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K-culture 역사
해학(海鶴)이 남긴 마지막 문장: 《해학유서》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

해학유서海鶴遺書 (全) 국사편찬위원회 발행 

하드커버 212쪽. 100% 한문...................조선말 실학자·애국계몽운동가 이기(李沂)의 시문집. 아들 낙조(樂祖)가 편집하고, 강동희(姜東曦)·정인보(鄭寅普)가 교열하였다. 1955년 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사료총서》 제3권 활자본으로 간행되었다. 책머리에 정인보의 서문, 책끝에는 강동희의 발문과 신석호(申奭鎬)의 해설이 있다. 

권1 <전제망언(田制妄言)>에서는 토지제도의 문제점과 개혁을, 권2 <급무팔제의(急務八制議)>에서는 국제(國制)·관제(官制) 등 시급히 개혁해야 할 여러 제도를 지적하였다. 권3은 문록, 권4는 소주문(疏奏文), 권5·6은 서간문, 권7은 서(序)·발, 권8은 기, 권9는 전(傳)·잡저, 권10은 부(賦), 권11·12는 시(詩)로 되어 있다. 논지가 일관되고 진보적이며, 조선말 정치·경제·사상·문화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12권 3책. 필사본

해학유서 海鶴遺書 번역본 (김준 번역,1997)

 해학(海鶴) 이기(李沂)의 문집인 《해학유서(海鶴遺書)》를 번역한 김준(金峻, 1925~2004)은 전북 김제 출신의 한학자이자 교육자로  1925년 전북 김제시 부량면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적부터 가학을 통해 한학을 익혔습니다. 평생 한학 연구와 교육에 매진하며 지역 사회의 학문 발전에 기여했다.
1996년 당시 김제문화원장이던 김병학의 간청을 받아 번역을 시작했다. 평소 해학 이기의 실학 정신과 경제구국에 대한 열정을 흠모해왔던 그는 이기의 높은 정신을 대중에게 알리고자 번역에 응했다고 밝힌 바 있다. 주요 업적으로는 1997년 《국역 해학유서》(김제문화원 발행)를 출간하여, 난해한 한문으로 기록된 이기의 사상을 현대인들이 쉽게 접할 수 있도록 했다. 이 번역본은 조선 말기의 정치, 경제, 사회상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사료적 가치를 지닌다

해학유서 역자(譯者)의 서(序)

96년 7월 무더위가 한창인 어느 날, 김제문화원장(金堤文化院長) 김병학 선생(金丙學 先生)이 나를 방문하여 이 책을 보이며 번역을 간청하므로 나는 부족함을 잊고 선뜻 그 청(請)에 응하였다.

그것은 내가 기회가 닿는 대로 이 책을 번역하여 많은 독자(讀者)들에게 해학 선생(海鶴 先生)의 높은 정신(精神)을 알리고 싶은 욕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해학 선생(海鶴 先生)을 흠모(欽慕)한 것은 선생(先生)이 실학(實學)을 바탕으로 경제구국(經濟救國)의 열정(熱情)을 불태운 점이라고 하겠다. 선생(先生)은 일찍 한학(漢學)을 전공한 유사(儒士)로서 영재 이건창(寧齋 李建昌), 매천 황현(梅泉 黃玹), 석정 이정직(石亭 李定稷), 소금 왕사천(素琴 王師天) 등 제선생(諸先生)과 종유하다가 불혹(不惑)의 나이를 지난 후에는 형식(形式)과 모화(慕華), 공리(空理)와 수구(守舊)에 속박되었던 종전의 유사(儒士)와는 달리 새로운 정치(政治), 경제(經濟), 사회(社會), 교육(敎育)을 통하여 민생(民生)을 향상시키고 국력(國力)을 배양(培養)하는 것이 구국(救國)의 첩경이라고 생각한 나머지 전제망언(田制妄言), 급무팔제의(急務八制議) 및 일부벽파론(一部劈破論)을 지어 부당한 제도(制度)의 개혁(改革)을 주장하였고, 또 민중(民衆)의 각성(覺醒)을 촉구하기 위해 호남학보(湖南學報) 및 자강회월보(自强會月報)를 통하여 논설(論說)을 게재하는 한편 고종(高宗)에게 청육이소(請六移疏)를 올려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을 위해 마음을 바로잡으라고 하고, 그후 또 대서(對書)를 올려 미곡(米穀), 삼림(森林), 모피(毛皮), 금은(金銀), 광산(鑛山)이 많은 서북간도(西北墾島)를 사수하여 중흥(中興)의 기틀을 마련하도록 하였으며 윤용선(尹容善), 이도재(李道宰), 이용태(李容泰), 민영기(閔泳綺) 등 정부요인(政府要人)에게도 서한(書翰)을 보내 차관(借款)을 위한 결세(結稅)저당, 탐학인(貪虐人)의 기용, 양병(養兵)에 대한 재정(財政)확보, 일인(日人)의 이민(移民), 국가(國家)의 설방(設防) 등에 관하여 이해득실(利害得失)을 논하고 일본백작(日本伯爵) 대외중신(大隈重信)과 대사(大使) 이등박문(伊藤博文)에게도 서신(書信)을 보내 국교존속(國交存續)의 필요성(必要性)과 협약체결(協約締結)의 부당함을 말하였다.

