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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인 기자는 신채호 선생께 공개 사죄해야 한다신채호를 조작의 기점으로 만든 주장에 대한 공개 사과를 요구한다

박종인 기자는 1924년 신채호의 ‘옥진총담’ 언급을 ‘창조’라고 주장하지만, 1930년대 국내(김윤경), 중국 임시정부(이시영), 소련 연해주(계봉우) 등 서로 다른 공간에서 활동하던 학자들이 공통적으로 이 문구를 사용했다는 사실은, 1924년 이전에 이미 이 내용을 담은 『태백일사』와 같은 원천 문헌이 광범위하게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태백일사』를 1924년 이후의 현대 창작물로 모는 해석은, 당시 지식인 사회의 문헌 유통과 네트워크를 무시한 자의적 판단에 가깝다.

1. ‘공통 문헌 전래론’: 신채호 창작이 아닌 공통 저본의 존재

박종인 기자의 주장은 “신채호가 기점이다”라는 가정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이시영의 『감시만어』(1934)나 계봉우의 『조선역사』(1935) 등에서 동일한 표현이 확인된다는 점은, 해당 문구가 신채호 개인의 창작물이 아니라 당시 지식인들 사이에서 공유되던 ‘공통의 원천 문헌(저본)’에서 비롯되었음을 시사한다.

만약 『태백일사』가 신채호의 글을 베낀 것이라면, 이는 이시영이나 계봉우와 같은 당대 최고 수준의 석학들이 불과 10년 전의 신문 기고문을 그대로 옮겨 자신의 역사 저술에 인용했다는 뜻이 된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독립운동가이자 학자로서, 각기 다른 경로를 통해 비기나 고서를 접할 수 있었던 인물들이다.

따라서 ‘옥진총담’이라는 표현은 1924년에 갑자기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이맥의 『태백일사』 원본 혹은 그 저본이 되는 문헌이 이미 항일 지식인 사회에서 비공식적으로 읽히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2. ‘이시영–이맥’ 가문 간 문헌 전승 가능성

특히 이시영의 『감시만어』에서 『태백일사』와 토씨 하나 다르지 않은 ‘이태백전서 옥진총담’이라는 글자가 그대로 등장하는 점은 매우 중요하다.

성재 이시영은 경주 이씨 가문의 후손으로, 집안 대대로 전해지던 방대한 문헌에 접근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태백일사』의 저자 이맥 또한 고성이씨 가문의 인물이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양 가문 사이에서 문헌이 전승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박종인 기자는 『태백일사』를 현대의 조작물로 규정하지만, 이시영과 같은 엄격한 유학자 출신 지식인이 근거 없는 현대 창작물을 자신의 저서에 아무 검증 없이 인용했을 가능성은 극히 낮다. 이는 이시영이 신채호의 글이 아니라, 『태백일사』의 원형이 되는 문헌을 직접 접했을 가능성을 강하게 뒷받침한다.

3. 필사 과정의 변이(王 vs 玉)와 문헌의 역사성

1931년 김윤경이 기록한 ‘왕진총담(王進叢談)’이라는 표기는, 오히려 이 문헌이 오랜 기간 필사되며 전해져 왔음을 보여주는 증거로 볼 수 있다.

‘옥(玉)’과 ‘왕(王)’은 한 획 차이에 불과하며, 고문헌 필사 과정에서 가장 흔히 발생하는 오기 유형이다. 만약 1924년 신채호의 글을 그대로 베껴 1970년대에 『환단고기』를 만들어냈다면, 이런 중간 단계의 오기나 변이가 나타날 이유가 없다.

‘옥진’과 ‘왕진’이라는 표기의 혼용은, 이 문헌이 오랜 세월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필사되며 전승되어 왔다는 전승의 궤적을 보여준다. 이는 『태백일사』가 어느 한 시점에 갑자기 만들어진 조작물이 아니라, 역사적 실체를 가진 문헌임을 방증한다.

4. 계봉우의 연해주 활동과 문헌의 ‘초국가적 유통’

1935년 당시 계봉우는 연해주의 고려사범대학 등에서 교편을 잡으며 『조선역사』를 집필하고 있었다.

