓고 불 질러 죽임(8월 18일 사할린의 가미시스카(上敷香)경찰서 화염학살사건) △청어보관용 대형 냉동고에 넣어 얼려 죽여 바다에 던짐(19일 미즈호(瑞穗)항 냉동학살사건) △칼로 목과 등을 쳐 죽임 △삽이나 괭이로 머리를 찍어 죽임 △쉬는 시간에 땅바닥에 고향의 부모형제 얼굴을 그렸다고 칼로 쳐 죽임
▲사체 처리= △구덩이를 파고 여러 명을 한꺼번에 매립 △죽은 조선인을 조선인에게 직접 화장시킴 △화장한 유골은 면사무소에 맡겼으나 인적사항이 없었고, 이런 유형의 유골은 대안사(大安寺)에서 보관하고 있음 △수십 구의 사체를 모아 기름을 붓고 태워 묻었음
◆치부 덮으려는 일본의 억지논리에 대한 반증
1945년 8월 24일 일어난 우키시마호 사건에 대한 핵심 쟁점은 침몰 원인과 승선/사망자 수 등이다. 일본은 사건 발생 8일 만인 9월 1일 선체 인양이나 정확한 현장검증 등도 없이 침몰사건 조사 결과를 서둘러 발표했다. △침몰원인은 ‘촉뢰(미군 기뢰에 접촉)에 의한 폭파’ △탑승자는 조선인 3천725명과 日해군 255명, 사망자는 조선인 524명과 日해군 25명 등 549명 △실종자·생존자 수는 미상 등이다. 자기들이 기획하고 실행한 인류 해난사상 최대의 대참사에 대해 일본은 끝까지 철면피로 일관했다.
▲침몰원인=이에 대해 ‘우키시마호폭침진상규명회’는 “촉뢰가 아니라는 과학적 논리가 성립된다”고 밝혔다. 이에 따르면 기뢰는 감응기뢰, 음향기뢰, 부유기뢰가 있는데 수압, 진동, 음파 기전으로 폭발하는데, 우키시마호가 폭파될 때는 기관실 엔진이 꺼져 있었고 배가 완전히 멈춰서 있었기 때문에 기뢰의 폭발 기전이 작용할 수 없다. 배가 멈춘 상태에선 수압이 작용하지 않고, 기관소리도 없어 음파도 작용하지 않고, 직접 접촉도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당시 배를 탔던 한국출신 일본헌병 미나미는 “배가 마이즈루만에 당도했을 때 기관실 쪽으로 늘어선 전깃줄을 발견하고 이를 끊으려 했으나 도구가 없어서 끊지 못했다”고 증언했다.
또 2015년 8월 부산에서 열린 ‘우키시마호사건 진상규명 국제세미나’에서 김문길(72) 우키시마호희생자추모협회 고문이 공개한 日방위청 문서 ‘발신전보철(發信電報綴)’에서 우키시마호가 폭발물을 싣고 있었음이 입증됐다. 1945년 8월 22일 日 해군 운수본부장이 우키시마호 선장에게 내린 ‘항행금지 및 폭발물처리’ 지시는 △1945년 8월 24일 18시 이후, 지금 출항 중인 경우 이외는 항행 금지하라 △각 폭발물의 처리는 항행 중인 경우 무해한 해상에 투기하라 △항행하지 않은 경우 육지 안전한 곳에 넣어두라(격납)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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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3년 10월 우키시마호 인양 당시 선체조사자인 타무라 게이오 씨가 찍은 사진. 선체의 벽부분의 철근이 밖으로 휘어져 있어 내부 폭발임을 증명하는 유일한 물증이다. <마이즈루시 리병만 대표 =사진제공> |
아울러 폭파침몰은 사전에 의도한 계획이었음이 명백하다. 이는 △전시에 쓰던 박격포 등과 같은 포탄두를 제거하지 않았고 그런 포탄두가 기관실 옆 창고에 있었다 △배의 평형을 유지하는 바닥짐을 굵은 자갈로 채웠는데 침몰의 속도를 더하려는 의도로 밸러스트(ballast)를 덮은 철판을 제거했다 등의 증언을 통해 알 수 있다. 또 1973년 5월 25일 중앙일보는 ‘기관실 옆 창고에 폭파장치를 설치했다는 증언이 있다. “반강제하다시피 노동자들을 만재(滿載)한 우키시마호에는 폭탄을 설치, 출항시켰는데 일본해에서 폭파할 예정이었다”, “조선인을 태운 배 이름을 공작부 기관구에서 모두 페인트를 칠해 보이지 않게 하고 자폭장치를 부착했다”고 사사키(佐佐木·45)씨는 당시 해군공작부 조기과(造機科)에 근무하던 부친의 말을 인용해 증언했다’고 보도했다.
