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단고기〉는 거짓말로 가득 찬 위서(僞書)이며, 그 추종자들은 비합리적이고 호전적이다.”
얼마 전, 시사주간지 『시사IN』에 실린 이문영 작가의 인터뷰 기사는 다시금 역사 논쟁의 불씨를 지폈다. 그가 던진 이 말 한마디는 단순한 비판을 넘어, 한 권의 책과 그 책을 진지하게 읽고자 하는 수많은 시민들의 사유 자체를 조롱하고 억압하는 프레임으로 작동하고 있다. 그의 주장은 언뜻 학문적 논박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깊은 오만과 이중잣대, 그리고 식민사관에 길들여진 기성 담론의 자기보호에 가깝다.
〈환단고기〉가 위서라는 주장은 이미 수십 년 전부터 제기돼 왔다. 그러나 ‘위서’라는 단어 자체가 마치 판결문처럼 휘둘리는 현실은 심각한 지적 게으름과 나태이다. 문헌을 위서로 단정하려면 구성, 문체, 사료 비교, 사상적 연계성 등 다방면의 분석이 따라야 한다. 그렇게 분석해서 나온 결론이 아래의 도표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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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랍지 않은가? 이토록 많은 진서론 논문이 존재한다. 이제는 환단고기에 대해 읽어보지도 않고 가지게 된 편견을 버려야 하는 때다. ![]()
물론 이 이야기를 꺼내면 또다시 익숙한 반론이 돌아온다. “〈환단고기〉 진서론 논문이라는 것들은 세계환단학회니 뇌과학종합교육대학 같은 특수한 곳에서만 다룬다”는 식이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본질은 따로 있다. 논문이라는 것은 발표된 기관의 이름값이 아니라, 그 내용이 해당 사서의 사료적 가치를 어떻게 분석하고 입증하느냐에 따라 평가받아야 한다. 〈환단고기〉 진서론을 다룬 다수의 논문들은 정식 학술지에 등재되어 발표된 연구들이다. 이들은 〈환단고기〉 안에 담긴 역사적, 문헌적, 철학적 가치와 그 연관성을 실증적으로 해석하고 있으며, 그 자체로 무시할 수 없는 의미 있는 성과들이다.
게다가 양적인 측면에서도 이미 이 논문들의 축적은 단순한 비교를 넘어설 만큼 압도적이다.
누가 어떤 시선으로 보든 간에, 학술적 분석과 축적된 연구 성과를 ‘특수한 곳’이라는 이유 하나로 싸잡아 매도하는 태도야말로 반지성적이다. 이제는 편견의 안경을 벗고, 진지하게 읽고 논의해야 할 때다.
하지만 지금까지 〈환단고기〉를 ‘읽지도 않고 비난하는’ 이른바 전문가들의 발언을 보면, 실증적 분석이라기보다 오히려 정치적 구호에 가깝다. 이미 실증적으로 반박된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같은 주장을 되풀이하며 낡은 논리를 반복한다. 그렇다면 그것이 학문인가? 오히려 특정 이념에 기대어 진실을 덮으려는 정치적 구호에 불과하지 않은가.
“팽창주의”라는 낙인의 허구성
〈환단고기〉를 읽은 이들이 모두 호전적이며, 대륙을 되찾자는 전쟁주의자라는 낙인은 무지에서 비롯된 왜곡된 시선이다.
이 책이 중심적으로 강조하는 정신은 ‘홍익인간(弘益人間)’과 ‘재세이화(在世理化)’이며, 이는 명백히 제국주의와는 정반대의 평화적 가치다. 더불어 〈환단고기〉는 ‘구환일통(九桓一統)’의 이념을 통해 세계 모든 사해동포가 하나라는 통합의 정신을 설파한다. 이는 결코 패권주의가 아니라, 인류가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조화로운 삶의 비전을 제시하는 보편적 가치관이다. 꼭 유학의 역사를 총정리한 이기동 교수님의 환단고기에 대한 변을 들고 오지 않아도 누구나 환단고기를 읽으면 알 수 있는 가치관이다.
〈환단고기〉는 오히려 물질문명과 패권주의의 야만성을 성찰하고, 잃어버린 인간 본연의 정신성과 인류 공존의 가치를 회복하자고 호소한다. 홍익인간의 이상을 수많은 독자가 그 속에서 발견했음에도, 이를 부정하고 왜곡하는 태도는 결국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는 편향된 시각에 지나지 않는다.
“유사역사학”이라는 딱지 뒤에 숨은 권력
이문영을 비롯한 일군의 논객들은 〈환단고기〉를 연구하거나 소개하는 이들을 소위 ‘유사역사학자’라는 낙인으로 몰아세운다. 이 낙인은 단순한 비판을 넘어, 연구실에서 쫓아내는 퇴출의 논리가 되고, 출판사와 방송국에서 배제하는 검열의 도구로 작동한다.