1920~30년대 연해주는 일제의 감시를 피해 민족주의 사학자들이 집결한 공간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서울에서 발행된 『동아일보』(1924) 기사 하나가 검열을 뚫고 연해주까지 전달되어, 현지 역사 저술의 공통 용어로 자리 잡았다고 보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다.

오히려 ‘옥진총담, 금고기관’이라는 정보는 국내·만주·연해주에 흩어져 있던 항일 지식인들 사이에서 이미 공유되고 있던 역사 지식이었을 가능성이 훨씬 크다. 즉, 신채호가 1924년에 이를 처음 ‘창조’한 것이 아니라, 이미 전해지던 문헌, 곧 이맥의 『태백일사』 계열 자료를 인용했을 뿐이라는 해석이 더 합리적이다.

종합하면, ‘옥진총담’이라는 문헌 명칭을 신채호가 1924년에 임의로 “창작했다”는 주장은 사료 비평의 영역을 벗어난 무리한 단정이다. 이는 문헌의 동시다발적 등장, 지역을 넘는 전승 양상, 필사 과정에서 나타나는 변이, 그리고 항일 지식인 사회의 실제 문헌 유통 현실을 모두 외면한 주장이다. 더 나아가 이러한 주장은 단순히 『태백일사』를 부정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신채호라는 인물을 근거 없는 ‘조작의 기점’으로 몰아세우는 결과를 낳는다.

신채호는 문헌을 창작해 이름을 붙이는 인물이 아니라, 기존에 전해지던 사료와 기록을 비판적으로 인용하고 해석한 독립운동가이자 역사학자였다. 그에게 ‘문헌 명칭을 지어내는 창작자’라는 오명을 씌우는 것은, 신채호의 학문적 태도와 인격, 그리고 그의 역사 인식을 심각하게 왜곡하는 행위다. 이는 학술적 비판을 넘어, 한 역사학자이자 독립운동가에 대한 명백한 모독에 해당한다.

따라서 신채호가 ‘옥진총담’이라는 문헌 명칭을 창작했다는 주장은 철회되어야 하며, 그러한 주장을 공공연히 유포한 데 대해서는 분명한 사과가 필요하다. 사료를 다루는 최소한의 윤리란, 입증되지 않은 가정을 특정 인물의 책임으로 돌리지 않는 데서 출발한다. 지금 필요한 것은 새로운 낙인이 아니라, 왜 이 문헌이 여러 공간에서 동시에 인용될 수 있었는지에 대한 정직한 재검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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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댓글 5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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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토론 상대가 안 되네. 2026-01-03 15:05:16

    여전히 왕진총담을... 왕진총담은 국사편찬위원회가 잘못 옮긴 것인데, 차마 틀렸다는 말은 못하고 여전히 우기시네요. 옥편을 왕편이라고 읽겠어요. 그리고 그 왕진총담마저도 塵을 進으로, 이것이야 말로 사료 읽는 수준이자 언론사의 품질 아니겠어요?   삭제

    • 월하노인 2025-12-30 15:55:35

      맨날 가능성 가능성 ㅎㅎ   삭제

      • 밥국반찬 2025-12-30 13:34:31

        금고기관은 어따팔아먹었노?   삭제

        • 두터비 2025-12-28 10:11:53

          말같은 소리 하지 마세요
          그당시 최초의 주장자가 신채호라는 것은 팩트이고 신채호의 명성을 빌어 독립운동가들이 우려 먹었을 가능성이 100%이거만 당신도 추론에 추론을 거듭하는 사이비 종교인 같군요 혹시 안경전이 밑에서 배우는 사이비 증산도 교인 아닌가?당신의 주장이 실질적인 역사로 인정받으려면 태백일사 원본을 가지고 오든지 아니면 신채호보다 먼저 주장한 자료를 가지고 오라~가지고 나올리가 있나?그런 역사가 없는데~~   삭제

          • 이형우 2025-12-26 20:49:32

            당시 해외 망명지에서는 국내에서 발행되는 신문을 며칠 뒤에 받아보았습니다. 해와에서 구독하기도 하고, 인편으로도 전달이 되었습니다. 독립운동가들아 남긴 실기에 그러한 사례가 남아 있습니다. 신채호의 글이 실린 동아일보도 당연히 해외에서 유통이 되었습니다.

            과도한 추측과 상상으로 실상에서 멀어지는 건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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