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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성관의 『우리 역사 현장 답사기』 ④열하일기의 현장

허성관 미사협 상임대표의 2016년 중국을 다녀오며 쓴, 우리역사 현장 답사기를 7회에 걸쳐서  연재합니다

2016년 8월 1일(월), 8월 2일(화) 개봉 → 정주 → 북경 → 고북구 → 승덕


■ 열하 피서산장은 청나라 마지막 방어 거점이었을 것

어제 개봉에서 하루를 묵은 후 개봉시내를 둘러 보았다. 포청천으로 우리나라에서 유명한 개봉부 앞에는 포청천을 기념하는 행사가 매일 열리고 있었는데 별로 감동이 없다. 개봉부 안에는 여러 건물이 있고, 주 건물 앞에는 송나라 시대 훌륭했던 사람들 행적을 적어 놓았지만 좀 어울리지 않는다. 그렇게 훌륭했던 기라성 같은 사람들이 무얼 했기에 금(金 1115-1234)나라에게 서기 1127년에 이 곳 개봉을 합략당하고 황제와 2천여명이 포로로 잡혀 국내성으로 끌려갔으니 말이다. 맑은 마음을 뜻하는 청심(淸心)이 나라를 다스리는 치국(治國)의 근본이라고 청심루라는 멋진 누각을 개봉부 안에 세워놓았다.

옛 북송의 수도 개봉부 청심루

특히 소동파( 1036-1101)에 관한 설명이 여기저기 있는데 이 사람은 당송8대가의 한사람으로서 당시 뛰어난 지식인이었다. 그러나 고려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다. 고려가 송나라와의 무역에서 지속적으로 흑자를 내자 고려와의 무역이 송나라의 우환이라고 수 차례 황제에게 상소한 사람이다.

송나라의 최 전성기 융성했던 개봉 청명절을 묘사한 청명상하도(淸明上河圖)에 따라 당시 개봉의 모습을 민속촌으로 재현한 청명상하원이 있는데 시간도 촉박하고 입장료도 비싸고 우리 역사와 큰 관련이 없어 답사를 생략하기로 한다.

북경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서둘러 정주로 이동했다. 2013년 산서성 답사를 마치고 귀국하는 비행기를 정주에서 탓는데 그 때 공사 중이던 공항 건물이 완공되어 멋지게 들어서 있었다. 품격이 있는 공항 건물이다. 새삼 급속하게 발전하는 중국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정주는 우리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중국어 선생인 장기기 양의 고향이다.

북경에 좀 늦게 도착했다. 공항에서 멀지 않는 조선인 거리에 있는 동포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북어찜과 된장국이 그야말로 우리 토속음식이었다. 근처 호텔에서 여장을 풀었다. 내일은 서울에서 2진으로 오는 이석연 변호사 손윤 회장과 합류해서 청나라 황제들의 피서산장이 있는 승덕(承德)까지 가야 한다.

북경 비행장에서 북쭉으로 승덕으로 향했다. 승덕 가는 길은 북경 순의구와 밀운현(密云縣)을 거쳐간다. 순의구를 지나는데 고려영(高麗營)이라는 표지판이 나온다. 얼마나 반가운 이름인가! 당나라 태종이 고구려를 침략했을 때 연개소문이 별동대를 보내 당나라 군대를 추격하고 성채를 쌓은 곳이 고려영이라고 알려져 있다. 고구려가 일시적이나마 북경 근처까지 강역을 확장한 증거이다.

승덕시를 흐르는 난하

승덕 가는 고속도로는 이 길 외에 산해관과 당산에서 출발하는 길이 있다. 세 방향의 길이 모두 승덕에서 합류해서 내몽고자치구로 이어진다. 세 갈래 길이 모두 높은 산 계곡을 통과한다. 고대의 길이나 현대의 길이 모두 같은 지역을 지나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승덕은 그야말로 전략적 요충지였음을 알겠다.

