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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규의 「잊혀진 영웅들」 '이춘상' 편

"전라남도 고흥에 있는 어린 사슴을 닮은 한 섬"

 

1915년 일제 강점기 한센병 환자들을 강제로 수용시켰던 곳이다. 6000명이나 되는 인원이 모여있던 이곳은 한센병 환자들의 고통과 한을 고스란히 품고 있다.

그들은 한센병 환자라는 이유 하나로, 가혹한 학대, 강제 노역 동원, 생체 실험, 정관 수술과 불임 수술, 가족의 동의 없는 시체 해부 등 온갖 종류의 인권 유린이 펼쳐졌다.

소록도 4대 원장으로 부임한 ‘스호 마사키’는 소록도를 세계 최고의 한센병 요양시설로 만들겠다는 욕심에서 환자들을 노예처럼 부렸다. 또한 전시 군수 물자 조달을 위해서 환자들에게 혹독한 노동을 강요했고, 당시 실상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지금 소록도에서는 성한 소나무를 찾아보기 힘들다. 일제시대 소나무에서 추출된 송진은 송탄유라는 이름으로 항공기에 사용됐다.

설상가상 전시체제하에서 줄어든 식량 배급에서 비롯된 굶주림을 견디다 못해 도망치는 환자들이 생겼고, 붙잡힌 사람들은 혹독한 고문으로 불구가 되거나 죽어갔다. 강제로 자식을 낳지 못하도록 단종 수술을 받는 고통을 당하는 등 기본적인 인권마저 유린된 상황에서 자살하는 이들이 생겨났다. 단종이란 생식 능력을 없애는 일을 말한다.

이춘상은 14세 때 한센병이 발병하고 대구에서 2년 동안 치료를 받고 퇴원했다. 그 후 만주로 건너가 마적 생활을 했다고 알려져 있다. 만주에서 돌아온 이춘상은 소록도로 수용되었고 당시 한센인들을 향한 온갖 만행을 지켜보며 스호 마사키 원장을 살해 할 계획을 세웠다.

거사일 1942년 6월 20일.

스호 마사키 원장은 매달 20일 자신의 동상을 향해 수 천명의 한센병 환자들이 참배를 하는 시간을 만들어 운영했고 (이것을 ‘정례보은감사일’ 이라고 불렀다) 그 날 거사를 진행했다.

수 많은 사람들이 지켜 보는 가운데 차 문이 열리고 스호 마사키 원장이 내렸고, 기다렸다는 듯이 이춘상은 스호 마사키를 향해 돌진하며 그의 심장에 식칼을 깊이 찔렀다.

대구 형무소에 수감된 뒤 재판 과정에서 이춘상은 “고통 받고 있는 환우들의 원한을 풀어 주기 위해서 그리고 육지에 사는 일반인들에게 소록도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를 알리기 위해서 스호 마사키를 처단했다”고 증언했다. 재판부는 그에게 사형을 언도했고, 1943년 2월 19일 오후 2시, 당시 27살의 나이로 이춘상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당시 조선 제 1의 흉악범이 안중근이라면, 제2의 흉악범은 이춘상이다 라고 일본 신문은 전했는데, 결국 이춘상은 인권사각지대였던 소록도의 실상을 폭로하고, 환자들에 대한 만행을 중지하라고 강력하게 경고한 것이다. 즉 정의를 위하여 일으킨 의로운 거사, 의거(義擧)다. 하지만 나환자의 아버지로까지 미화했던 스호 원장의 죽음을 일본 언론이 그렇게 받아들일 리 없었다.

일본 언론은 이 엄청난 사건을 한 흉폭한 환자의 우발적 범행으로 몰고 갔다. 그런데 참 웃음이 나오는 것이 일본의 역사왜곡 패턴이 조금도 다르지 않고 똑같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잊혀진 영웅으로 원태우 지사를 알게 되었다. 원태우 지사는 1905년 일제의 을사늑약 강제 체결 후 11월 22일 수원에서 안양을 거쳐 서울로 가는 열차를 탄 이토 히로부미에게 정확히 돌을 집어 던져 유리창을 깨고 이토에게 큰 부상을 입힌 독립투사이다.

