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박종인 기자는 지난 12월 22일 유튜브 채널을 통해 『환단고기』 태백일사가 위서라고 주장했다. 그는 박상석 교수의 논문을 인용해 '옥진총담(玉塵叢談)'이라는 서적이 실존하지 않는 허구이며, 이태백의 답번서 설화 역시 발해가 아닌 거란이나 토번의 이야기라고 강변했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문헌적 맥락과 역사적 사실을 간과한 단편적인 결론에 불과하다. 이에 대해 몇 가지 명확한 반론을 제기한다.
1. '옥진총담'의 실체와 문헌적 가능성
박종인 기자는 '옥진총담'이라는 책이 동양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으므로 신채호의 착각에 의한 허구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옥진(玉塵)'은 '구슬처럼 맑은 티끌'이라는 뜻으로, 문장이나 시를 미화할 때 흔히 쓰이는 표현이다.
따라서 이태백의 글을 모은 문집 이름이 『옥진총담』이었을 가능성은 충분히 존재한다. 단지 현재 서목이 발견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이를 무조건 '조작'으로 모는 것은 논리적 비약이다. 오히려 『태백일사』의 저자 이맥이 신채호보다 앞서 이 기록을 남겼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신채호가 『태백일사』와 같은 고문헌 텍스트를 참조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2. 거란 주장의 시대적 모순
박상석 교수와 박종인 기자는 당 현종에게 국서를 보낸 주체가 발해가 아니라 거란이나 토번일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이는 역사적 연대와 정면으로 충돌한다.
거란의 연대 불일치: 거란이 독자적인 문자인 '거란 대자'를 만든 시기는 요 태조 야율아보기 재위기인 920년경이다. 반면 국서를 받았다는 당 현종의 재위 기간(756~762)과는 약 170여 년의 시차가 발생한다.
토번과의 관계: 742년 당시 당나라는 토번에 비해 상대적 우위를 점하고 있었기에 국서를 해독하지 못해 위협을 느낄 정도의 상황이 아니었다.
발해의 개연성: 732년 발해 대장 장문휴가 등주를 점령하고, 733년 요서 대산 남쪽에서 당군을 대파하는 등 발해의 국위가 당을 압도했던 역사적 사실이 존재한다. 이러한 군사적 우위를 배경으로 발해가 고유 문자로 국서를 보냈을 개연성이 훨씬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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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발해 고유 문자의 실존 근거
박종인 기자는 발해에 고유 문자가 없었다는 전제를 깔고 있으나, 이는 북한 학계의 연구 성과와 유물 자료를 무시한 처사다.
북한의 연구 : 북한 김일성종합대학은 발해가 한자와는 다른 독자적인 고유 글자를 사용했으며, 이를 다른 나라에 보내는 문서에도 이용했다고 밝혔다.
근거 기록 : 북한 연구진 역시 『옥진총담』 등의 기록을 근거로 제시하며, 732년 장문휴의 공격 당시 당나라가 발해 문서를 해석하지 못해 이태백이 해독했다는 사실을 인용하고 있다.
유물 증거: 청진시 부거리에서 발굴된 '젖갈색 단지'나 발해 시기 기와 등에는 한자와 다른 독특한 형태의 글자가 새겨져 있다. 이는 발해 문자가 이두나 구결의 원리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독자적 체계였음을 입증한다.
4. 결론
거란 문자가 920년에 창제되었음에도 훈민정음과 유사한 정방형 구조를 가진 것은, 거란이 멸망시킨 발해의 문자를 참고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즉, 발해 문자의 존재는 단순히 소설 속 이야기가 아니라 고대 동북아시아 문자사에서 실재했던 흐름이다.
특정 논문의 견해만을 앞세워 실증적인 유물과 문헌 기록을 부정하는 박종인 기자의 위서론은 학문적 엄밀함이 결여되어 있다. 『환단고기』에 수록된 내용은 당대의 정치적 상황과 문자 창제의 역사를 정확히 반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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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백일사의 저자 이맥 선생의 무덤 (출처 : 환단고기 북콘서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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