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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성관의 『우리 역사 현장 답사기』 ⑦ 꼭 봐야할 우리 고대사 현장

<2016년 답사기 마지막 회>
2016년 8월 5일(금) 백이•숙제 유지 → 영평부 고성 → 갈석산 → 천진

- 매국위증사학자들이 꼭 보아야 할 우리 고대사 현장

어제는 매우 힘든 하루였지만 아침에 일찍 일어났다. 식사 전에 산책하려 나왔더니 호텔 옆이 노룡현 현청이다. 현청은 제법 오래된 건물인데 모습은 품위가 있다. 현청 앞이 백이숙제(伯夷叔齊) 꽁원이다. 고죽문화지향(孤竹文化之鄕)이라고 새긴 기념물을 세워놓았는데 제법 멋있다. 고죽국 문화의 고향이라는 뜻인데 이 기념물 앞에 고죽국과 백이숙제의 유래를 설명하는 비석도 있다.
 
백이숙제 고향이라는 표석
노룡현이 엣 고죽국(孤竹國)이며 인의지향 동방덕원(仁義之鄕 東方德源)이라고 비석에 새겨놓았느데 인과 의를 실천한 동방 덕의 근원이라는 뜻이다. 이 표현은 노룡현 사람들의 자부심을 표현한 말인데 백이와 숙제의 고향이 이 곳이고, 인의를 실천한 그들 행적에서 비롯된 말일 것이다. 
백이숙제는 고죽국 9대왕 묵태(墨胎)씨 아들들로 서로 왕위를 양보했을 뿐만 아니라, 주나라 무왕이 아버지 문왕의 장례를 치르지도 않고 상나라를 치려 나서자 “부친이 돌아가셨는데 장례도 치르지 않은 채 전쟁을 일으키려하니 이를 효(孝)라고 말할 수 없고, 신하 된 자로서 군주를 시해하려 하니 이를 인(仁)이라고 말할 수 없다”고 간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에 주나라 백성이 되기를 거부하고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로 연명하다 죽은 사람들이다(『사기(史記)』 <백이열전>). 공자는 이들을 인의에 충실한 현인으로 높이 평가했다.
 
고죽국은 고조선의 제후국이었고, 중국 주(周)나라 무왕이 상(商)나라를 멸망시킨 후 상나라 왕족이었던 기자(箕子)가 봉해져 기자조선이 시작된 곳으로 알려진 곳이다. “상나라가 망한 후 기자가 조선으로 갔다”고만 역사서에 기록되어 있으니 기자가 제후로 봉해졌는지, 망명왔는지, 도망왔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이 곳이 고조선 강역이었다는 사실 자체는 확실하다. 이 기술은 상나라 동쪽에 조선이 있었다는 사실을 반증하기 때문이다.
 
백이숙제가 사용한 우물 표지
백이숙제가 노룡현의 자랑스런 인물들이어서인지 정성을 들여 공원을 관리하고 있다. 그런데 웬 일인가? 무궁화가 여기저기 피어 있다. 우리 국화가 무궁화인지를 노룡현에서 알고 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모르고 가꾸고 있다면 아마도 무궁화가 이 지역에서 오랜 옛날부터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온 꽃이기 때문일 것이다. 무언가 우리 역사의 흔적이 이곳에 남아 있는 증거라고 볼 수도 있겠다.

오늘은 아침 식사 후 노룡현성에 있는 백이숙제의 유적을 찾아본 다음, 60km 떨어진 명나라 시기에 건설된 영평부(永平府) 유지를 답사하고, 다시 60km를 달려 창려현(昌黎縣)에 있는 우리 고대사 서쪽 중요 표지인 갈석산(碣石山)에 올라야 한다. 이어 250km 달려 천진에 가서 자고 내일 인천공항으로 들어간다.
 
청절묘라는 백이숙제 사당 유지 표석
백이숙제 유지를 어렵지 않게 찾았다. 노룡현성 와곽 허름한 동네에 있었다. 야트막한 언덕 위에 단청을 입힌 옛 건물이 눈에 들어 온다. 백이숙제의 사당으로 보였으나 가보니 절이었다. 절 뒤 비탈에 유적이 있었다. 덤불 속에는 여기가 백이숙제의 옛 마을이라는 이제고리(夷齊故里)와 사당인 청절묘(淸節廟)라고 쓴 표석만 있다. 언덕 아래 마을을 둘러보니 쓰레기가 쌓인 세멘트 담벼락 옆에 이제정(夷齊井)이란 표석이 서 있다. 표석만 있을 뿐 아무런 백이숙제 유적이 없다. 이처럼 유적지를 허술하게 관리하는 이유를 알 수 없다. 백이와 숙제가 한족이 아니고 동이족이어서 이럴까?

