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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성관의 『우리 역사 현장 답사기』 ⑤ 홍산문화 중심지 적봉을 가다

허성관 미사협 상임대표의 2016년 중국을 다녀오며 쓴, 우리역사 현장 답사기를 7회에 걸쳐서  연재합니다

허성관의 2016년 중국 우리 역사 현장 답사기 ⑤

2016년 8월 3일(수) 승덕→적봉(赤峯)

■ 인류 최고(最古) 문명 중심지에 가다

일찍 일어나 잘 정돈되어 있는 난하 강변을 산책했다. 몇 사람이 낚시하고 있는데 잡힌 고기는 피라미 급이다. 상류인데도 수량이 많은 것으로 보아 구간마다 보를 쌓아 물을 가둔 것 같다. 그러나 수질이 나빠보이지는 않는다. 50여년 전 군대에서 익힌 맨손체조로 몸의 긴장을 풀었다. 날씨는 쾌청하고 습도는 낮다. 호텔로 돌아와 간단하게 아침을 먹었다. 오늘은 250km를 달려 적봉으로 가서 삼좌점(三左點) 산성과 홍산(紅山) 유적지를 답사한 후 적봉박물관을 관람하고 자는 일정이다.

승덕시 뒷산 방향으로 길을 잡자 곧장 터널이 나온다. 승덕의 남쪽과 서쪽에서 오는 세 길이 승덕에서 모였다가 이 터널을 통해 내몽고 자치구로 연결된다. 터널을 뚫기 전에는 높은 고개를 넘어야 적봉 쪽으로 연결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런 지형이니 청나라 시기 승덕이 군사적 요충지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지금도 이 곳에는 대대급 군부대가 주둔하고 있다. 터널을 지나자 만주 길림성 장춘(長春) 가는 길이라는 표지판이 나온다. 아마 여기서 장춘까지는 2,000km 정도 될 것이다. 중국 대륙의 광활함을 알겠다. 양쪽으로 높은 산이 계속 이어지고, 우리 일행은 넓어졌다 좁아졌다 하는 계곡 사이로 난 고속도로를 달린다. 연산산맥 속을 지나는 길이다.

고속도로 양쪽의 평지에는 옥수수와 이름 모르는 작물이 따가운 여름 햇살을 받고 있다. 여기저기 묘목을 키우는 밭이다. 산기슭에는 제법 우거진 숲도 드문드문 보인다. 중국 북부는 대부분 황량한 지역인데 국가 차원에서 조림에 열성을 쏟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 그러니 묘목 키우기에 열심이다. 여기도 예와가 아닌 듯 하다.

적봉을 100km 정도 남겨놓고 고속도로 휴게소에 들렸다. 그런데 지명이 부유(富裕)다. 부유, 어쩌면 우리의 고대국가 부여와 관계된 지명이 아닐까? 2년 전 북만주를 답사할 때에도 부유라는 지명이 있었다. 생각해보니 이 지역은 옛날에 고조선이었고, 다음에는 고구려였지만 그 사이에 부여가 있었을 수도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북부여, 동부여, 남부여(백제), 열도부여(일본) 외에 『환단고기』에 의하면 서부여가 있었는데 바로 이 지역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휴게소 화장실은 의외로 깨끗하다.

고속도로 오른쪽 산기슭에 광산이 계속 보인다. 터널을 11개 지나자 갑자기 이 산골에 고층 아파트 단지가 있는 제법 큰 소읍이 나타났다. 이름이 참 아름다운 금산(錦山)이다. 비단을 두른 산이라는 이름이다. 우리나라 남해에도 금산이 있다. 대규모 동광산과 제련소가 있어 형성된 읍인 것 같다. 주위는 유목이 가능한 지역으로 보이는데도 풀을 뜯는 가축은 보이지 않는다. 조금 더 가자 높은 산은 사라지고 얕으막한 구릉들만 보이는 대평원이다.

적봉시 일원의 평원이다. 이 지역은 거란족과 여진족의 주무대였다. 거란족은 요(遙 916-1125)나라를 세워 중원을 호령했다. 여진족은 만주에서 발흥해서 금(金 115-1234)나라를 세워 요나라를 멸망시키고 중원을 장악했는데 이 지역이 주요 근거지 중의 하나였다. 이들이 군사를 진군시켜 중원을 점령한 길이 우리 일행이 지나온 길은 아닐 것이다. 우리가 온 길은 산악지역이고, 당시 물론 터널이 없었기 때문이다. 여진족은 요녕성 조양(朝陽)으로 남하해서 요서 남쪽의 평원으로 진군했거나, 아니면 이 평원 서쪽으로 더 나아가서 산서성 대동(大同) 방향으로 쳐들어갔을 것이다.