오사카에서 발간되는 국제신문은 1954년 10월 9일자 신문에 ‘8월 22일 오미나토항을 출발할 예정이었는데, 황급히 8월 21일에 출항한다고 선전하면서, “이 배에 승선하지 못한 사람은 귀국을 보장할 수 없다”며 승선자들을 배 안에 둔 채 하루 밤낮 동안 다이나마이트와 총포류를 배 밑바닥에 실어 넣었다’고 보도했다. 1954년 10월 이노사루베지가 스크랩을 목적으로 우키시마호를 해체하는 작업을 할 때 국제신문 사진기자가 선체 밑부분을 촬영하는 데 성공해 두 장의 사진을 신문에 게재했다. 그러면서 사진에 대해 ‘촉뢰라면 배의 안쪽으로 구멍이 나 있어야 하는데 바깥쪽으로 부풀어 있어 배 안에서 생긴 폭발에 따른 것이라는 추측을 배제할 수 없다’고 설명하고 있다. 아울러 “생존자에 따르면 침몰 직전에 폭발음을 세 번 들었다고 한다. 만약 촉뢰라면 이 같은 현상은 없다”고 보도했다.
이 같은 내용을 통해 보더라도 우키시마호 침몰은 촉뢰가 아니라 내부폭발로 인한 침몰임이 명백해진다. 결론적으로 우키시마호 사건은 日왕(대본영) 또는 기타 군부의 지령(이른바 ‘조선인섬멸작전’)으로 계획적으로 저질러진 대학살임을 추론할 수 있다.
▲승선/사망자 수=승선자와 사망자 수를 밝히려면 한국인 강제연행자 수, 군사시설 규모, 각 해군비행장에 투입한 한국인 수, 각 해군부대에 투입한 한국인 수, 8월 15일 이후에 홋카이도와 그 외 지역에서 오미나토로 이동한 한국인 수와 가족생활자 수 등이 파악돼야 한다. 이에 대한 자료는 일본 측이 공개하지 않고 있고, 당시 조직적인 근거자료 소각 폐기행위로 일부는 아예 존재하지 않을 가능성도 짙다.
당시 강제노역현장 투입 인원을 토대로 승선자 수를 추산해 보면, 미사와비행장 해군 11·12·13·14부대에 투입한 인원, 가바야마 비행장에서 일한 10개 중대 규모 인원, 해군 23부대에서 일한 인원, 2개 국영기업체와 11개 민간토건업체에서 일한 인원 등만으로도 승선자 수가 최소 8천2백여명을 뛰어넘는다. 여기에 사건 뒤 생존자가 1천여명에 불과하니 실제 사망자 수는 일본의 발표와는 천양지차란 사실을 알 수 있다.
▲기타 의혹과 만행=일본 측의 부당하고 몰상식한 사후처리도 짚어봐야 한다. 그들은 침몰한 배를 인양하지도 않고 사망자 수를 발표했다. 또 사건 다음날 바닷가에 밀려든 시신을 신원 파악도 하지 않고 밧줄로 줄줄이 엮어 묶고, 기름을 붓고 태워 마이즈루 타히라 해병단 뒷산 골짜기에 무단 매립했다.
또 그들은 9년 뒤 선체를 인양할 때 일본·조선우호협회가 유골을 원형 그대로 보존해 인양하도록 요청했으나 이를 묵살하고 선체를 다이나마이트로 폭파시켜 인양했다. 그나마 인양한 유해로 남녀노소를 구별할 수 있었으나 이 또한 무시하고 유해를 합쳐 태워 9년 전에 발표한 524명이라는 숫자에 맞춰 나눠 담기에 급급했다.
또 대본영 송환계획보다 앞선 시기에 안전항해가 보장되지 않은 승선, 출항의 부당성, 마이즈루만 회항, 해군 승무원들의 모선 탈출과 구조 외면, GHQ(연합군사령부)의 조사 방기, 9년간 선체 수중방치로 인한 사체유기, 72년 동안 외면해온 일본 정부의 태도 등도 빼놓을 수 없다.
