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 제1장 낙랑군 시대 - 제1절 총설
조선의 역사에 따르면, 지금으로부터 4,000여 년 전 단군(檀君)이 태백산에 강림하여 조선 국왕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또 주나라의 무왕이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하였다고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기록들은 그리 정확하지 않다.
조선의 역사가 본격적으로 서광을 보기 시작한 것은 한나라 무제가 원봉(元封) 원년(기원전 108년)에 조선을 정복하여 낙랑(樂浪)·임둔(臨屯)·현도(玄菟)·진번(眞番)의 4군을 설치한 때부터이다. 당시 조선의 남반부에는 마한·변한·진한이 있었고, 북반부에는 조선·예·맥·옥저 등의 여러 민족이 있었다.
무제는 조선의 땅에 낙랑군(대체로 지금의 평안남북도, 황해도 지역)을 두고, 예맥의 땅에 임둔군(대체로 지금의 강원도 및 함경남도의 남부)을 두었으며, 옥저의 땅에 현도군(지금의 함경남북도)을 두었다. 진번군의 위치에 대해서는 학설에 따라 남한 지역이라 하기도 하고 혹은 만주 지방이라 하기도 하여 확정되지 않았다.
우측의 낙랑·임둔·현도 3군의 안에서 낙랑군만이 오랫동안 한민족(漢民族)의 세력권으로 남아 있었으나, 임둔과 현도 두 군은 머지않아 한나라의 굴레를 벗어나게 되었다. 또한 낙랑군은 후한 말기에 이르러 공손강(公孫康)이 점유하는 바가 되었는데, 공손강은 낙랑군의 남쪽을 분할하여 대방군(大方郡, 대체로 지금의 경기도·황해도의 두 도)을 두었다. 이 두 군은 삼국시대에는 위(魏)나라의 판도에 귀속되었다.
(위나라와) 서진(西晉)의 건흥 원년(서기 313년) 말에 고구려에 의해 멸망하였다. 한나라 무제가 군을 설치한 이래 이때에 이르기까지 무려 421년 동안, 이 두 군 지역은 대체로 한민족(漢民族)의 세력 범위 안에 있었던 것이다. 그사이에 지나(支那, 중국)로부터 태수가 파견되어 이를 통치하였고, 연이어 이주해 온 한민족은 그 발달한 문화를 수입하여 반도의 일각에 문물이 찬란한 '별천지'를 현출시켰으며, 그 영향은 주변의 민족에게까지 미쳤다.
지나(중국)는 한나라 시대에 이르러 그 문화가 비정상적으로 발달하였는데, 이는 서역과 통하거나 불교가 수입되었기 때문이며, 주·진 시대의 전통적 예술에 다소 안식(安息, 지금의 파르티아)과 월씨국(또는 간다라) 등의 영향이 가미되어 한층 더 진보를 이룬 것이다. 건축에 있어서도, 조각에 있어서도, 회화에 있어서도, 기타 일반 공예에 있어서도 오늘날 우리들의 상상 이상의 발달을 이루었음은 당시의 문헌이나 유물을 통해 명백히 알 수 있다.
낙랑·대방 지방으로 이주해 온 한민족은 본국의 문화를 가져와 반도의 한구석에 '소지나(小支那)'를 출현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그 멸망으로부터 1,600여 년이 지나는 동안 (이 사실이) 전혀 알려지지 않았었다. 그러다 다행히 최근의 조사에 의해 유적과 유물이 잇달아 발견되어, 당시 문화의 성격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것들은 주로 군치지(郡治址), 현치지(縣治址), 고분 및 그곳에서 발견된 각종 공예품들이다.
조선미술사(朝鮮美術史) 中

조선미술사(朝鮮美術史), 세키노 다다시(關野貞)
세키노 다다시는 1902년부터 한국의 고건축과 유물을 조사해 일본 학계에 처음 소개한 관학자다. 1909년 통감부의 의뢰로 시작된 전국적 조사 사업은 20여 년간 지속되어 총 15책의 『조선고적도보』로 집대성되었다.
이 사업은 근대 학문적 성과를 담고 있으나, 조선총독부가 주도하여 식민 지배의 논리를 정당화하려는 이데올로기적 한계를 지닌다. 1932년 발간된 『조선미술사』 역시 이러한 맥락 아래 그의 강좌 원고를 보완해 펴낸 결과물이다.
이 책이 발행된 계기는 서문에서 언급되고 있듯이, 일본도쿄에서 <조선명화전람회>(1931.3)가 성황리에 개최되면서 한반도의 미술에 대한 관심과 체계적인 조선미술사에 대한 필요때문에 이루어졌다.
본문의 구성은 총론에서 시작하여 『조선고적도보』처럼 한반도의 역사시기를 다루고 있다. 그가 나눈 시대 구분은 아래와 같다.