그런데 연암의 열하일기를 상고해보니 백이숙제의 사당이 다른 곳에 있는 것 같다. 연암은 1780년 음력 7월25일 오늘 오후에 답사할 영평부(永平府)에 도착했고, 백이숙제 사당을 둘러본 후 이제묘기(夷齊廟記)란 글을 남겼다. 이제묘기는 백이숙제 사당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난하 강가에 자그마한 언덕이 있는데, 이를 두고 수양산이라 한다. 산 북쪽으로 조그만 성곽이 있는데 고죽성이라 한다. 뜰에는 고송(古松) 수십 그루가 서 있고, 섬돌에는 흰 돌로 난간을 둘렀다. 가운데에 고현인전(古賢人殿)이라는 이름의 큰 전각이 있다. 전각 안에 곤룡포를 입고 면류관을 쓰고서 홀을 들고 있는 서 있는 이가 바로 백이와 숙제다”

우리 일행이 찾은 이제고리와 연암이 247년 전에 방문한 이제묘의 풍광이 완전히 다르다. 이백년 전던 있던 고현인전 건물이 그 사이에 없어졌다고 해도 그 자취는 남아 있을 것이다. 다음 기회에 연암이 둘러보았던 곳을 찾아 보리라.
 
영평부 설명
영평부에 도착했다. 이 성은 명(明)나라 초기에 건설된 성인데 북경 동쪽의 첫째 가는 부(府)였다고 한다. 내부는 구획이 잘 정리되어 있고, 지금도 사람이 살고 있다. 성의 높이는 3장(丈), 둘레는 9리(里)13보(步)인데 북쪽과 동쪽 성벽은 온전하지 않다. 남문은 무너져 위험하다고 출입금지고, 서문은 누각은 사라지고 온전하게 남아 있는데 문 위에 망경(望京)이라고 써 놓았다. 서울을 바라보는 누각이라는 뜻이다.
 
영평부 서문
영평부는 우리 고대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곳이다.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 이덕일의 지적을 보자

“백암 박은식은 1911년 만주로 망명해 지은 ‘몽배금태조’(夢拜金太祖)에서 “영평부(永平府)는 기자조선의 경계”라고 서술했다. 지금의 하북성 노룡(蘆龍)현 지역인 청나라 영평부가 기자조선 자리라는 것이다. 청나라의 역사지리학자 고조우(顧祖禹)는 역대 지리지를 참고해 편찬한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 ‘영평부’ 조에서 “영평부 북쪽 40리에 조선성이 있는데 한나라 낙랑군 속현이다”라고 했다. 낙랑군 조선현이 영평부 경내에 있었다는 것이다. (중략) 낙랑군 조선현은 평양이 아니라 지금의 하북선 노룡현에 있었다. 사실이 이런데도 아직도 반도사관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한국 고대사학계 일부가 “평양에 낙랑군이 있었다”고 우기니까 중국의 시진핑 주석이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에게 “한국은 중국의 일부였다”고 망언한 것이다. (중략) 중국은 국가 주석까지 나설 정도로 역사 강역 문제를 국시의 하나로 다루고 있다. 우리가 이 문제에 더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국가의 존속 문제로 확대될지 모른다. 역사를 빼앗긴 민족이 훗날 강토까지 빼앗긴 것은 역사에서 많은 사례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서울신문 칼럼 2017년 5월17일).“

매국위증사학자들이 틈나는 대로 노룡현과 갈석산을 찾아 그들 주장의 허구성을 깨닫기를 기대해본다.

10여년 전 이덕일 선생은 이곳을 답사하면서 영평부 북쪽 40리에 있다는 조선성을 찾았지만 거기에서 옛 우물만 확인했다고 한다. 우리 고대사학계의 낙랑이 평양에 있었다는 주장이 억지임을 더욱 확실하게 증명하기 위해서는 시간을 두고 이 지역을 면밀하게 답사할 필요가 있다.

연암은 열하일기에서 영평부 병영 앞에 세운 문에 고지우북평(故地右北平)이라고 써놓은 것을 보았다고 기술했다. 여기가 옛 우북평이라는 것이다. 지금은 병영이 없어져 이 표지도 사라졌다. 중국의 역사서 『후한서』는 서기 53년(모본왕 2년)에 고구려가 우북평 상곡 어양 태원을 공격했다고 썼다. 지금의 하북성까지 고구려의 공격 대상이었던 것이다. 물론 우리 고대사학계는 이 기록을 믿지 않는다.

영평부를 떠나 창려현(昌黎縣) 갈석산(碣石山)으로 향했다. 영평부를 벗어나 청룡하(靑龍河) 다리를 지나 시골길로 계속 달렸다. 사실 청룡하도 우리 고대사에서 논쟁의 대상이다. 위만이 도망치면서 건넌 강이 패수(浿水)인데 패수가 지금의 대동강이라고 매국위증사학자들이 주장하는 반면, 민족사학계는 영정하 청룡하 난하 상건하 등으로 주장하고 있다. 확실한 것은 노룡현이 낙랑군 지역이니 대동강은 위만이 건넌 패수가 될 수 없다.