(자세한 이야기는 잊혀진 영웅 메뉴 하단에 원태우지사 내용 참조)

그러나 일본은 당시 신문에 무지한 농민이 우발적으로 돌을 던졌다라고 기사를 냈다. 잠시만 이성적으로 생각을 해보자. 달리는 열차가 특정 구간에서 속도가 줄어들고, 정확히 이토가 어느 열차 칸에 타고 있었으며, 그에게 돌을 던져 큰 부상을 정확히 맞출 정도의 연습을 거친 사람이 어떻게 단순한 농민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최소한 어느 독립운동 단체에서 활동하는 투사였다는 것이 훨씬 자연스럽다.

또한 당시 현장을 목격한 사람이 남긴 그림에 원태우 지사는 긴 장검을 허리에 차고 갓과 선비 옷을 입고 있었다고 한다. 대체 어느 농민이 선비 옷에 갓을 쓰고 긴 장검을 허리에 차고 다닌단 말인가? 마찬가지로 이춘상의 의거 역시 신문에 똑 같은 패턴으로 보도되었다.

1930년대 이춘상은 중국에서 마적단 생활을 했고, 당시 우리나라 1930년대 근 현대사를 확인해보면 마적단 활동으로 신분을 숨기고 독립운동을 했던 인물들이 상당수 있다.

또한, 이춘상이 단순 마적단 이었다면 독립운동가 김창숙 선생에게 독립 자금을 제공하고 상해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주러 두 번이나 갔었던 사실은 그가 단순한 마적단이 아니었다는 점을 강하게 시사한다. 결정적으로 당시 이춘상의 아버지 이수봉 선생은 독립운동가였다. 이것은 분명한 자료로 기록되어있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많은 수의 잊혀진 영웅들이 그러하듯 이춘상 본인에 대한 자료가 부족하다. 물증을 찾을 수 없어 정황만 추측할 수 있는 것이 안타깝다. 

확실한 것은 일본에서는 큰 충격으로 여전히 남아 있는 존재가 우리에게는 어떻게 해방을 맞은지 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묻혀져 있었던 것일까 라는 의문이 남는다.

개인적인 소견이지만, 이춘상이 한센병(문둥병) 환자였다는 사실이 크게 작용한 것은 아닌지 생각해본다. 실제로 이춘상은 족보에도 이름이 빠져있을 만큼 당시 한센병이라는 것은 받아들이기 매우 힘든 그 어떤 것이었다. 지금 우리 후손들은 이것을 자유롭게 말하고 생각해볼 수 있지만 오랜 시간 혈연으로 맺어진 사람들에겐 받아들이기 힘든, 혹은 감추고 싶었던 사실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점에는 한센병에 대한 사회적인 오해가 일단 크다는 문제가 있다. 그리고 수 많은 잊혀진 영웅들이 그러하듯, 가진 자들과 힘있는 자들(‘기득권’)의 역사가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 그 중에서도 사회적 약자로 불리었던 자들의 독립운동 이야기는 몇 십 년간 우리나라 교과서와 공무원 시험에서 제외되었다. 이들은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걸었음에도 죽어서도 불평등한 대우를 지금까지 받고 있는 것이다.

한센병 환자에 대한 인권 유린, 친일에 대한 잔재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죄’와 한센병에 대한 ‘무지’가 위대한 독립운동가를 지금까지 국민들로부터 잊혀지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이춘상은 여전히독립유공자로 지정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최근에 아주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유명 소설가 출신 천성래 감독님이 소록도를 영화화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 영화를 통해 잊혀진 영웅을 알리고 이제라도 그 분의 억울함을 풀고 우리가 후손으로서의 예우를 다할 수 있기를 기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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