1.낙랑군 시대
2.고구려
3.백제
4.고신라와 가야 제국
5.통일신라 시대
6.고려 시대
7.조선 시대
또한 도판목록 및 삽화목록을 수록하고 있으며, 주요 발굴유물에 대한 실측자료 및 시대별 영향관계에 대한 사항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동문선(심우성 역, 2003)에서 복간본이 발행되었다.
낙랑군에서 시작하는 ‘한국 미술사’라는 식민사관의 구조
한국 미술사를 낙랑군 시대에서 출발시키는 서술 방식은 단순한 시대 구분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한국 고대 문화의 자생성과 주체성을 구조적으로 지워버리는, 전형적인 식민사관의 인식 틀이다. 특히 세키노 다다시가 집필한 조선미술사가 보여주는 이 서술 방식은, 미술사라는 외피를 썼을 뿐 본질적으로는 조선총독부의 역사 인식과 궤를 같이한다.
1. ‘문명의 기점’을 외부 지배에서 설정하는 발상
낙랑군은 한나라 무제가 설치한 중국의 군현이다. 다시 말해 외래 지배 체제다. 그럼에도 한국 미술사의 출발점을 낙랑군으로 설정한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전제를 암묵적으로 강요한다.
“한반도에는 외부 문명이 들어오기 전까지 제대로 된 미술과 문화가 없었다.”
이 전제는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 이는 고조선·부여·삼한 이전의 문화적 성취를 ‘미개’ 혹은 ‘불분명한 영역’으로 밀어내고, 중국 문명의 유입과 지배를 ‘개화의 시작’으로 설정하는 전형적인 식민사관의 논리다.
2. ‘421년 중국 지배’라는 서사의 정치성
낙랑군·대방군이 “421년간 한민족(漢民族)의 세력권 안에 있었다”는 식의 서술은 오늘날까지도 반복되지만, 이 역시 정치적 목적을 가진 역사 서사다.
이는 한반도 북부를 장기간 중국의 식민지로 설정함으로써, 한국 고대 국가의 주체적 발전을 약화시키고 고구려·백제·신라의 성장을 ‘중국 식민 통치의 결과’처럼 보이게 만들며 결과적으로 한국 문명의 독자성을 부정하는 효과를 낳는다
미술사 서술에서 낙랑군을 출발점으로 삼는 것은, 이 정치적 역사관을 문화·예술의 영역으로까지 확장하는 작업이다.
3. ‘소지나(小支那)’라는 개념의 폭력성
세키노 다다시는 낙랑·대방 지역을 “소지나(小支那)”라 규정한다. 이는 단순한 표현이 아니라, 매우 노골적인 인식이다. 이 개념에는 다음의 메시지가 담겨 있다.
낙랑 지역의 문화는 ‘한국 문화’가 아니라 ‘중국 문화의 축소판’이며 그 찬란함은 토착민의 창조력이 아니라 이주한 한민족(漢民族)의 결과라는 주장. 이렇게 되면, 한반도는 언제나 문화를 ‘받아들이는 공간’, 다시 말해 수동적 주변부로 전락한다. 이는 일본 제국이 조선을 ‘스스로 문명을 만들 수 없는 지역’으로 규정하고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던 논리와 정확히 맞물린다.
4. ‘발견’의 서사와 식민 권력
낙랑 유적과 유물이 “최근에 와서야 발견되었다”는 서술 또한 문제적이다. 이 표현은 마치, “일본 학계의 조사 이전에는 조선인 스스로는 자신의 과거를 알지 못했다” 는 뉘앙스를 은근히 전제한다. 이는 고고학적 발견을 학문적 성과로 가장한 식민 권력의 ‘계몽 서사’로 포장하는 방식이며, 조선의 역사 인식 능력 자체를 폄하하는 구조다.
5. 왜 이것이 ‘미술사’에서 특히 위험한가
역사 서술은 반박될 수 있지만, 미술사는 사람들의 감각과 인식의 바탕을 형성한다.
“한국 미술의 시작은 낙랑군”이라는 인식이 굳어질 경우, 한국의 미적 전통은 본질적으로 외래 의존적이며 창조는 항상 외부에서 오고 우리는 그것을 수용·모방하는 데 능했을 뿐이라는 인상이 고착된다 이것이야말로 식민사관이 가장 깊숙이 침투하는 지점이다.
맺음말: 출발점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관점을 바로잡아야 한다
문제는 낙랑 유적을 연구하느냐의 여부가 아니다. 문제는 왜 그것이 ‘출발점’이 되는가이다.
한국 미술사의 시작은 외래 지배의 흔적이 아니라, 고조선·부여·삼한으로 이어지는 토착적 세계관, 제의 문화, 미적 감각의 연속성 속에서 설정되어야 한다. 낙랑군에서 시작하는 한국 미술사는 학문이 아니라 지배의 기억이며, 그 기억을 ‘객관성’이라는 이름으로 반복하는 한, 식민사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박찬화 전문기자 multikorea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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