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일본은 끝까지 악마를 택했다
2. 우키시마호는 어떻게 침몰했나
3. 나는 우키시마호를 알고 있다
4. 한·일 정부는 해원(解寃)에 나서라
5. 오늘 우리는 역사에 탄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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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미래는 어디로 흘러가는가? 최근 인류에게 넘치는 물질적 풍요를 선사해준 자본주의가 종언을 고하고 있다. 또 4차 산업혁명이 인류의 미래를 혁명적으로 바꿔놓으리란 예측들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하지만 그 이후에 대해선 누구도 속 시원한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큰 변화의 목에 다다른 것만은 분명한데 미래의 실체를 구체적으로 묘사할 수가 없는 것이다. 다만 세계의 지성들은 야만과 불의의 시대를 넘어 정의와 평화공존의 시대가 올 거라는 데 대해선 대체로 공감하는 분위기다. 정의, 상생공존이 이른 시일 안에 세계 보편 패러다임으로 자리 잡기는 요원해 보이는 것 또한 현실이다.
그동안 한국정부는 1965년 한일협정이라는 원죄 아닌 원죄 때문에 일제 강점기 피해에 대해 제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아니 그동안 그럴 생각 자체가 별로 없었다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촛불혁명 이후 문재인 정부는 국민적 여망을 안고 구석구석 쌓여온 ‘적폐’ 청산에 나섰다. 아니 뒤틀린 ‘역사바로잡기’ 또는 ‘해원굿’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우키시마호사건 진상규명회와 유족, 관련단체 등은 이런 문재인 정부의 행보에서 72년간 이어온 좌절의 벽을 넘어설 희망의 싹을 보았다. 이에 그들은 지난 9월 13일 역사에 탄원하는 절박한 심정을 담아 ‘구국실천국민연합’ 명의의 탄원서를 청와대에 제출했다. 다음은 탄원서 전문이다.
탄 원 서
―《우키시마호폭침사건》실질적인 해결을 탄원합니다 ―
◇탄원하는 취지와 내용
존경하는 대통령님!
국가 민주 발전과 민족 궁극 염원인 조국평화통일을 실현하시려 늘 노고가 많으심에 감사드립니다.
지난 70년의 역사를 뭐라 탓할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정부와 우리 민족이 꼭 해결했어야 할 일이 아직도 역사의 한 모퉁이에서 그 통탄스러움을 잊지 못하고 있지만 지난 정부 그 어느 정권도 이런 민족문제에 단 한발자국도 접근하지 않았음을 지적합니다. 그리하여 이번 문재인 정부는 1945년 8월24일 우리 국민 귀국선이었던 우키시마호가 일본 교토부 마이즈루만에서 폭파 침몰당하여 7천명 이상이 수장된 사건을 실질적으로 해결하는데 정면에 나서야한다는 부탁의 말씀을 드리고자 함입니다.
우리 민족에게 그 어느 것 보다도 중요한 과제는 일제가 저지른 한일강제병합 체결을 무효로 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우리 국민을 고문, 치사, 학살, 대량학살한 점에 대해 일본 정부한테 그 진상을 규명하고 사죄와 보상을 요구하여 민족의 자존심과 명예를 회복하는 일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러나 가슴이 찢어지다 못해 이제는 녹아내린 일본군위안부(일본군여성성폭행범죄)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있으며, 일본 본토와 동남아시아와 태평양전선으로 강제 연행되어 사망한 우리 국민, 독립운동으로 조국과 민족에 목숨을 바친 만주독립투사들의 유해들 그리고 일제의 패망 직후 사할린에서부터 일본 본토에 이르기까지 일본 군인에 의해 집단학살당한 우리 국민들이 70년이 지나도록 조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비통한 역사의 뒤안길에서 서성대고 있습니다. 이들 수많은 고혼 앞에 머리 숙여 삼가 명복을 빌며 지상 최대 해난사고인 《우키시마호폭침사건》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일제가 도발한 태평양전쟁 당시 수백만의 한국인이 일본의 본토와 만주, 시베리아, 북해도, 사할린, 치시마, 캄차카반도, 남태평양전선으로 강제 연행되어 일제의 전쟁 수행 수단으로 이용당했습니다. 그 가운데 본 우키시마호폭침진상규명회에서는 일본 본토의 최북단인 아오모리현 시모키타반도의 군사시설 공사장에서 그야말로 참혹한 노예적 노동에 시달리다가 해방을 맞은 한국인들이 적어도 1만여 명이 있었던 바 이들의 비극적인 생애에 대한 문제를 실질적으로 해결하는데 도움이 되고자 지난 25년 동안 일본 현지조사와 생존자 증언조사와 학자들의 토론 그리고 우키시마호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평양토론회 등의 활동을 진행해 왔습니다.
