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한일 관계사에서 '임나(任那)'라는 명칭만큼 뜨거운 논쟁의 중심에 서 있는 주제는 드물다. 지난 세기 동안 임나는 한국과 일본의 역사학계 사이에서 단순한 고대 국가의 명칭을 넘어 민족적 자존심과 제국주의적 침략의 정당성을 가르는 리트머스 시험지로 기능해 왔다.
전통적인 일본의 식민 사학은 8세기에 편찬된 《일본서기(日本書紀)》의 기록을 근거로 임나를 한반도 남부의 가야(伽倻) 지역에 비정하며, 고대 야마토 정권이 이 지역을 군사적, 행정적으로 지배했다는 이른바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을 주장해 왔다.1 이러한 관점은 임나를 가야와 동일시함으로써, 임나의 역사를 곧 한반도 피지배의 역사로 치환하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이러한 통설을 근본적으로 뒤흔드는 기록이 존재한다. 구한말의 역사가 창강(滄江) 김택영(金澤榮, 1850~1927)이 1905년에 저술한 역사서 《역사집략(歷史輯略)》에는 기존의 연대기와 지리적 비정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충격적인 한 줄의 기록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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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157년(BCE 157), 임나가 마한에 조공을 하였다(任那貢于馬韓)."
이 기록이 던지는 파장은 실로 거대하다. 통설에 따르면 김수로왕이 금관가야를 건국한 것은 서기 42년의 일이다. 그런데 《역사집략》의 기록은 그보다 약 200년 앞선 기원전 2세기에 이미 '임나'라는 정치체가 존재했음을 명시하고 있다. 더욱이 그 임나는 일본의 식민지가 아니라, 한반도의 마한(馬韓)에 조공을 바치는 복속국(vassal state)으로서 등장한다. 만약 이 기록이 사실이라면, 임나는 가야가 될 수 없으며, 임나일본부설의 시간적, 공간적 전제는 완전히 붕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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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집략》 기록의 사료적 가치와 김택영의 문제의식
창강 김택영과 《역사집략》의 편찬 배경
1905년은 을사늑약이 체결되어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박탈당한 해이자, 일제의 한국 병탄 작업이 노골화되던 시기였다. 이러한 망국의 위기 속에서 김택영은 당대의 대문장가이자 역사가로서, 《역사집략》을 저술하였다. 김택영은 실증적 태도를 견지하여, 근거가 희박한 전설보다는 문헌적 근거가 있는 기록을 중시하는 입장을 취했다.
"어찌 삼한 초기에 임나가 있는가?"
《역사집략》에 수록된 "기원전 157년 임나 조공" 기록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부분은, 기록 그 자체뿐만 아니라 기록을 대하는 저자 김택영의 태도이다. 김택영은 이 기록을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은 의문을 제기한다.
"어찌 삼한 초기에 벌써 임나라는 나라가 있는가? (何以三韓初期 已有任那之國乎)"
이 탄식은 역설적으로 해당 기록의 신빙성을 높여주는 결정적인 증거가 된다. 만약 김택영이 특정 의도를 가지고 역사를 창작하거나 왜곡하려 했다면, 자신의 역사 인식(가야는 서기 1세기 이후에 등장한다는 통념)과 배치되는 기록을 굳이 수록하고 의문을 표할 이유가 없다. 그는 자신이 접한 고대 사료에 '기원전 157년'이라는 명확한 연대와 '임나'라는 국명이 적혀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상식과 충돌함에도 불구하고 이를 충실히 채록한 것이다.
이는 김택영이 참고한 원천 자료가 매우 구체적인 연대기를 포함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기원전 157년'이라는 연도는 막연한 '옛날'이 아니라, 정확히 한나라 문제(文帝) 7년이자 경제(景帝) 원년에 해당하는 해로, 동아시아 연대기에서 검증 가능한 특정 시점이다.
이 기록을 삭제하지 않았다. 이는 그가 참고한 원천 텍스트의 권위가 매우 높았음을 방증한다. 만약 출처가 불분명한 야사(野史)였다면 실증주의적 성향의 김택영은 이를 배제했을 것이다. 그가 이 기록을 살려둔 것은, 그것이 고대 한일 관계의 잃어버린 고리를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단서임을 직감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임나와 가야의 분리
《역사집략》의 기록은 임나와 가야가 별개의 존재임을 웅변한다. 통설대로 임나가 가야라면, 기원전 157년에 가야가 존재했어야 한다. 그러나 이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의 가야 건국 설화와도 배치되며, 고고학적으로도 기원전 2세기에 낙동강 유역에 '임나'라고 불릴만한 강력한 정치체가 형성되었다는 증거는 부족하다.
