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송 김동한 선생 기념사업회장 김경한 회장은 기념사업회 발대식에서 기념사를 하였다. 기념사의 내용은 추도식 기념사업회 발기문을 중심으로 하였다.
그 전문을 여기에 싣는다.
일송 김동삼 선생 85주기 추도식과 기념사업회 발기문
![]() |
| 일송 김동한 선생 기념사업회장 김경한 회장이 기념사를 하고 있다 (사진 = 한문화타임즈) |
오늘, 2022년 4월 13일은 일송 김동삼 선생께서 서대문 형무소의 차디찬 감방에서 순국하신지 85주기가 되는 날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 어느 누구보다 우뚝해야 할 일송 선생의 발자취는 국민들의 기억 속에서 점점 더 희미해져 가고 있다. 이는 전적으로 우리 후손들이 선 생에 대한 추모와 흠숭의 도리를 다하지 못해온 탓이었음을 자책하지 않을 수 없다.
대한민국이 진정 순국선열들의 희생 위에서 광복된 나라임을 자각한다면 이제라도 그 대표적 인물인 일송 선생의 정신을 되살리고 기리는 일에 나서 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 |
| 일송(一松) 김동삼(金東三, 1878~1937) 선생 |
일송 선생은 20대인 1907년 향리 안동 내앞 마을에 3년제 신식 중등 교육 기관인「협동학교」를 세우고 가르치는 데 앞장서 민족의식을 고취하다가 망국의 치욕을 당하여 1910년 국권이 상실되자 전 재산을 처분한 후 친인 척을 인솔하고 삭막한 만주 땅으로 망명하여 백서농장을 개척하고 무장투쟁을 비롯한 총체적인 독립 운동을 펼쳐나갔다. 만주에서 일송 선생은 좌우 모든 계열의 독립운동가들이 지도자로 여겼던 거의 유일의 걸출한 위인이었다.
한국 독립운동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의 저명한 독립운동가 400여 명이 한 자리에 모였던 1923년의 상해 국민대표대회'에서 일송 선생은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부의장은 민족주의 계열의 안창호와 사회주의 계열의 윤해였다.
일송 선생은 1922년 8월 항일무장투쟁이 가장 치열했던 남만주의 주요한 독립운동 단체 '8단 9회 대표'들이 모여 '남만한족통일회의'를 열고 대한통의부를 결성했을 때도 대표자인 총장이자 중앙행정위원회 수반으로 선출 되었다.
그러나 선생은 민족통합을 위해서는 자신이 가진 기득권을 훌훌 털어 던졌다. 만주의 독립운동 단체가 참의부, 정의부, 신민부의 삼부로 나뉘자 선생 은 삼부통합운동을 전개하였다. 삼부 중에서 가장 컸던 정의부 출신이지만 통합을 위해 정의부를 탈퇴하고, 신민부의 김좌진, 참의부의 김승학 등과 1928년 12월 '혁신의회'를 결성하였다. 혁신의회는 비록 삼부전체를 통합하지는 못했지만 정의부의 기득권까지 버린 선생의 결단이 아니었다면 결성되기 힘들었고, 그 결과 혁신의회 회장으로 선생을 선출했다.
또한 여러 독립운동세력을 하나로 결집하는 민족유일당을 만들기 위해서 만주의 주요 인사들이 모여서 '민족유일당재판책진회'를 조직했을 때도 중앙집행위원장은 선생이었다.
일송 선생이 민족통합을 최고의 가치로 삼고 자신을 버린 결과 독립운동가들이 스스로 지도자로 추대한 것이었다. 선생은 철저한 민족주의자였지만 민족 통합을 위해서라면 좌우를 가리지 않았다. 김좌진 등의 신민부와 아나키스트들이 연합한 한족총연합회 회장에 선출되었다. 한족총연합회 부회장은 김좌진이었다. 실로 한국 독립운동사상 걸출한 독립운동가들이 지도자로 선출하고, 또한 민족주 의 사회주의 아나키즘을 모두 아우른 거의 유일한 독립운동가가 일송 선생이었다.