일본이 카이로회담과 포츠담선언을 수락하고 항복한 1945년 8월15일 정오를 기점으로 1914년 1차세계대전 때부터 탈취 또는 점령한 타국의 영토는 일체 박탈되었고 폭력과 탐욕으로 약탈한 다른 일체의 지역에서도 구축(驅逐)된 것이므로 전쟁시기가 아닌 평화시기에 발생한 우키시마호폭침 한국인 학살은 대본영의 군사적 조치에 따라 일본 해군이 의도적으로 획책한 외국양민계획적대량학살입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우키시마호폭침사건》은 1945년 8월15일 그 후에 일어난 사건이라는 점입니다. 일본은 포츠담선언을 수락하고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하였으므로 전쟁 피해를 원래 상태로 회복해야 할 의무가 주어진 것입니다. 특히 외국인 인권과 생명에 대해서 말입니다. 그 동안 한국과 일본 사이에 과거문제를 정치적으로 완전히 해결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 같은 음모적 모순에 일본정부는 쾌조를 부를지 모르지만 한국 정부는 “굴욕적이었다.”라든가 “친일행각이었다.”는 비난을 아직도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1965년 6월22일 조인한 한일기본조약으로 과거 불법식민통치 문제를 마무리한 것입니다. 불미스런 식민통치관계를 청산하고 국교를 정상화하고자 한 조약을 체결하는 일은 누구든 했어야 할 일이었습니다만 문제는 이 한일기본조약으로 《우키시마호폭침사건》을 해결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하면 한일기본조약은 대한민국과 일본국 사이에 “역사적 식민통치관계를 청산하고 국교를 정상화하기 위한 조약”이었지 식민통치 이후에 발생한 《우키시마호폭침사건》을 해결하고자 한 것은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1976년 12월에 부총리겸 경제기획원장관 남덕우의 이름으로 발행한 “대일청구권자금백서” 에도 1945년 8월15일 이전의 피해사안에 대해서만 청구한 것으로 명시되어 있습니다. 더구나 이것 한일기본조약은 경제에 관한 것이지 인권에 관한 조약이 아닙니다. 만약에 인권에 관한 조약을 이미 체결했다 해도 그 조약으로 피해자의 인권이 회복되지 아니하였다면 모두 무효라는 강제규범이 국제법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1945년 8월15일 이전에 일본이 저지른 강제연행, 강제노동, 일본군이 자행한 여성성폭력, 외국양민학살은 모두 인권문제로 공소시효가 적용되지 아니하기 때문에 지금도 미국과 유럽국가에서 의회 상정과 비준이 가능한 것입니다.
당시 시모키타반도로 강제 연행되었던 우리 동포들은 시모키타반도가 군사요충지였기 때문에 철도, 항만, 비행장, 비행기격납고, 방공호, 터널, 지하탄약고, 지하군수공장들과 같은 군사시설에 투입되었습니다. 먹을거라고는 주먹밥에 청어 한 토막과 오징어 삶은 국물이 전부였습니다. 입을 것도 겨울과 여름을 구별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이러한 비참한 생활을 짧게는 16개월에서 길게는 3년5개월 남짓 동안 북방의 차가운 땅에서 지내야 했습니다. 그러다가 1945년 8월15일 해방을 맞이했는데 이 때 마침 우키시마호라는 배가 남쪽으로 가니 모두들 배에 타라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대본영의 명령에 따른 오미나토해군경비부의 명령이었습니다. 배를 타지 않으면 고국에 돌아갈 수 없을 것이며 남아있는 자에게는 배급도 중지한다는 강압에 시모키타반도 전 지역에 흩어져 일하던 한국인들과 북해도에서 남하하던 한국인들이 모두 우키시마호에 승선하기에 이르렀는데 무려 사흘이 지나서야 승선이 완료되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많은 한국인들을 태운 우키시마호는 부산항으로 안전하게 도착하는 것이 지당한 이치였는데 이 배는 부산항으로 향하지 않고 교토부의 마이즈루만으로 입항하려 뱃머리를 돌렸습니다. 항해 도중 많은 의혹이 난무했고 의심스런 행동을 보이던 해군 승무원들은 우키시마호가 마이즈루만에 정박하자마자 구명보트를 타고 모선을 탈출하였고 배는 곧 폭파되었는데 그 날이 1945년 8월24일 오후 5시20분이었습니다. 저희 우키시마호폭침진상규명회에서 지금까지 조사한 자료와 증언을 분석해 보면 이 사고로 사망한 한국인은 적어도 7천여 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역사 속에서 풍화될 위기에 놓여 있다가 가까스로 세상에 알려진 《우키시마호폭침사건》입니다.
