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한국 사회에서 역사는 단순한 과거의 기록을 넘어 현재의 정치적, 사상적 지형을 가늠하는 치열한 전장이다. 최근 박종인 기자를 위시한 일부 비평가들이 제기한 한국 근대 민족주의 사학의 기원에 대한 비판은 이러한 역사 전쟁의 최전선에 있다.
그들의 주장은 매우 도발적이다. 단재 신채호, 석주 이상용, 위당 정인보 등 독립운동의 사상적 지주로 추앙받는 민족 사학자들의 역사관이 사실은 청나라 건륭제의 정치 선전물인 『흠정만주원류고』와 일본 제국주의 육군참모본부의 침략용 보고서인 『만주지지』를 무비판적으로 답습하거나 표절한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박 기자는 이를 ‘국뽕 사관’의 시초이자 한국인의 역사 인식을 오도하는 ‘어이없는 시작’이라 강력히 비판한다.
하지만 정밀한 문헌학적 검증에 따르면, 이러한 비판은 텍스트의 표면적 유사성에만 매몰되어 그 이면에 숨겨진 '주체적 재구성'의 맥락을 완전히 놓치고 있다. 민족 사학자들의 문헌 수용은 단순한 표절이 아니라, 식민지 지식인이 제국의 지식 체계를 치열하게 비판적으로 독해하고 항일 투쟁의 무기로 재창조한 전략적 선택이었다.
제국의 도구를 해부하다: 『만주원류고』와 『만주지지』의 실체
비판의 대상이 된 두 텍스트가 순수한 학술서는 아니다. 『만주원류고』는 1777년 청나라 건륭제의 칙명으로 편찬된 관찬 사서로, 소수 만주족이 다수 한족을 지배하는 정통성을 확립하기 위한 역사 공정의 산물이었다.
1889년 발행된 『만주지지』는 일본 제국주의의 대륙 침략 야욕이 투영된 군사 기밀 보고서다. 일본군은 만주 지역의 지형, 도로, 물산 등을 정밀 조사하여 병력 이동과 보급을 위한 병참 정보를 구축했다. 동시에 만주와 조선을 불가분의 관계로 설정하는 ‘만선사관(滿鮮史觀)’의 맹아를 심어놓았다.
박종인 기자는 민족 사학자들이 이러한 ‘오염된 자료’에 의존했다는 점을 들어, 사료 비판의 부재와 지적 게으름, 나아가 사상적 종속을 지적한다.
그러나 민족 사학자들에게 이 텍스트들은 맹신의 대상이 아니라 유용한 ‘지적이며 논리적 도구’였다. 신채호는 중화 사상에 함몰된 유학자들의 사대주의를 깨뜨리기 위해 역설적으로 청나라 황실의 권위를 이용했다. “천하를 지배하는 청 황제조차 자신들의 뿌리가 신라와 백제에 닿아 있다고 고백하는데, 왜 너희는 스스로를 속국으로 낮추는가?”라고 반문하며 역사의 지평을 확장한 것이다. 그는 『만주원류고』의 자료를 가져오되, 만주족을 우리 민족의 가지(Branch)로 보며 “만주족이 우리와 같다면 그 땅 역시 본래 우리의 고토”라는 주체적인 논리를 완성했다.
석주 이상용의 『서사록』 역시 마찬가지다. 1911년 만주에 독립군 기지를 건설해야 했던 그에게 가장 정밀한 지리 데이터는 역설적으로 적국인 일본의 『만주지지』에 있었다. 이상용은 적의 문서를 펴놓고 둔전을 일굴 곳을 찾았으며, 이는 사상적 종속이 아닌 ‘지피지기(知彼知己)의 실용주의’였다. 일본군이 만주를 수탈의 객체로 보았다면, 이상용은 그곳을 임시정부의 행정력이 미치는 ‘제2의 대한민국’이라는 정치적 공간으로 재해석했다.