오늘날 학계의 폐쇄성은 심각하다. 대학원생들이 〈환단고기〉를 인용하는 것은 금기시되고, 신채호라는 이름만 등장해도 논문 자체를 거부당하는 현실. 한사군의 한반도설에 반하는 요동설이나 요서설 같은 대안적 관점조차 ‘용납 불가’로 치부되며, 논문 심사에서 배제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이런 구조 속에서 과연 한국의 역사학계가 어디로 나아가려는 것인지, 앞날이 참으로 암담할 따름이다.
정작 ‘표현의 자유’를 말하던 이들이, 자신과 다른 목소리는 조롱하고 침묵시키는 이중적 태도를 보인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반(反)지성주의 아닌가.
더 나아가 〈환단고기〉를 연구하는 사람들을 “밈으로 조롱하는 것이 민중의 힘”이라 말하는 태도는 대중을 우습게 보는 엘리트주의의 표본이다. 시민들은 결코 어리석지 않다. 이들이 이 책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한민족은 위대하다’는 단순한 열광 때문이 아니라, 교과서 어디에서도 설명해주지 않는 상고사의 공백을 메우고, 자신이 누구인가를 묻는 정체성의 열망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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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우리 역사의 시작을 ‘환국’으로 보았으며, ‘배달의 민족’, ‘배달민족’, ‘배달족’이라는 표현은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의 입을 통해 끊임없이 외쳐졌다. 그들은 단군기원(檀君紀元)을 사용하며, 단군왕검을 실존의 역사로 믿고 자주적 역사관을 세우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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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오늘날, 정작 그 독립운동가들이 외쳤던 역사 인식과 주장을 전면 부정하고, 단군왕검마저 신화와 허구의 인물로 치부하는 자들이 있다. 심지어 그런 이들이, 다른 한편으로는 언론 지면에서 독립운동가들의 삶을 기리는 칼럼을 쓰고 있으니, 그 이율배반적인 모습에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단기의 연대는 사실상 중요하지 않다. 그것은 신화상의 연대이기 때 문이다. "
- 하룻밤에 익는 한국 고대사 (이문영 저)
소설가 이문영 같은 인물이 대표적이다. 입으로는 독립운동을 기리고, 손으로는 그들이 피와 혼으로 지키려 했던 역사를 부정하는 행태. 과연 우리는 이런 모순된 언행을 언제까지 외면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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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기 BCE 2333년이 마치 조선에서 시작된 것처럼 주장을 펴고 있으나 이미 삼국유사,제왕운기,응제시 등에도 무진년 즉위가 등장하고 있다. 단군기원(檀紀)은 BCE 2333년이고 2025년은 단기 4358년이다. 단기가 명확히 BCE 2333년이라는 환단고기를 무너뜨리기 위해서도 단기가 사라져야 한다. 그래서 지금은 단군 죽이기에서 단기 죽이기까지 하고 있는 것이 학계다.
물론 〈환단고기〉는 완전무결한 정사(正史)도 아니고, 그 어떤 신성불가침의 책도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히, 한국인 스스로 역사의 주체로 서려는 노력의 결과물이자, 잃어버린 뿌리를 찾기 위한 홍범도,오동진,계연수,석주 이상룡과 같은 독립운동가들의 투쟁의 결실이다.
누구나 논쟁할 수 있다. 그러나 낙인찍고 조롱하고 배제하는 방식은 역사를 위하는 척하면서, 사실은 국민의,시민의 생각과 열망을 억압하는 또 다른 ‘검열의 이름’일 뿐이다.
제대로 보지 않고 낙인찍는 자들이야말로, 학문의 탈을 쓴 폭력이며, 사유의 자유를 짓밟는 이 시대의 검열자들이다. 국민의 역사 인식과 주체적 정체성 회복을 ‘유사’라는 딱지로 틀어막는 자들은, 과연 어느 시대의 후예인가?
대한민국은 일제 식민 잔재의 역사가 아니라, 환국,배달,조선의 삼성조 역사에서 시작된 자주적 역사의 계승자이며, 환단고기를 읽는 시민들은 무지한 추종자가 아니라 이 땅의 뿌리를 묻고 되찾으려는 지성의 전사들이다.
역사란 누가 독점하는 것도, 금서로 몰아붙일 수도 없는 것이다.
〈환단고기〉를 그렇게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두려워해야 할 것은, 그것을 ‘읽을 자유’조차 부정하는 당신의 오만이다. 진짜 '유사'는 역사 아닌 척하는 가짜 학문 권력이며, 진짜 위서는 거짓을 진실처럼 반복하는 기성 권위 그 자체다.
이제, 역사의 주도권은 더 이상 몇몇 권위자들의 손에만 맡겨둘 수 없다. 〈환단고기〉를 손에 든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이 바로 이 땅의 역사 복원의 주체이며, 우리의 뿌리를 되찾고, 미래를 새롭게 써 내려갈 진정한 주인공이다.
AI 문명시대, 더 이상 진실은 감출 수 없고, 거짓은 지속될 수 없다. 은폐된 역사, 조작된 기억은 이제 드러나야 한다. 침묵과 왜곡으로는 더는 시대를 속일 수 없다.
잃어버린 뿌리를 되찾는 역사혁명의 시대에 당신과 같은 사람은 혁명의 대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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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문국’ 망령의 부활인가… 남원문화원은 누구를 위한 역사를 가르치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