이처럼 귀국선이라 속여 배를 폭파하여 무고한 우리 국민을 집단대량학살하고도 일본 정부가 지금까지 취해 온 자세는 참으로 비정하기 짝이 없습니다. 일본 정부는 사건에 대해 제대로 조사도 하지 않고 미군이 부설한 기뢰에 의한 침몰이라고 주장하면서 사망한 한국인은 5백24명이라고 엉터리로 발표했습니다. 사건 발생 다음날에는 시모사바가의 해안가에 밀려드는 시체를 갈퀴로 긁어모아 밧줄로 줄줄이 엮어 바닷가에 매어 놓았다가 산골짜기에 집단으로 매립했으며, 침몰한 배도 인양하지 않고 9년 뒤에야 인양하면서 역시 산더미 같은 유해들을 또 다시 다이나마이트로 폭사했습니다. 그리하고도 지금까지 진상규명은커녕 피해자에 대한 보상 등의 문제를 아예 거론조차 하지 않고 있으니 어찌 이 같은 일본 정부를 우리가 함께 교류하며 살 수 있는 이웃나라라고 여길 수 있단 말입니까? 이 사건에 대해서 일본 정부는 눈을 꼭 감은 채 귀도 완전히 꽉 틀어막고 있습니다. 더구나 지난 1995년 4월에는 유엔 인권위에서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배상금 지급 결의문을 채택하고자 할 때 금전을 살포하여 결의문이 채택되지 않도록 로비를 일삼았으며 駐제네바 日대표부의 문건 가운데에는 『日정부의 고위당국자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심심한 사과와 후회의 뜻을 표했다』면서 92년 미자와 총리와 93년 고노 관방장관, 94년 무라야마 총리와 서로 떠밀기식으로 배상책임의무를 교묘하게 모면해 가고 있습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일본에게는 『법적 책임』이 없을 뿐 만 아니라 『국제법상 개인은 권리나 의무의 주체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종군위안부 문제 등 대륙침략만행의 핵심은 『사과와 후회』가 아니라 『법적 책임』입니다.
여기서 본회는 종군위안부 문제와 우키시마호폭침사건은 같은 맥락에서 해결되는 것에 무리가 없다고 봅니다만 우키시마호 사건 문제 해결이 종군위안부 문제 해결에 걸림돌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두 사안이 같은 입장에서 해결되기를 원하지만 사건 발생의 시기가 다르다는 점은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즉 우키시마호 폭침 사건은 전쟁시기가 아닌 평화시기에 발생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무고한 우리 국민을 집단으로 학살할 이유가 없었는데도 비인도적이며 반인륜적인 행위를 서슴없이 그야말로 삼광작전을 적용한 것에 대해서는 인권 차원에서 다뤄야 할 문제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또 더 가까이에 있었습니다. 이 《우키시마호폭침사건》과 같은 민족적인 문제를 우리 정부는 1965년 한일협정 당시 사건 자체를 인지하지 못했었으며 그 뒤 60년 동안 어떻게 대처해 왔는지 그 의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잠시 지난 역사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1882년 6월9일 임오군란으로 서대문 밖 청수관의 일본공사관은 소실되고 40여명의 공사관 직원 가운데 13명의 사망자를 낸 채 본국으로 철수한 일이 있었습니다. 임오군란 발생 두 달 뒤인 8월12일 하나부사(花房義質)공사는 육해군 1천2백명을 이끌고 인천에 상륙하여, 조선의 국법을 무시한 채 50명의 호위병을 이끌고 4대문 안으로 진입, 남산 아래 금위대장 이종승의 집에 가(假)공사관을 차렸고, 8월20일에는 남은 병력 1,150명이 현 을지로 입구에 있었던 장악원에 주둔하였습니다. 