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 조선유교회의 간부 이유립".... "이유립은 친일의 언저리(조선유교회)를 맴돈 인물이다." (이양재, 2026.01.08 통일뉴스)
이유립은 절대로 독립운동가가 아니고, 오히려 친일 의혹이 있는 인물이다. 이유립의 친일 의혹은 친일단체 조선유교회(朝鮮儒敎會)에 가입하고 그 기관지 『일월시보(日月時報)』에 기고를 하는 등 간여한데 있다. (이양재, 2022.08.02 통일뉴스)
물론 이러한 주장은 특정 개인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다수의 이른바 ‘위서론자’들은 『환단고기』를 부정하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수단으로 이유립 선생을 ‘친일 인물’로 규정하려 한다. 역사적 사실에 대한 검증보다 도덕적 낙인을 앞세우는 이 방식이야말로, 대중에게 가장 손쉽게 어필할 수 있는 공격 전략이기 때문이다.
역사는 때로 잔인할 만큼 단선적이다. 특히 해방 후 진행된 친일 청산의 거대한 파도 속에서, ‘어디에 소속되었는가’라는 질문은 ‘무엇을 했는가’라는 질문을 집어삼키곤 했다. 1932년 설립된 ‘조선유교회(朝鮮儒敎會)’가 바로 그 대표적인 피해자다. 총독부의 유림 포섭 정책과 맞물려 탄생했다는 태생적 한계 탓에, 이 단체는 오늘날까지도 계속 매도당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역사의 행간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우리는 전혀 다른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 과연 조선유교회는 일제의 충실한 하수인이었을까? 우리는 식민지라는 질식할 듯한 공간에서 생존과 저항을 위해 몸부림쳤던 유림들의 복잡다단한 전략을 너무 납작하게 재단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제 그 낡은 프레임을 걷어내고, 적진 한복판에 ‘위장된 진지’를 구축하고 싸웠던 항일 투쟁의 역사를 복원해야 할 때다.
회색지대, 생존을 위한 위장
1930년대는 일제의 통치가 소위 ‘문화통치’의 가면을 벗고 ‘민족말살통치’라는 야수의 본색을 드러내던 시기였다.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으로 이어지는 전시 체제 속에서, 지방 사회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유림은 일제에게 반드시 포섭해야 할 대상이자 잠재적 위협이었다.
이러한 암흑기에 명월관 주인 안순환이 주도해 설립한 조선유교회는 일종의 ‘회색지대’였다. 물론 총독부의 용인을 받았다는 점에서 관변적 성격을 완전히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당시 상황을 보자. 국가가 부재한 식민지 현실에서 합법적인 단체 결성은 일제의 감시망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은폐막이었다. 독립운동가들에게 이 조직은 합법적 신분으로 세력을 규합할 수 있는 절실한 ‘활동 공간’이었다.
독립운동가 유학자 해창 송기식 선생
안순환은 유림의 지지를 받는 ‘조선유교회’를 조직하고 녹동서원에서 인재를 가르칠 석학을 팔도에서 찾았는데 유림의 본거지 안동에서 추천받은 인물이 해창 송기식 선생이었다. 해창 송기식 선생은 석주 이상룡, 동산 류인식과 함께 혁신 유림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일제강점기에 외세 압박에 스러져 가는 국운을 회복하고 신학(新學=西學) 조류에 밀려 구학(舊學)으로 내몰리던 유교를 부흥하는 일을 시대 소명으로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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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3·1운동 때 만세운동을 주도하다 붙잡혀 2년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고 교육만이 나라를 구할 수 있다고 믿고 봉양서숙, 인곡서당 등을 건립해 인재 양성에 전념했다. 그뿐만 아니라 신학문을 섭렵해 유교 근본 취지에 충실하고도 시대에 어긋나는 것은 과감하게 혁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유교개혁 사상은 유교 유신론(1921)에 집약되어있다.
조선유교회 명교학원의 1기 졸업식 : 빨간 동그라미가 송기식 선생
해창 송기식 선생은 1932년 녹동서원의 계획에 동참하게 된다. 녹동서원의 명교학원은 수업은 유학적인 내용이 주류였으나 단군전을 지어 단군의 영정을 모셨다. 녹동서원은 1933년 ‘명교(明敎)학원’이란 이름으로 인재 20명을 전국에서 골고루 선발했다. 정식명칭은 '조선유교회강학소'로 1기생 20명과 함께 입교한 이가 바로 이유립 선생이다. 선생은 6개월간 '경학, 유교철학, 문학사, 종교학, 윤리 및 심리학' 등을 배우게 된다. 송기식 선생은 3년후에는 다시 안동으로 내려갔으나 제자 이유립과의 서신 교류는 그후에도 계속 되었다.
[참고 기사] 혁신 유림 송기식과 이유립 선생의 오랜 인연
http://www.hmhtimes.com/news/articleView.html?idxno=6611
이유립과 서신 교류를 했던 송기식 선생. 그는 석주 이상룡과도 계속 서신 교류를 했다.
붓과 돈, 그리고 삐라로 싸운 내부의 전사들
조선유교회 산하 교육기관인 ‘명교학원’과 기관지 《일월시보》는 만주 무장투쟁 세력과 국내 지식인들이 조우하는 접점이었다. 이곳을 거쳐 간 인물들의 면면을 보면 ‘친일’이라는 단어는 무색해진다.
우선 한암당 이유립(李裕岦) 선생을 보자. 1933년 명교학원 입회를 두고 그를 친일로 매도하는 것은 당시 정세를 모르는 처사다. 그는 13세 때 신안동 만세운동에 뛰어들었고, 천마산대의 만주를 오고가는 통신원으로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만주 배달의숙에서 북로군정서의 영웅인 계연수, 최시흥, 오동진에게 직접 배운 ‘준비된 투사’였다. 무장 투쟁이 불가능해진 1930년대, 그는 붓을 들고 적의 심장부로 잠입했다. 그는 《일월시보》 주필로서 량치차오의 《음빙실전집》이나 석주 이상룡의 《대동광의》 같은 민족주의 서적을 은밀히 설파했다. 검열의 칼날 위에서 그가 쓴 글들은 민족의식을 깨우는 죽비였다.
여기에 새롭게 조명해야 할 인물이 바로 이상유(李尙游)다. 본명 이채영인 그는 단순한 유림이 아니었다. 1921년 일제 경찰이 ‘호랑이보다 무서워했다’는 전설적인 무장대 ‘천마산대’의 통신원이 바로 그였다. 총을 들고 만주 벌판을 누비던 소년병은 1930년대에 이르러 교육가로 변신한다. 그는 자신의 전 재산을 털어 ‘신풍학원’을 설립했다. 무장투쟁가가 친일 단체의 간판 뒤에서 민족 교육의 요람을 만든 것이다.