삼좌점 산성 뒤 저수지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적봉시 와곽 북쪽 시골길로 삼좌점 산성을 찾았다. 산성은 구릉의 정상 주위에 있는데 지금은 저수지 둑의 일부가 되어 있다. 중국에서는 저수지를 물창고라는 뜻인 수고(水庫)라고 한다. 볕이 따가운 더운 날씨지만 돌무더가 널려 있는 구릉 중간으로 올라갔다. 성을 쌓은 방식이 고구려 식이다. 자연석을 다듬어서 돌의 바깓쪽은 평평하게, 안쪽은 가늘게 만들어 차곡차곡 들여쌓기 방식으로 쌓았다. 우리네 성처럼 방어에 용이한 치(雉)도 남아 있다.

산성은 넓이가 1.4k㎡이고, 석축원형제단, 적석총, 우물, 곡식창고, 회의장소, 주거지 등이 확인되었다고 한다. 치도 13개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 산성은 중국 국가중점유물단위로 지정된 유적이고, 대략 4천년 전 청동기 시대의 하가점하층문화의 대표적인 유지라고 한다. 발굴 초기의 모습이 댐 조성 과정에 상당히 훼손된 것으로 보인다.

삼자점 산성 치 유지

성을 쌓은 방식, 석축원형제단과 적석총의 존재는 이 유적이 한족이 남긴 것이 아니고 우리 동이족의 유적임을 말해주고 있다. 4천년 전이면 고조선 초기이다. 따라서 이 산성을 고조선 산성이라 명명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이 산성 이후 고구려 산성이 나타날 때까지 같은 유형의 산성이 발견되지 않고 있어 우리 강단사학계는 고조선 산성으로 믿을 수 없다고 한다. 이 고조선 산성이 고구려 산성으로 진화했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비록 강단사학계의 논리가 맞다고 해도 없는 것과 발견되지 않은 것은 다른 문제다. 부정하기 전에 치열하게 발로 뛰고 연구하는 것이 먼저다.

그런데 이 먼곳에 이런 산성이 있는 줄 어떻게 알고 답사왔을까? 10년 전 이덕일 소장은 적봉박물관 도록에서 우연히 이 산성을 보았고, 물어물어 이 산성을 답사하고, 또 다른 같은 유형의 산성도 주민들의 안내로 답사했다고 한다. 역사연구에서는 역사서는 물론 현장에서 진실을 볼 수 있다. 고구려 산성에 앞서 2천년 전에 같은 모습의 산성이 하북성 북동쪽 이 곳 내몽고 자치구 적봉시에 있는 줄 어찌 알았겠는가! 이 산성의 존재가 바로 아득한 옛날 고조선이 실제 광활한 지역을 다스린 고대 왕국이었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홍산 입구

적봉시내로 되돌아가 시 와곽에 있는 홍산으로 갔다. 홍산은 듣던대로 붉은산이다. 철분이 많이 함유되어 있는 탓이다. 평지에 돌출한 30여개의 크고 작은 봉우리로 구성된 산덩어리다. 별로 높지는 않다. 약 6,700년부터 4,900년 전 신석기 시대 유적이라고 쓰여 있다. 이 산에서 주거지, 옥기, 비파형동검 등 수많은 유물들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산을 오르자 땀이 비오듯 흐른다. 복원해 놓은 주거지 내부가 지저분하다. 한 주거지 안에는 도교 불교 유교 등의 성인들은 물론 온갖 잡신들 인형을 빼곡하게 진열해 놓았다. 예수상은 없다. 필자의 눈에는 조잡하고 유치하다. 산길에는 언제 것인지 알 수 없는 토기 조각들이 쉽게 눈에 띈다. 중국인 스스로 이곳이 인류 최고 문명 발상지이고, 자신들의 문화라고 주장하면서 이렇게 허술하게 관리하는 이유를 알 수 없다. 꼬박꼬박 입장료는 받으면서.

홍산 표지석

홍산을 중심으로 반경 200km 안 30여 곳에서 관련된 유물들이 대량 출토되었다. 학계에서는 이 유물들을 종합하여 홍산문화(紅山文化)라고 명명했다. 최근 연구 결과에 의하면 홍산문화 시기는 서기전 6,500년(소하서 문화) 까지 올라가기 때문에 인류 최초의 문명인 황화문명의 앙소문화(仰韶文化) 보다 1천년 이상 앞서는 인류 최고(最古)의 문명이다. 중국 학자들은 출토된 유물에 비추어 이 지역에 초기 국가가 출현했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러면 이 문명의 담당 주체는 누구였을까? 이 시기 이 지역에 있었던 국가는 중국 어떤 역사책에도 기록이 없다. 최근 중국은 하상주단대공정에서 하(夏)나라가 서기전 2,070년 경에 성립했다고 특정하고 있으나 이보다 앞선 요(堯)와 순(舜)의 시기는 특정하지 않았다. 아무리 관대하게 보아도 요와 순은 중원의 일부만 차지한 소국이었을 것이고, 이 곳 내몽고 자치구 적봉지역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음은 확실하다. 홍산문화 초기 이 지역에 있었던 국가로 기록에 남아 있는 유알한 국가는 『환단고기』의 ‘배달국’ 뿐이다. 한국의 강단사학자들은 홍산문화가 우리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거품을 무는 수준이지만 삼좌점 산성에서 보았듯이 전혀 관련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현장에 와보니 배달국과 홍산문화와의 관련성은 진지하게 연구해 볼만한 주제다.