또 광복 직후 한국인에 대한 대대적 학살 정황도 드러났다. 1945년 8월 15일 일왕의 항복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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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시모키타반도 현지인들이 한국의 우키시마호폭침진상규명회 전재진 회장에게 제보한 화형학살 |
이 나간 직후부터 사할린에서 퇴각하던 日해군들이 한국인에 대한 무차별 학살이 자행됐다. 8월 18일 사할린의 가미시스카(上敷香)경찰서 화염학살사건, 19일 미즈호(瑞穗)항 냉동학살사건이 그것이다. 우키시마호뿐만 아니라 패전 후 ‘조선인섬멸’ 악령이 씐 일본의 조직적·발악적 학살의 실태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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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명의 일본 해군 승무원을 만나 사건 당시 내용을 취재하고 있는 전재진 회장 |
전재진 우키시마폭침사건진상규명회장은 1999년 4월 24일 일본 도쿄에서 키모토 료이치(木本與一, 일본전우동지회장), 하세가와 나오시(長谷川是), 후쿠하라(福原) 등 우키시마호 일본 해군 승무원 세 사람을 만나 당시 상황에 대해 문답을 나눴다. 이들은 사건 발생 54년이 지난 그때까지도 자신들이 증언했다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면 테러를 당할까 두려워했다. 그래서인지 “잘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기밀사항이라서 잘 모른다” “우리 같은 하급병사들은 알 수 없는 일이다” 등의 답변이 대부분이었다.
반면 모두 함께 동의한 내용은 △당시 우키시마호 함장이었던 도리우미 함장과 함께 사령부를 찾아가 물었으나 사령부에서는 “명령에 따르지 않으면 군법에 회부하겠다”는 이례적인 강한 명령을 내렸다 △한국인이 얼마나 탔느냐에 대해서는 승무원을 포함해 4천명이 정상이었으나 이를 훨씬 넘는 사람이 승선했다 △승선자 명부를 작성하지 못한 것은 그럴 만한 시간이 없었을 정도로 배를 타려는 한국인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물기둥이 솟았는가’에 대해선 “못봤다” 등이다.
하세가와는 당시를 회상하며 “배 밑을 들여다보니까 마치 물이 땅에서 솟구쳐 오르는 모양으로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 소용돌이 속에 조선인 여자와 아이들이 빨려 들어가며 있는 힘을 다해 손을 쳐들며 ‘아이고! 아이고!’ 라고 소리치며 울부짖었다. 그리고는 물에 잠겼다. 지옥 같은 상태였다”고 말했다. 박달기자
*기본자료 제공 : 전재진(우키시마호폭침진상규명회 회장, 우키시마호폭침한국희생자추모협회 이사/진상규명특별위원회 위원, 일제강제동원피해자전국연합회 사무총장)
*참고 : 우키시마호 폭침사건진상(가람기획·1996), 우키시마호 폭침사건진상보고서(백산자료원·2008), 우키시마호사건 주요 쟁점에 대한 재조명(야마모토 세이타(山本晴太)·2008), <아이고의 바다(あいごの海)>(증언집·사이토 사쿠지·시모키타지역문화연구소·1994), 마이즈루시 우키시마호희생자구명위원회·교토시 조선인역사조사회·도쿄 조선인강제동원진상조사단 등의 자료
*증언자 : 한국인 생존자 82명, 일본 아오모리현 시모키타지역문화연구소 회원, 아오모리현 무츠시 현지 주민과 향토사학자, 마이즈루시 우키시마호사건추모실행위원회, 마이즈루우키시마호사건희생자구명위원회, 마이즈루만 어촌 현지 주민, 우키시마호 해군승무원, 타무라 게이오(1954년 우키시마호 인양 당시 선체 조사자), 그 외 다수.
#우키시마호폭침사건진상규명회는 오늘(18일) 오전 청와대에 우키시마호폭침사건의 실질적인 해결을 촉구하는 탄원서를 제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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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18일) 오전 청와대에 우키시마호폭침사건의 실질적인 해결을 촉구하는 탄원서를 제출했다 (사진제공=전재진회장) |
박달 기자 pc2000u@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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