따라서 논리적인 귀결은 하나다. "기원전 157년의 임나는 한반도의 가야가 아니다.". 이 명제는 기존의 임나일본부설이 전제로 하는 '임나=가야' 도식을 파괴한다. 가야가 건국되기도 전에 임나는 이미 존재했고, 그 임나는 마한에 조공을 바치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 '원초적 임나(Proto-Imna)'는 어디에 있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우리는 시선을 바다로 돌려야 한다.
임나의 비밀을 푸는 열쇠: 《태백일사》와 대마도
그렇다면 기원전 157년에 마한에 조공을 바친 '임나'는 구체적으로 어디인가? 기존 강단 사학계가 외면해 온 문헌들, 특히 《태백일사》는 이 질문에 대해 놀라울 정도로 구체적인 답을 제시한다.
《태백일사》의 <고구려국본기> 등 관련 기록은 임나의 위치와 성격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대마도의 두 섬은 마침내 임나에 의해 통제되었으므로, 이때부터 임나는 대마도 전체를 부르는 이름이 되었다(對馬二島 遂爲任那所制 故自是 任那乃對馬全稱也)."

이 기록은 임나의 정체성에 대한 핵심적인 단서를 제공한다.
임나는 한반도 내륙이 아니라 '대마도'라는 섬이다. 본래 임나는 대마도를 지배하게 된 특정 세력이나 가문의 이름이었으나, 그들이 섬 전체를 장악하면서 섬의 이름으로 굳어졌다.
기원전 157년의 임나는 문화적으로나 혈연적으로 마한과 동질성을 가진 집단이 대마도에 정착하여 세운 해양 정치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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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일용공부약집》의 증언
《공화일용공부약집(空華日用工夫略集)》 은 14세기 일본의 선승 기도 슈신(義堂周信)의 일기이다. 이 문헌은 비록 후대의 것이지만, 중세 일본 지식인들이 대마도를 어떻게 인식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다. 이 시기에도 대마도는 일본 본토와는 구별되는, 한반도와 밀접하게 연관된 경계인들의 땅으로 묘사된다.
대마는 마한을 마주 대하고 있다는 뜻이다 (공화일용공부약집)
《역사집략》이 전해주는 단 한 줄의 문장은, 식민 사학에 의해 굴절된 2천 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우리에게 고대사의 진실을 속삭이고 있다. 임나는 가야가 아니며, 그들은 마한의 바다를 지키는 파수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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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가 마한을 마주 대하고 있다는 뜻은 무엇인가? 대마도에서 바라보이는 곳이 모두 마한이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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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당시에 번한이나 진한이 아니고 마한이 되어야 할까? 그것은 한반도가 마한이고 만주가 진한이고 요서가 번한이라는 대륙삼한, 전삼한이 아니고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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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채호 선생은 후삼한에 앞서 전삼한이 존재했다고 보아 이른바 전·후삼한론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인식은 『환단고기』가 전하는 삼한관경제(三韓管境制)와 정확히 부합한다.
삼한관경제란 단군조선의 강역을 삼수(三數)의 원리에 따라 셋으로 나누어 통치한 제도로, 대단군이 직접 다스리는 진한(辰韓)을 중심으로, 부단군이 각각 마한(馬韓)과 번한(番韓)을 맡아 다스리도록 한 국가 운영 체계를 말한다.
이 가운데 마한은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영역이었기 때문에, 대마도에서 바라본 한반도의 남쪽 역시 마한의 강역에 속한다고 인식되는 것이 자연스럽다.
이러한 구조를 전제로 할 때, 김택영이 기록한 ‘임나가 마한에 조공하였다’는 내용 또한 역사적 맥락 속에서 정확히 성립하게 된다. 삼한관경제라는 상위 질서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설명하기 어려운 대목이지만, 전삼한을 상정할 경우 그 관계는 논리적으로도 무리 없이 연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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