어떤 자리도 탐하지 않았던 선생이 늘 지도자였던 이유는 초지일관 민족 통합과 항일 무장투쟁을 주창했던 노선의 일관성에 있었다.
참의부 참의장이자 혁신의회 중앙집행위원 김승학이 선생을 '만주벌 호랑이'라 고 호칭한 것은 선생의 항일 무장투쟁 노선을 높인 것이었다.
이런 선생이 만주사변 직후인 1931년 10월 5일 하얼빈에서 일경에게 체포된 것은 독립운동 전선 전체에 큰 타격이었다. 선생은 하얼빈 일본총영사관에서 숱한 고문을 당한 끝에 신의주 지방법원에서 10년 형을 받고, 평양형무소를 거쳐 서대문형무소로 옮겨졌다.
그러나 이는 투쟁무대의 이동에 불과했다. 서대문형무소에서 독립운동가들이 목숨을 건 단식투쟁에 나서서 일본인 간수들이 단식중단을 윽박지르면 독립운동가들이 '저분의 처분을 받아야 한다'고 말할 정도로 선생은 옥중투쟁의 중심인물이 었다. 끝내 일본인 형무소장이 사죄하고서야 단식이 중단되었는데, 이런 선도 투쟁은 선생의 몸을 극도로 쇠약케해서 여러 차례 죽음의 위기를 맞아야 했다.
1934년에 위중하다는 연락을 받고 온 장남 정묵에게 "독립군이라면 대개 풀밭이나 산 가운데서 남들이 어디서 죽었는지도 알 수 없이 죽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내가 원래 그런 죽음을 소망하였던 바인데 오늘날 이런 곳에서 죽게 되는 것 은 유한으로도 생각된다"라고 말했다. 이처럼 선생에게는 식민지 치하 모든 곳이 전선이었고, 이 전선에 목숨을 던졌음을 말해준다.
겨우 죽음의 고비에서 벗어났던 선생은 1937년 4월 13일 60세의 나이로 서대문 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선생의 마지막은 유언은 "나라 잃은 몸이 무덤은 있어 무엇하겠느냐. 나 죽거든 불살라 강물에 띄워라. 혼이라도 바다를 떠돌면서 왜 적이 망하고 조국이 광복되는 날을 지켜보리라.”라는 것이었다.
선생의 유해는 거둘 사람조차 없다가 만해 한용운 선생이 자신의 거처인 성북동 심우장으로 옮겨 겨우 빈소를 차렸다. 만해는 "유사지추(有事之秋: 비상한 시기)가 도래하면 이 분이 아니고는 대사를 이루지 못한다"는 말로 민족의 미래에 선생의 부재가 초래할 위기를 걱정했다.
이러한 선열들의 희생으로 되찾은 대한민국은 오늘날 여러 면으로 극심한 분열과 갈등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등 바람직한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일송 선생처럼 통합의 정신으로 모든 국민을 아우를 수 있는 '호랑이'가 없는 현실이 한스러울 뿐이다.
그렇게 볼 때 일송 선생이 걸었던 길은 과거의 길이 아니라 이 나라, 이 민족이 걸어야 할 현재의 길이요, 미래의 길이다. 안동 유림가문의 선비였으나 나라가 위기에 빠지자 서슴없이 신학문을 받아들이고, 만주로 망명한 후에는 시종일관 민족통합운동의 길을 걸었다. 또한 선생이 일관되게 걸었던 항일무장투쟁의 길은 현재 우크라이나 사태에서 보듯이 튼튼한 국방이 한 나라와 한 민족의 자존 을 지키는 기본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선생이 우리 민족의 사표이자 큰 어른으 로 되살아날 때 퇴락한 우리 사회의 정신도 다시 살아날 것이다. 우리들은 이를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박찬화 기자 multikorean@hanmail.net
<저작권자 © 한韓문화타임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문국’ 망령의 부활인가… 남원문화원은 누구를 위한 역사를 가르치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