이 밖에도 선생(先生)은 로일전쟁(露日戰爭)의 발발과 국권(國權)의 침탈(侵奪)된 당시의 사회상(社會相)을 보고 보다 적극적인 현실참여를 위해 전북(全北)의 거유(巨儒)였던 민재 전우(民齋 田愚)의 학문태도를 배척하고, 더욱 모상(母喪)을 당한 후 훼탈쇠마(毁脫衰麻)라는 비난을 받으면서까지 한성사범학교(漢城師範學校)의 교관(敎官)으로 취임하여 후생(後生)을 양성하기도 하였으며 고부(古阜)에 주둔하고 있던 전봉준(全琫準)을 방문하여 민씨일당(閔氏一黨)의 족벌정치(族閥政治)를 타파하려 하였고 또 안동부시찰사(安東府視察使) 이남규(李南珪)의 막료(幕僚)가 되어 의병(義兵)을 진압하기도 하였으며 양지어문(量地御門)의 위원(委員)이 되어 토지(土地)를 측량하기도 하였고 일본(日本)의 침략저의(侵略底意)를 규탄하고 한국(韓國)의 자유(自由)를 호소하기 위해 미국(美國)의 포스머스에서 개최되는 강화회의(講和會議)에 사절(使節)을 보내려고 하였으며 5적(賊)을 제거하려다가 유배생활(流配生活)을 하였고, 자강회(自强會)의 계정수(桂廷壽)와 단학회(檀學會)를 설립하여 민족(民族)의 주체의식(主體意識)을 고취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선생(先生)의 기개(氣槪)는 천지(天地)에 충만(充滿)하고 그 역량(力量)과 경륜(經綸)은 일국(一國)을 다스릴 만 하였으니 어찌 영걸(英傑)의 자질(資質)을 타고나지 않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만일 선생(先生)이 승평시대(昇平時代)에 태어나 수규(首揆)의 위치에 있었다면 국가(國家)의 부강(富强)을 이루어 국기(國基)를 튼튼히 하고 국민(國民)을 편안하게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선생(先生)은 국운(國運)이 비색(否塞)한 때를 만나 그 웅지(雄志)를 펴보지 못하고 불우한 생애(生涯)를 마치셨으니 어찌 후인(後人)으로 하여금 천추(千秋)의 한(恨)을 갖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 이것이 과연 일목(一木)은 대하(大廈)를 지탱하지 못하고 척신(隻身)은 홍류(洪流)를 막을 수 없다는 것일까?

지금 선생(先生)이 작고하신 지 56년이 되었지만 그 늠름한 기풍(氣風)과 고매(高邁)한 정신(精神)은 우리 후인(後人)에게 많은 교훈(敎訓)을 남겼다고 하겠다.

끝으로 동향(同鄕)의 선현(先賢)을 기리기 위해 이 책의 간행(刊行)을 주관하신 김제문화원(金堤文化院)의 김병학 선생(金丙學 先生)에게 다시 한번 경의(敬意)를 표하며 이 책의 번역에 있어 많은 시일을 보냈지만 보다 치밀(緻密)한 검토(檢討)를 하지 못하여 다소 미흡한 점이 없지 않으므로 독자(讀者) 제현(諸賢)의 해량(海諒)과 질정(叱正)이 있기를 바란다.

1997년 1월 30일 관악산(冠岳山) 국사관(國史館) 서창하(西窓下)
역자(譯者) 김준(金濬) 근지(謹識)

 

cf) 계정수(桂廷壽)는 계연수(桂延壽)의 오기다.

 

 

박찬화 전문기자  multikorean@hanmail.net

<저작권자 © 한韓문화타임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박찬화 전문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1개
전체보기
  • 이형우 2026-01-12 17:02:38

    해학 이기 선생을 널리 소개하는 일은 좋은 일입니다. 해학 이기는 유학을 혁신하여 현실을 개혁하자는 논의을 펼친 선구적인 학자입니다.
    하지만 해학 이기 선생을 엮어서 환단고기가 진서임을 주장하기는 불가능합니다.
    <해학유서>에 환단고기 관련 기록이 없습니다. 특히 <태백일사> 관련 기록도 없습니다.
    이기 선생이 계연수에게 자기 집안을 <태백일사>를 전했다는 건 증명할 수 없는 말입니다. 후대에 누군가 지어낸 말로 보입니다   삭제

    여백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