이들 일본군은 청수관 사고 경위를 따진 다음 같은 해 8월30일 무력적으로 제물포조약을 맺어 임오군란 때 사망한 일본인에 대해 장례비와 위로금과 배상금들의 지급을 약정했습니다. 당시 임오군란으로 사망한 일본인은 13명에 불과했으나 일본 대본영의 명령과 해군들의 항명사건으로 볼 수 있는 《우키시마호폭침사건》으로 사망한 우리 국민은 7천명 이상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일본은 1백25년 전에도 두 달 만에 모든 배상문제를 종결하였는데 우리 정부는 7천명 이상이나 되는 국민의 죽음을 72년이 지나도록 해결하지 못하고 방치하고 있는 큰 문제를 안고 있는 것입니다. 종군위안부 문제 역시 수요집회가 셀 수 없이 진행되는 동안 이를 해결코자 발 벗고 나서는 정치인이 없었습니다. 일본제국주의가 우리 국민에게 저지른 만행이 제대로 해결된 문제가 하나도 없다고 단언하면서 지금까지 정치인이 이 같은 민족문제를 수수방관한 자세는 당장 버려야 나라가 바로 섭니다. 친일잔재는 민족의 가장 큰 적폐입니다.
한일 간에 과거청산 문제가 제기될 때마다 일본 정부는 1965년 한일협정 당시 모두 종결되었다고 큰소리를 칠 때 우리 정부나 국회 측에서는 그 누구 하나 확실하게 반박하는 목소리 한번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일본에 과거청산 요구를 못하는 것은 이미 종결되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는 자세로 밖에 볼 수 없는데 배상금을 받았다면 어디에 어떻게 사용했는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대목입니다.
존경하는 대통령님!
이제 우키시마호가 폭파 침몰 당한지 72년에 접어들었습니다. 17•8세의 어린 나이에 끌려가야 했고 늙은 부모와 어린 처자식을 등 뒤에 두고 강제 연행되어 낯설고 물설은 차가운 땅에서 마음에도 없는 온갖 고초를 다 견뎌내고 살아 돌아오신 분들도 이제 90세가 훨씬 넘어 거의 다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분들은 군사시설 공사장에서 얻은 부상과 지독한 노예적 강제노동조건에서 얻은 질병과 사고 당시 허리가 부러지고, 눈을 다치고, 귀를 다치고 또 폭발충격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평생을 고통으로 살아왔습니다. 또한 사랑하는 처자식을 모두 잃고 그 억울함을 호소 한번 제대로 해 보지 못하고 한평생을 가슴에 못이 박힌 채 살아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생존자와 사망자의 유족들에게는 이 사건이 하루빨리 실질적으로 해결되는 것이 간절한 소망인 바 그 해결의 올바른 방향을 다음과 같이 탄원하오니 부디 정면에 나서서 해결해 주시기 바랍니다.
첫째. 《우키시마호폭침사건》은 일제 대본영이 명령한 군사적 조치로서 우리국민을 섬멸하려 한 의도적•계획적인 제노사이드(Genocide)라는 점으로 일본 정부에 제반 책임을 묻고 피해자가 납득할 수 있는 수준으로 사죄하고 배상하고 유해를 완전하게 봉환하는 것으로 해결해야 합니다. 지난 72년 동안 일본 정부가 관련 자료를 공개하지 아니하여 사건 자체가 베일에 싸여 그 진상을 파악하기에는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해군 승무원들의 증언과 아오모리현 주민들의 증언과 한국인 승선자들의 증언, 본회의 조사 결과 그리고 언론 보도 자료에 따르면 우키시마호폭침사건은 고의적이며 계획적인 사고임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정부는 일본 정부에게 제반 책임을 묻고 배상을 요구해야 합니다.
