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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의 호랑이 일송 김동삼 선생 연표

김동삼 선생기념사업회(회장 김경한)는 13일 오후 3시부터 서울 효창동 백범기념관 컨벤션홀에서 ‘일송 김동삼 선생 85주기 추도식 겸 기념사업회 발족식’을 거행했다.

이 자리에 김동삼 선생의 연표가 정리되어서 배포되었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일송 김동삼 선생 연표

(김병기 전 광복회 학술원장 작성)

1878년 6월 23일 경북 안동시 임하면 천전리 내앞마을에서 부친 김경락과 모친 영해신씨의 2남 1녀 가운데 맏아들로 태어나다. 본관은 의성, 본명은 김긍식, 이명은 김종식, 자는 한경, 호는 일송 집안의 가학을 이어 받고, 한말 안동 최고의 지도자였던 서산 김흥락으로부터 학문을 배우다." 광산김씨 김노창의 딸과 혼인, 장녀 태어남. 첫 부인의 죽음으로 반남박씨 박순부와 재혼하다. 

1905년 동산 류인식에 영향을 받아 20대 중반 서울을 오가며 민족문제와 서양 문물에 눈을 뜨다." 장남 정묵 태어나다.

1907년 류인식, 김후병 등과 함께 신식교육기관인 협동학교를 안동에 세우는데 앞장서고, 1911년 까지 교사 및 교감으로 활동하다. 

1909년 신민회, 대한협회 안동지회, 대동청년단에 가입하여 활동하다. 만주에 독립군 기지를 세우는 일을 논의하다 1910년 가을 김효락의 맏아들 김만식과 독립군 기지로 마땅한 땅을 찾고자 만주일대를 조사하고 돌아오다. 

1911년 3월 30일 협동학교 제1회 졸업식 참가, 이후 만주로 망명하다. 4월 유하현 삼원포에서 결성된 경학사의 조직과 선전을 담당하다.

1912년 부민단에 참여하다. 차남 용묵 출생. 

1913년 이름을 김긍식에서 김동삼으로 바꾸다.

1915년 비밀 군영인 백서농장을 세우고 장주로 활동하다. 동생 김동만이 김동삼과 자신의 가족들을 이끌고 만주로 망명하다.

1916년 시사연구회를 조직하고 강원도와 경상도 지역의 정보수집 책임자를 맡다.

1919년 3월 11일 발표된 대한독립선언서」대표 39명에 포함되었다. 3월 12일 삼원포지역 독립선언과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다. 4월 10일~11일 중국 상해에서 열린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회의에 참석 후 남만주로 귀환하다. 백서농장을 해산하고 4월에 조직된 한족회의 서무사장을 맡다. 11월 서로군정서를 조직하고 군사지휘를 총괄하는 참모장을 맡다. 

1920년 10월 청산리전투를 지원하다. 11월 동생 김동만이 일본군의 간도침입 시에 체포되어 순국하다.

1921년 장남 정묵과 이원일의 딸 이해동 혼인하다. 사촌동생 김장식이 북만주로 이동하여 가족을 돌보다. 5월 6일 여준, 이탁 등과 함께 대한민국임시정부 개조를 요구하는 결의서를 작성하여 상해로 보내다. 가을 남만주 액목현에서 서로군정서를 다시 정비하고 법무위원장을 맡다

1922년 1월 남만통일회 참석하고 대한통의부가 결성될 때 교육부장으로 임명하다. 흑룡강성 목단강시 영안현 주가에 정착한 가족들을 만나보다. 8월 조직된 대한통의부총장으로 선임되고 중앙행정위원회 의장이 되다. 대한민국임시정부 교통총장에 지명되었으나 응하지 않다.  12월 국민대표회의 참석을 위해 서로군정서 대표로 상해에 도착. 막내 딸 영애 출생하다. 

1923년 1월 18일 국민대표회의 의장으로 선출됨. 국민대표회의 군사분과위원으로도 활약하다. 6월 국민대표회의가 결렬되자 의장직을 사임하고 남만주로 귀환하다.

1924년 7월과 8월에 열린 전만통일회의주비회 참가하다. 12월 25일 결성된 정의부 중앙행정위원과 교육분과위원을 맡다. 

1925년 3월 7일 정의부 제1회 중앙행정위원회에서 외무위원장을 맡다.

1926년 10월 10일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선임되다. 11월 정의부 제3회 중앙의회에서 학무위원장 맡다. 다물당 가입하다. 가족들 영안현 주가툰에서 아성현 평방으로 이주하다.

1927년 4월 1일 농민호조사 결성하다. 농민호자사 발기회가 열린 길림성 대동공사에서 일제의 요구를 받은 중국관헌에 의해 김동삼과 안창호를 비롯한 175명이 체포되었다가 석방되다.  3부 통합을 위한 유일당운동 시작되다

1928년 정의부 교육위원장으로 활동하다. 4월 북만주로 신민부를 찾아가 3부 통합의 필요성을 강조하다. 5월 3부 통합 회의에 참석. 반석현에서 열린 회의에서 집행위원으로 선출되다. 유일당의 조직 방법 문제로 정의부를 탈퇴하다. 여름 아성현 채가구에서 맏며느리와 첫 손자 장생을 만나다. 9월 길림성 신안에서 다시 3부 통합 시도하다. 12월 하순 길림성에서 혁신의회 조직 혁신의회 의장과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다.

1929년 민족유일독립당재만책진회 조직하다. 남북만주족총연합회 동맹 조직에 한족총연합회 회장으로 참여하다. 재만농민동맹 가입하다. 12월 20일 열린 재만농민동맹열성자대회 참가하다. 조선공산당재건설준비위원회 만주부와 재만한인반제국주의 동맹 참여하다. 

1930년 3월 전만한인 반제국주의대동맹 창립주비회 집행위원으로 활동하다. 7월 한국독립당 건설에 참여하다. 10월 10일 중국 동북변방 부사령관 장작상을 만나다. 

1931년 10월 5일 오전 11시 하얼빈 도의 십육도가에서 이원일과 함께 체포되어 하얼빈 주재 일본총영사관 유치장에 구금되다. 유치장에서 단식투쟁 전개하다. 10월 8일 일제가 가족들을 동원하여 회유하기 시작하다. 신의주지방법원으로 이감하기 직전 가족들을 면회하다. 11월 9일 신의주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송치되다. 11월 가족들 하얼빈 시내로 이주하다.

1932년 12월 23일 열린 공판에서 검찰이 무기징역 구형하다. 12월 26일 1심에서 10년 징역형 선고하다. 

1933년 1월 23일 평양형무소로 이감되다. 3월 4일 평양복심법원에서 10년 징역형을 선고하다. 3월 말 서울 서대문형무소로 이감되다. 가족들이 찍어 보내온 가족사진을 받아보다. 

1934년 1월 병이 악화되어 맏아들 정묵이 하얼빈에서 도착하다. 가족들이 취원창으로 이주하다. 

1937년 4월 13일 만 59세로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다. 인사동 경일여관에 호상소를 만들고 문상객을 맞았다. 만해 한용운이 주선하여 성북동 심우장으로 유해를 옮기고 5일장으로 모시다. 유언에 따라 유골을 한강에 뿌리다.

박찬화 기자  multikorea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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