인류의 시원문명을 머리와 가슴에에 담고 적봉박물관으로 갔다. 홍산문화 유물은 소략하게 진열되어 있는 느낌이다. 다소 실망이다. 아마도 중요한 홍산문화 유물들은 상급 박물관으로 옮겨진 것으로 보인다. 믿거나 말거나 홍산문화 유물 중 중국이 보유하고 있는 량보다 한국에 있는 량이 더 많다는 말도 떠도는 실정이다. 그런데 당시 악기인 편경 한 조각이 전시되어 있음을 보고 깜짝 놀랬다. 그 시대에 악기가 있었다. 그것도 제례용 악기가 있었다.

비파형 청동검과 화살촉

홍산박물관에는 고조선 표지유물의 하나인 비파형동검도 몇 점 있고, 다양한 옥기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용(龍)이라고 분류한 옥기들이 여럿 있다. 용은 한족의 상징으로 알려저 있는데 동이족의 시원문화인 용이 상징으로 구현되어 있으니 의아하다. 아마도 이 용이 남쪽으로 전파되어 한족의 상징이 된 것인가? 낙빈기(1917-1994) 선생이 중국 청동예기에 쓰인 문자를 분석한 『금문신고(金文新攷)』에 의하면 용은 동이족이 누에를 형상화한 것이라 하니 그 시원이 우리의 유산임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적봉지역이 후일 거란족과 여진족의 중심 지역이어서인지 요, 금, 청나라의 유뭉이 많다. 특히, 요나라의 풍속을 짐작할 수 있는 유물이 많다. 금나라 사람들이 애용하던 정교한 백옥 으로 만든 용봉장식과 동으로 만든 용의 앉은 모습을 조각한 작품은 문외한인 필자가 보기에도 일품이다.

적봉박물관에는 특이하게도 몽골과 청황실의 혼인관계를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어 이채롭다. 청 태조 누루하치는 가장 동쪽에 있던 몽골 호르친(과이심 科爾沁)부와 연합했고, 청 태종은 징기스칸의 후예로서 몽골의 대칸을 배출해온 차하르부로부터 대원(大元)제국의 옥새를 받아 황제로 즉위했다. 그래서 청황제는 몽골의 대칸이면서 동시에 청나라 황제였다. 사실상 청나라는 몽고족과 여진족의 연합정권이었다. 몽고와 청황실은 여기에 더하여 지속적으로 서로 혼인했다. 청황실에 시집온 몽고 공주가 20명, 몽고 귀족에게 시집간 청황실 여자가 40명이라고 적봉박물관에 자세히 설명해 놓았다. 이 몽골 공주 중의 한 사람이 강희제(康熙帝 1654-1722)를 기르고 교육한 할머니 포목포태다. 장구한 중국역사에서 이 할머니는 최고의 황비이고, 손자는 최고의 황제이다.

적봉박물관을 나와 골동품 거리로 향했다. 상점들이 한 건물에 집중되어 있는데 손님이 별로 없고, 더운 여름인 탓으로 분위기가 축 처져 있다. 진열된 물건들이 진품인지 위조품인지 알 수도 없고 특별히 흥미를 끄는 것도 없어 구경만 했다. 10년 전 이덕일 소장은 이곳에서 비파형청동검 거푸집을 제법 고가를 지불하고 샀다고 한다. 거푸집은 주물로 금속제품을 제작하는 틀인다. 거푸집이 있다는 사실은 제품을 자체적으로 대량 생산했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비파형동검은 고조선의 표지유물이고 이곳 적봉에서 대량 생산되고 있었으니 이 지역이 고조선 강역이었을 것이다.

천왕대주점(天王大酒店)에 여장을 풀었다. 근사한 25층 건물이다. 인근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음식이 조금 찌지만 입에 맞았다. 호텔 주변은 고층 빌딩이 즐비한 현대적인 거리다. 그런데 이 멀고먼 내몽고 적봉에 조선족 식당이 있다. 오늘 점심을 먹은 ‘이순길 불고기점’이다.

 

허성관(許成寬) 전 행정자치부장관 현 미사협 상임대표

박찬화 기자  multikorea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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