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단고기』의 「단군세기」에는 제13세 흘달 단군 시기에 하나라의 몰락과 은나라(상나라)의 건국 과정에 단군조선 세력이 깊이 개입한 사실이 비교적 상세히 전해진다. 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은나라의 하나라 정벌과 단군조선의 지원
단군세기에 따르면 기원전 1767년경, 즉 흘달 단군 재위 16년 갑오년에 은나라의 탕왕이 하나라를 정벌하자, 하나라의 마지막 군주인 걸왕은 단군조선에 구원을 요청하였다. 이에 흘달 단군은 읍차 말량을 보내 구환(九桓)의 군대를 이끌고 하나라를 돕게 하였다.
단군조선의 군사 지원이 이루어지자 은나라 탕왕은 사신을 보내 사죄하였고, 이에 따라 단군조선군은 일단 철수하였다. 이 시점까지 단군조선은 하나라의 존속을 돕는 입장이었다.
2. 걸왕의 배신과 단군조선의 태도 변화
그러나 이후 하나라 걸왕은 맹약을 어기고 단군조선 군대의 철수로 생긴 공백을 노려 군사를 보내 철군로를 차단하는 등 약속을 파기하려 하였다. 이에 흘달 단군은 하나라에 대한 지원을 철회하고, 은나라 측과 협력하여 걸왕을 정벌하기로 방향을 전환한다.
단군은 신지 우량을 비밀리에 파견하여 견군, 즉 견이의 군대를 이끌고 출병하게 하였고, 이들은 단군조선의 낙랑 세력과 합세하여 관중 지역의 빈과 기 땅을 점령하고 관청을 설치하였다. 이로써 하나라 왕조는 사실상 붕괴되었고, 은나라가 새로운 왕조로 들어서게 된다.
| ①은(殷)나라가 하(夏)나라를 치다 → ②하 걸왕의 구원요청, 흘달단군이 전쟁지원 → ③탕왕(성탕) 사죄 → ④하 걸왕의 조약위반,약속파기 → ⑤단군조가 이번엔 은나라를 도와 하나라를 치다. → ⑥견이와 낙랑이 합쳐 관중의 빈.기(邠.岐)의 땅에 웅거하며 관청 설치 |
이 기록에 따르면 단군조선은 처음에는 하나라를 지원하였으나, 걸왕의 배신 이후에는 은나라를 도와 하나라 멸망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특히 구환과 견이 세력이 관중 지역까지 진출하여 전쟁의 향방을 좌우했다는 점이 강조된다.
3. 중국 고문헌에 나타난 동이 세력의 활약
이러한 단군세기의 서술은 중국의 고대 문헌들과도 놀라울 정도로 맥락이 일치한다.
전한 시대 유향이 편찬한 『설원』 권모편에는 은나라 탕왕과 하나라 걸왕의 대립 과정이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탕왕이 걸왕을 정벌하려 할 때, 이윤은 먼저 조공을 끊어 반응을 살펴볼 것을 건의한다. 조공이 중단되자 걸왕은 크게 분노하여 구이의 연합군을 불러 은나라를 공격하려 하였다.
이에 탕왕은 사죄하고 다시 조공을 바쳤고, 이듬해 다시 조공을 끊었을 때에는 걸왕이 불러들인 구이의 군대가 움직이지 않았다. 이윤은 이때를 적기로 판단하였고, 탕왕은 출병하여 걸왕을 격파하고 그를 남소로 몰아냈다.
| ①성탕 걸왕에게 시비걸다 → ②걸왕이 구이의 군사와 함께 쳐들어오다 → ③성탕 사죄 → ④이듬해 다시 시비걸다 → ⑤구이의 군사 움직이지 않다. → ⑥탕왕 군사를 일으켜 걸왕과 전쟁 승리 |
이 과정은 탕의 도발, 걸왕의 구이 동원, 탕의 사죄, 재차 도발, 구이의 미동, 탕의 공격이라는 여섯 단계로 전개되며, 이는 단군세기에 나타난 하나라 지원 → 철수 → 태도 전환 → 하나라 멸망의 흐름과 구조적으로 매우 유사하다. 즉 동이 세력이 처음에는 하나라 편에 섰다가, 이후 이를 외면함으로써 은나라의 승리를 가능하게 했다는 점이 공통적으로 드러난다.
![]() |
. 『후한서』에 나타난 견이의 서진 기록
후한 시대에 편찬된 『후한서』에도 이 사건을 뒷받침하는 기록이 남아 있다. 동이열전에는 걸왕의 폭정으로 인해 여러 동이 세력이 내침하였고, 이에 은나라 탕왕이 혁명을 일으켜 이를 평정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서강전에는 “하나라 걸왕의 난리에 견이가 빈과 기 사이로 들어와 거주하였고, 성탕이 일어나 출병하여 그들을 몰아냈다”는 구절이 보인다. 이는 단군세기에서 견군이 낙랑 세력과 합세하여 빈·기 지역을 점령했다는 기록과 지리적으로도 정확히 부합한다.
특히 “桀之亂, 畎夷入居邠岐之間”이라는 표현은 하나라 말기에 견이 세력이 관중 지역 깊숙이 진출했음을 분명히 보여주며, 이는 단군조선 계통의 동이 세력이 중원 정세에 직접 개입했음을 중국 정사 자체가 인정하고 있는 사례라 할 수 있다.
![]() |
| 출처 : 환단고기 역주본 (상생출판) |
5. 기록의 일치가 갖는 역사적 의미
이와 같은 교차 검토를 통해 몇 가지 중요한 시사점을 도출할 수 있다.
첫째, 하나라 멸망 과정에서 동이 세력의 역할은 결정적이었다. 전통 중국사에서는 탕왕의 혁명만이 강조되지만, 실제로는 구이·견이 등 동이 세력이 움직이지 않았다면 은나라의 승리는 쉽지 않았음을 문헌들이 보여준다.
둘째, 단군조선의 세력권은 기존에 통설로 인식되어 온 범위를 훨씬 넘어선다. 하나라 말기에 견이로 불린 조선계 세력이 섬서성 빈·기 일대까지 진출했다는 기록은, 단군조선의 영향력이 중원 깊숙이까지 미쳤음을 시사한다.
셋째, 환단고기의 사료적 가치는 이러한 문헌 간 일치를 통해 재검토될 필요가 있다. 단군세기의 하나라 멸망 서사는 한국의 다른 사서에는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중국의 『설원』과 『후한서』라는 독립적 기록과 세부 구조와 지명이 일치한다는 점에서 단순한 창작으로 치부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
결론
단군세기에 전하는 흘달 단군의 하나라–은나라 전쟁 개입은 전설적 서사가 아니라, 중국 고대 문헌과 교차 검증이 가능한 역사적 기록의 성격을 지닌다. 『설원』의 구체적 전개와 『후한서』의 간결한 서술을 종합하면, 동이 세력이 하나라 말기의 국제 정세에 실질적으로 개입하였고, 그 결과 하나라가 멸망하고 은나라가 성립되었다는 역사상이 비교적 선명하게 드러난다.
이러한 문헌 간의 일치는 환단고기가 오랜 사서 전통을 반영한 기록일 가능성을 높이며, 환단고기를 진서로 재평가하려는 논의에 중요한 근거를 제공한다. 단군조선이 동북아 고대 국제 질서의 핵심 행위자였다는 사실은, 이제 우리 기록뿐 아니라 중국의 고문헌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
박찬화 전문기자 multikorean@hanmail.net
<저작권자 © 한韓문화타임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문국’ 망령의 부활인가… 남원문화원은 누구를 위한 역사를 가르치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