전봉천(全鳳天) 역시 잊어서는 안 될 이름이다. 이유립 선생과 함께 천마산대 통신원 역할을 했던 전봉천은 정의부 제5중대 소속으로 무장 활동을 하다 6년의 옥고를 치른 그는 조선유교회 인맥의 행동대장이었다.

이유립,이상유,전봉천 모두 천마산대의 십대 행동대원이었다. 천마산대만 십대 청소년들이 독립운동한 것은 아니다. 천마산대에서 올라가면 나오는 압록강을 넘어 만주일대에서 1920년대 활동한 대한민국임시정부 직할 참의부 독립군 부대에서 항일무장투쟁을 벌였던 223명의 이름 계급 나이가 기록된 명단 223명 중에는 당시 14세 소년 포함 10대 병사가 39명(17.5%)이나 된다. 5,6명 중에 1명은 청소년이었다.
그리고 이 조직이 단순한 친일 단체가 아니었음은 역설적으로 그 ‘최후’가 증명한다. 조선유교회는 1936년을 기점으로 일제 눈 밖에 나 유명무실해졌고, 일제는 1939년 더욱 강력한 통제력을 지닌 ‘조선유도연합회’를 별도로 창설해 유림을 강제 동원했다. 만약 조선유교회가 일제의 입맛에 딱 맞는 충실한 개였다면, 일제가 굳이 토사구팽하고 새로운 조직을 만들 이유가 없었다. 조선유교회가 버림받았다는 사실 자체가, 그 내부에서 일제의 통제를 거부하는 항일의 기류가 흐르고 있었음을 방증하는 결정적 증거다.