서기 53년 봄 고구려 모본왕(慕本王)이 군대를 보내 후한(後漢)의 북평 어양 상곡 태원을 습격했는데 지금 지나가고 있는 밀운현이 바로 어양(漁陽)이었다. 고구려 개마무사들이 말 달리던 길을 지금 지나가고 있는 것이다. 이 기록은 우리 『삼국사기』와 중국 정사인 『후한서』 <광무제>조에도 나와 있는데 우리 매국식민사학자들은 믿지 않고 있다. 고구려가 어양은 물론 지금 산서성 성도인 태원까지 공격했으니 고구려의 중심세력이 압록강 북쪽이 아닌 훨씬 서쪽에 있었을 수밖에 없다. 뿐만 아니라 모본왕 공격 후 7년이 지난 서기 60년 태조왕은 요서에 10개의 성을 쌓았는데 점령한 지역을 안정적으로 통치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고구려의 강역이 요하를 넘어 지금의 하북성에까지 걸쳐 있었음이 확실하다.

멀리 산들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곧 좌우로 높은 산들이 나타나고 버스는 골짜기 길로 접어든다. 연산산맥(燕山山脈) 시작이다. 고대나 현대나 산과 강이 국경이 되는 것은 자연스런 현상이다. 이 산맥도 고대에는 동이족과 한족 국경이었을 것이다. 계곡이 조금 넓은 곳에는 옥수수와 해바라기가 심었고, 조금 높은 지대는 과수원이다. 산으로 가로막힌 곳은 터널로 연결되어 있다. 북경까지 이 길로 군대를 진격시키기에는 적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고북구 아래 마을과 최근에 세운 것으로 보이는 관문. 사진에 보이지는 않으나 양쪽 산 능선으로 장성이 연결되어 있다.

북경에서 승덕까지가 대략 270km인데 계곡길을 한참 가자 산 능선에 장성이 보이기 시작한다.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선생의 열하일기(熱河日記)에 나오는 고북구(古北口) 장성이다. 연암은 1780년 청나라 건륭제의 70회 생일 축하 사절 일원으로 승덕에 가면서 이 길을 지났다. 열하일기에는 ‘밤에 고북구를 출발하다(夜出古北口)’는 글이 있는데 명문으로 알려져 있지만 한문이 부족한 필자는 그 느낌을 헤아리기 어렵다.

고북구 장성 입구

연암은 지금 우리가 가고 있는 고속도로가 아닌 고북구 장성 관문을 통과했다. 우리 일행은 묻고 물어 고북구 장성 관문을 찾았다. 관문도 산 능선에 있을 것이므로 더운 날씨에 땀을 좀 흘릴 수밖에 앖겠다고 각오했다. 정작 관문 아래 초입을 찾았지만 공사 중이라 출입이 금지다. 주민의 말로는 30분 쯤 걸어 올라가면 관문이라고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산 능선의 장성도 거리가 멀어 사진도 잘 나오지 않는다. 근처 마을 가게에서 먹거리를 좀 사고 가지고 간 즉석 라면으로 점심을 떼웠다.

고북구에서 승덕 가는 길도 골짜기 산길이다. 좁은 계곡 넓은 계곡을 연이어 지나면서 100km 정도 달려 승덕에 도착했다. 승덕시 동 서 북쪽은 산으로 막혀 있고 능선에는 성벽이 쌓여 있다. 남쪽 계곡으로 외부와 이어져 있는 제법 큰 도시다. 말이 피서산장이지 청나라 황제들은 이곳에서 사냥을 통해 대규모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만약에 나라가 무너지는 비상사태가 발생하면 이곳은 청조 최후 방어 거점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북쪽으로 산을 넘으면 중원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표표히 초원으로 돌아갈 수 있는 거점이다. 지금은 북쪽 산에 터널이 뚫려 있다. 관광지여서 그런지 도시가 매우 깔끔하다.

시내 가운데로 강이 흐르는데 난하(灤河) 상류다. 난하는 상고시대 고조선과 한나라의 국경이었다. 물론 난하 하류가 고대사에서 국경 논쟁의 중심인 패수이고, 상류인 이 곳은 연산산맥 동북쪽이므로 아예 한나라는 알지도 못한 고조선 강역이었을 것이다.

승덕시는 현재는 하북성에 속하지만 일제 만주국 시절에는 열하성에 속했다. 대일항쟁기 열하성 그 어느 곳에서 일제 장교로 독립군 토벌에 앞장 선 친일 매국 조선인들이 있었다. 대통령을 지낸 모씨도 열하성에서 중위로 근무했다. 열하성 주둔 일본군에서 탈출하여 걷고 또 걸어 중경의 임시정부를 찿아간 청년들도 있었다. 연암의 열하일기는 아름다운 문학작품이지만 열하성은 열하(熱河)라는 그 이름 뜨거운 강만큼 우리에게 영욕이 교차한 지역이다.