사상적 독립성과 내발적 근대성
민족 사학의 뿌리는 외부의 아류가 아니라 한국 사상사 내부에서 깊게 길어 올린 것이다. 박은식, 정인보, 신채호 등은 강화학파의 양명학적 전통을 계승하여 ‘심즉리(心即理)’와 ‘지행합일(知行合一)’을 강조했다. “나라는 형체이고 역사는 정신이다”라는 박은식의 외침은 조선 유학의 자기 혁신 결과물이지 결코 외래 사서의 복제가 아니었다.
또한 이들은 ‘대종교’라는 종교적 매개를 통해 민족 정체성을 확립하고, 역사의 주체를 왕조에서 민족으로 전환하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를 단행했다. 신채호의 “역사는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라는 명제는 식민지라는 극한의 상황에서 소멸해가는 ‘아’의 생존 공간을 확보하려는 처절한 실존적 몸부림이었다.
결론: 위대한 지성사적 투쟁에 대한 경의
박종인 기자의 주장은 역사적 맥락을 소거한 채 텍스트의 표면적 유사성만을 공격하는 발생학적 오류를 범하고 있다. 민족 사학자들은 외래 텍스트를 베낀 것이 아니라, 식민지 현실 타개를 위해 능동적으로 활용하고 재해석했다. 그들은 일본의 정보를 이용해 일본과 싸울 전략을 짰으며, 청나라의 사서를 이용해 중화 사대주의를 극복했다.
오늘날의 기준에서 일부 실증적 오류는 비판적으로 검토되어야 하겠으나, 그들의 학문적 성과 전체를 ‘국뽕’이나 ‘표절’로 매도하는 것은 가혹하고 무지한 처사다. 석주 이상용이 영하 30도의 만주 벌판에서 일본군 지도를 펴놓고 밤새워 조국의 해방을 고민했던 그 치열함은 ‘어이없는 시작’이 아니라, 가장 암울했던 시기에 피어난 ‘위대한 지성사적 투쟁’이었다. 민족 사학은 지금도 우리에게 역사의 주인이 되라고 명령하는 살아있는 텍스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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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한마디 덧붙이자면, 임시정부의 초석을 다진 독립운동가 예관 신규식 선생은 그의 저작 <한국혼>에서 이렇게 절규했다. “우리의 역사책들은 어디에 있는가?”
“아아! 나라의 역사를 잊었다고 함은 무슨 의미인가? 나라의 문헌은 곧 나라의 정신이다. 문헌은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 그것은 국사에서 찾아야 한다. 슬프도다! 우리 한국은 이제 다시는 역사가 있을 수 없으며, 지금까지 있었던 것도 없는 것과 다름이 없게 되었다.
우리나라 오천 년 역사에서 경적과 문자는 여러 차례 화를 당하였다.......중략.......
아아 슬프도다! 『단군사』, 『단조사』, 『신지서 운관비기』, 『안함로 원동중 삼성기』, 『표훈천사』, 『지공기』, 『도증기』, 『동천록』, 『통천록』, 『가화록』, 고흥의 『백제사』, 이문진의 『고구려사』, 거칠부의 『신라사』, 『발해사』 등은 그 이름만 남았을 뿐, 그 책은 얻어 볼 수 없게 되었다.”
— 신채호, 『한국혼』
신규식 선생과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간절히 찾아 헤맸던 『신지비사』, 『안함로 원동중 삼성기』, 『표훈천사』 등 우리의 고대 문헌들은, 결국 독립운동 진영의 노력 속에서 『환단고기』라는 이름으로 1911년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렇다면 마땅히 기뻐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의 문헌을 바탕으로, 우리의 역사서가 합본되어 나왔으니 말이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였다. <만주지지>니 <만주원류고> 하며 ‘남의 책을 가져다 쓴다’고 비난하던 사람들이, 정작 우리 책으로 우리 역사를 말하자 오히려 더 집요하고 격렬하게 공격해댔다. 바로 이것이 그들의 민낯이다.
남의 기록을 쓰면 무작정 비판하고 우리의 문헌으로 우리의 역사를 말하면 광분한다.
역사를 위한다는 이름 아래, 정작 우리 역사의 회복을 가장 두려워하는 얼굴—그것이 지금 우리가 마주한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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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문국’ 망령의 부활인가… 남원문화원은 누구를 위한 역사를 가르치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