행동으로 증명한 항일의 진정성
말뿐이 아니었다. 이들의 항일은 목숨을 건 실천이었다. 일제 말기, 모든 학교가 신사참배와 창씨개명이라는 광풍 앞에 무릎 꿇을 때, 이유립과 이상유가 이끌던 신풍학원은 끝까지 저항했다. 학생들에게 우리 역사를 가르치고 신사참배를 거부한 대가는 1942년 ‘강제 폐교’였다. 세상 어느 친일파가 자신이 세운 학교가 문을 닫도록 저항한단 말인가. 폐교야말로 이들이 일제가 허용한 선을 넘어 저항했음을 보여주는 가장 확실한 훈장이다.

저항은 해방 직전까지 이어졌다. 1945년 4월, 패망이 짙어지자 이유립과 전봉천은 건국동맹의 비밀 조직원으로 활동하며 <대동아전쟁거부론>이라는 삐라를 살포했다. 전시 상황에서 반전 삐라를 뿌리는 것은 즉결 처형을 각오한 행위다. 결국 이들은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다 광복을 맞았다. 친일파들은 도망갈 구멍을 찾던 그 시각에, 이들은 감옥에서 죽음을 기다리며 싸웠다.

친일의 오명을 벗고, 독립운동의 새로운 지평으로
조선유교회는 겉으로는 순응하는 척했지만, 그 내부는 치열한 독립운동의 전장이었다. 이들은 ‘조선유교회’라는 트로이의 목마 속에 숨어, 붓과 돈, 그리고 삐라를 무기 삼아 일제의 심장부를 겨눴다.
우리는 이제 ‘이유립 친일설’과 같은 단편적인 오해를 거두어야 한다. 이유립은 붓으로, 이상유는 자금과 교육으로, 전봉천은 행동으로, 송기식은 정신적 지주로서 각자의 위치에서 싸웠다. 특히 전 재산을 바쳐 학교를 세우고 폐교를 감내했던 이상유 선생과, 끝까지 무장 투쟁의 기백을 잃지 않았던 전봉천 선생의 공적은 지금이라도 재평가되어야 하며, 서훈 승격이 시급하다.
역사는 승리한 자의 기록만이 아니다. 어둠 속에서 이름 없이 빛나던 별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조선유교회라는 낡은 간판 뒤에 숨겨져 있던 이 치열했던 투쟁기를 복원하는 것은, 단순히 특정 인물의 명예 회복을 넘어 1930~40년대 암흑기 유림 독립운동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일이다. 그들은 친일파가 아니었다. 가장 어두웠던 시대, 가장 지능적이고 처절하게 싸웠던 우리의 독립운동가들이었다.
첨언) 일제강점기 조선유교회 성격에 대한 재검토 정욱재 (독립기념관), 2020.1
이 글은 안순환이 1932년에 설립한 조선유교회의 성격을 재검토한 글이다. 기존 연구는 친일과 반일의 관점에서 지나친 이분법적인 분석을 통하여 각각 조선유교회를 친일단체와 민족운동단체로 규정하였다. 그로 인해 당시 조선유교회가 지녔던 다양하고 역동적인 역사적 실상이 감추어지는 아이러니를 낳았다. 경학원에 참여한 일제협력유림과 조선유교회 명교학원에 참여한 개신유림은 모두 유교를 중시하였지만 그 지향은 매우 달랐다. 전자는 일제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협력 수단의 유교로 전시체제기에 ‘황도유학’으로 연결되었으며 1939년에 결성된 조선유교연합회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후자는 일제에게 협력하지 않았으며 전시체제기에도 조선유도연합회에 참여하지 않고 ‘獨善其身’을 선택하였다. https://www.dbpia.co.kr/journal/articleDetail?nodeId=NODE10657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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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문국’ 망령의 부활인가… 남원문화원은 누구를 위한 역사를 가르치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