승덕시는 난하를 중심으로 오른쪽은 신시가지이고, 왼쪽은 피서산장이다. 왼쪽도 강에 면한 지역은 상업지역이고 안쪽이 피서산장인데 담으로 구분되어 있다. 피서산장은 열하행궁으로도 알려져 있지만 실상은 청나라 여름 서울이었다. 청나라 황제들은 여름에 이 곳에 머물면서 정사를 보았다. 외국 사신들도 황제를 알현하기 위해서는 이 곳으로 올 수밖에 없었다. 열하일기에는 당시 번성했던 모습이 잘 그려져 있다. 지금은 서울 명동처럼 사람으로 가득하다. 승덕은 중국 10대 관광지의 하나다.

건륭제 독서당

피서산장은 면적이 5.6k㎡, 둘레가 10km로 넓다. 산장안에는 난하 물을 끌여들여 조성한 호수가 있고, 강희제 때 지은 행궁과 건륭제 시기에 지은 독서당이 있다. 나무가 울창하지는 않고, 이름 모를 초원의 거친 풀들이 널려 있다. 기록에는 120 채의 건물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몇 채밖에 없다. 실제 청나라 황제들이 머물던 시기에는 이 산장에 북방 목민들 주거인 천막이 가득했을 것이다. 지금도 몽고식 게르가 몇 개 있다.

산해관을 넘어온 만주 여진족이 대략 30만 명이었다. 이 소수가 광대한 중국을 지배했으니 어찌 어려움이 없었겠는가! 청나라 황제들은 이 어려움을 도덕적으로 모범을 보이고 스스로 근검 절약하는 위민정치를 통해 극복하려 했다. 이런 노력의 결과로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 시대의 태평성대를 열었다. 장구한 중국의 역사에서 100년이 넘는 태평성대는 이 시기를 제와하고는 전무후무하다. 당시 청나라는 세계 최대의 강국이었고, 동 시대였던 프랑스의 루이14세 치적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탁월했다. 특히, 당시 중국에 왔던 예수회 선교사들은 중국의 문물에 감탄했고, 이들을 통해 서양에 전파된 중국사상은 유럽 계몽주의 사상 발전에 밑거름이 되었다.

이 피서산장에서 청나라를 건국한 여진족의 놀랄만한 자제력과 소박함이 느껴진다. 남아 있는 강희제 행궁은 그저 소박한 큼지막한 전각이다. 실내가 화려하지도 않다. 부속 건물이 있었겠지만 지금은 없다. 강희제 손자인 건륭제 때 지은 독서당은 2층 건물이지만 이 역시 위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검소하기 그지 없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상상할 수 있는 황제 전용 건물이라고 생각하기에는 한 참 모자란다. 이런 소박함과 여진족 고유 상무정신을 상실하고 한족문화에 동화되면서 청나라는 쇠락의 길로 들어섰다.

피서산장 밖에는 티베트 포탈라 궁을 본뜬 라마교 사원을 비롯한 여러 사원들이 있다. 우리 일행은 우리 역사와 크게 관련이 없는 이 사원들은 멀리서 바라보기만 했다.

해가 넘어가기 직전이지만 햇볕은 여전히 따가운데 고도가 높아서 북경에 비해서는 온도가 5도 쯤 낮고 습도도 낮아 불쾌하지는 않다. 피서산장 때문에 관리가 엄격해서인지 아름들이 버드나무 가로수가 인상적이다. 국제가일주점(國際假日酒店)에 짐을 풀고 저녁먹으러 나섰다. 예전에 이곳을 답사한 적이 있는 이덕일 박사가 식당을 찾아 나섰다. 청나라 황족 후손이 경영하는 식당이라고 하는데 금방 찾았다.

여진족이 가장 고급으로 여기는 음식이 당나귀 요리인데 있을지 모르겠다. 소박한 답사 여행에 웬 당나귀 요리 타령이냐고 스스로 자책한다. 당나귀 요리는 없었고 대신에 낙타와 사슴 요리가 있었지만 입맛에 맞지 않았다.

 

허성관(許成寬) 전 행정자치부 장관, 현 미사협 상임대표

 

박찬화 기자  multikorea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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