둘째. 사건 당시의 사망자와 9년 뒤 인양한 유해 그리고 아직도 해저에 있는 유해를 완전하게 송환토록 해야 합니다. 일본 정부는 우키시마호가 침몰한 다음날부터 마이즈루만의 시모사바가 해안가에 밀려드는 시체를 쓰레기 줍듯 수거하여 개인의 신원을 파악하는 일은 하지 않고 집단으로 산골짜기에 매립하였으며 9년 뒤에 인양한 유해들도 마찬가지로 신원을 파악한다거나 한국정부에 인도하지 아니하고 집단으로 매립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당시 사망한 우리 국민들의 유해를 모두 찾아 완전하게 송환해야 합니다. 더욱 세심하게 살펴야 할 점은 것은 《우키시마호폭침사건》 당시 북측의 우리 국민도 사망하였으므로 유해봉환은 남북이 함께 협의하여 결정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셋째. 피해자 모두와 그 유족에게 실질적인 배상금을 지급해야 합니다. 1965년 한일협정 당시에 한국정부는 이 사건 자체를 인지하지 못한 실수를 범했으며 이로 인하여 《우키시마호폭침사건》 해결에 대해서 거론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한일청구권백서에도 피해기간이 1945년 8월15일까지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일본정부는 본 사건의 피해자와 그 유족들에게 그들이 인정하고 납득할 수 있는 실질적인 배상금을 지급해야 합니다.
넷째. 《우키시마호폭침사건》 뿐 만 아니라 태평양전쟁터로 강제연행되어 희생당한 우리 국민 모두를 위한 추모사업을 해야 합니다. 일본으로 하여금 아시아침략전쟁과 태평양전쟁의 잘못을 반성하고 사죄하는 거울이 되도록 모든 피해자들을 위한 추모사업단을 발족하여 그 사업을 시행하는 일은 일본이 아시아에서 침략사죄와 부전결의를 다지게 함으로서 진정한 평화공존의 길을 걷게 하는 순서가 될 것입니다.
특히 최근 일본정부가 주장하고 있는 『법적책임이 없다』는 부분에 대해서는 이미 국제법상 배상해야 할 책임규정이 마련되어 있을 뿐 만 아니라 일본정부의 주장은 유스코겐스 법리에도 맞지 않습니다. 국제법상으로는 인도에 대한 죄, 기본적 인권의 침해, 강제노동 금지조약 위반, 식민지 지배 자체의 불법성, 패전국으로서 카이로선언 수락에 따른 원상회복의 의무, 신의칙상 의무와 조리상 의무들과 같은 범죄와 위반을 근거로, 비인도적이며 반인륜적인 전쟁범죄 행위라고 단정할 수 있으므로 이에 대해서는 세계 어느 나라에서라도 전범재판소를 열어 재판할 수 있는 제도가 있습니다.
뿐 만 아니라 대한민국 국가배상법 제1조에서 16조에 명시된 각 조항과 민법 제750조와 제751조, 제752조 그리고 해상운송법 제780조에서 제842조를 근거로 살펴보면 우키시마호 폭침에 따른 민간인 집단학살 죄는 낱낱이 처벌받게 되어있습니다. 일본국의 국법 또한 대한민국의 국법과 크게 다를 것이 없을 것입니다.
또한 유엔총회는 1968.11.28 「전쟁범죄와 인도에 대한 죄의 시효부적용에 대한 협약」을 채택(1970.11.11 발효)하였고 1974.01.25. 유럽이사회는 「인도에 대한 죄와 전쟁범죄와 인도에 관한 죄」에 대하여 공소시효를 폐지하는 입법조치를 하였습니다. 따라서 일본이 진정으로 한국 식민지 지배와 대륙침략만행을 뉘우치고 사죄한다면 독일처럼 스스로 시효배제를 내용으로 하는 입법을 제정하고 피해를 보상하고자 노력해야 할 것이며 반면 피해국은 이를 요구해야 합니다.
이제 이 탄원서에 연명한 우리 국민은 백두산에 세계평화궁전을 지을 것이며 《국제사법재판 대한민국 원고단》을 결성하여 일본 제국주의를 응징하여 안중근 의사가 주창한대로 동양평화를 달성할 것임을 명백히 밝힙니다.
모름지기 굽은 자 펴주고 쓰러진 자 일으켜주는 것이 정치라 하였습니다. 우키시마호폭침희생자유족회와 이 사건 생존자들 그리고 본 우키시마호폭침진상규명회는 대한민국 정부가 《우키시마호폭침사건》을 실질적으로 해결해 주실 것을 앙망하오며 민족민주시민사회단체의 연명으로 이 탄원서를 제출합니다.
2017. 9.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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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재인 대통령 광복절 축사 장면 (사진=연합뉴스 화면 캡쳐) |
김만섭 기자 kmslove2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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