갈석산이 있는 창려현에 도착하자 도로 주변 화단에 무궁화가 연이어 피어 있다. 갈석산 초입마을 민가 화단에도 무궁화가 피어 있다. 백이숙제 공원에서도 무궁화를 보았지만 이곳 창려현에서 또 우리 나라꽃 무궁화를 보니 감회가 새롭다. 뭔가 우리 역사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갈석산은 평원에 우뚝하게 솟은 바위산이다. 산기슭에 수암사라는 절이 있고, 그 앞은 갈양호라는 저수지다. 저수지 너머는 도시와 마을에 이어 일망무제의 평원이다. 갈석산을 보니 가슴이 쿵쿵거린다. 우리 역사의 핵심 표지 지형물 앞에 서 있는 탓이다. 수암사가 오래된 유명한 절이라고 하지만 둘러볼 생각조차 나지 않고 곧장 갈석산에 올라야겠다는 생각뿐이다.

중국 역사에서 삼국시대를 통일한 사마씨 진(晉)은 통일 기념으로 자신의 강역을 설명한 태강지리지(太康地理志)를 편찬했다. 태강은 진 무제 년간(서기 280-290)의 연호다. 이 지리지에 “낙랑군 수성현에는 갈석산이 있고, 이곳에서 장성이 시작된다(樂浪遂城縣有碣石 長城所起)”로 되어 있다. 이 기록은 낙랑군에 속한 수성현이 여기고, 앞의 독사방여기요의 기록은 노룡현이 낙랑군의 속현인 조선현이라고 했으니 이 지역이 한나라 낙랑군 지역이다. 이 기록만으로도 낙랑군이 평양이라는 매국위증사학자들의 주장은 거짓이다. 그런데 한국역사학계 태두(?)라고 추앙받고 있는 이병도는 북한 황해도의 수안군(遂安郡)의 수(遂)자가 수성현의 수(遂)와 같다고 수안군이 수성현이라고 비정했는데 한마디로 학자로서 양심 불량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필자가 관람한 중국의 모든 박물관은 태두(?)의 설을 존중해서 중국 만리장성이 황해도 수안에서 시작한다고 그려놓았다. 믿지 못하는 분들도 많겠지만 한심한 사실이다.

갈석산은 높이가 695m이고 경사가 급한 바위산이다. 정상은 출입금지이고 8부 능선 정도까지 올라갈 수 있다. 막상 오르려 하니 영감인 필자로서는 더운 날씨에 아득해진다. 조심스레 올라보기로 한다. 땀이 비오듯 흐른다. 쉬엄쉬엄 올랐다. 앞서 간 일행들이 어느 틈에 보이지 않는다. 몇 번을 쉬었는지 기억이 없다. 50분 쯤 늦게 일행들과 합류했다. 모두들 박수로 환영해준다. 갈석산에 오른 한국 사람 중 필자가 아마도 최고령일 것이라고 격려해 준다.
 
갈석산 표지석
중국에는 갈석산이 여럿 있다. 가장 동쪽에 있는 갈석산이 이곳이다. 고조선과 중국과의 국경을 나타내는 표지 지형이 갈석산이므로 중국 입장에서 가장 유리한 갈석산이 이곳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도 별 문제가 없다. 중국 역사에서 9명의 황제가 갈석산에 올랐다. 진시황과 그의 아들 호해, 한무제, 조조, 사마의, 북위의 문성제, 북제의 문선제, 수양제, 당태종이다. 조조와 사마의는 북방을 정벌하고 돌아가는 길에 올랐고, 나머지 황제들은 자신들이 다스리는 나라의 지경을 순시하는 과정에 올랐다. 문성제 수양제 당태종은 선비족이고, 북제의 문선제는 고구려 고씨다.

조조는 갈석산에 올라 ‘관창해 보출하문(觀滄海 步出夏門)’이라는 시를 남겼는데 이 시는 “동으로 갈석에 이르러 푸른 바다를 바라보노라 바다는 어이 이리도 출렁이는가(東臨碣石 以觀滄海 水何澹澹)”로 시작한다. 그런데 갈석산에서 바다가 잘 보이지 않는다. 미세먼지 탓인 듯 하다. 갈석산에서 해안까지가 15km라고 자료에 나와 있는데 바다가 잘 보이지 않으니 조조의 시흥이 느껴지지 않는다. 어쩌면 고대에는 해안선이 더 가까웠을지도 모른다.
 
갈석산과 수암사
갈석산이 있는 이곳의 행정구역은 송나라 때 수성현에서 창려(昌黎)현으로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당송8대가의 한사람으로 뛰어난 시인이자 『원도(原道)』를 써서 유학의 위상을 높인 한유(韓愈, 768-824) 호가 창려인데 그의 조상들 고향이 이곳이어서 그의 호를 따서 현의 이름으로 삼은 것이다. 지명에 훌륭한 사람의 이름을 붙이는 관습이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갈석산을 떠나 천진으로 가는 길은 250km 정도다. 논, 새우 양식장, 염전 등이 보이더니 곧 장 어두워진다. 천진에서 자고 내일 인천공항으로 한국에 돌아간다
 
허성관(許成寬) 전 행정자치부장관 현 미사협 상임대표
 
 

박찬화 기자  multikorea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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