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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당서』의 침묵과 『환단고기』의 기록: 발해 연호의 진실대위해 삽입설 비판: 『환단고기』가 수호한 대진국 황제의 정통성

동북아시아 고대사에서 발해(渤海), 즉 대진국(大震國)은 고구려의 정통성을 계승하며 만주와 한반도 북부, 연해주를 아우르는 광대한 영토를 지배했던 제국이다. 그러나 발해인 스스로가 남긴 역사적 기록이 전해지지 않는 현실에서, 후대의 사가들은 주로 중국의 기록인 『구당서(舊唐書)』와 『신당서(新唐書)』, 그리고 일본의 외교 기록에 의존하여 그 역사를 재구성해 왔다. 이러한 외적 기록의 한계는 발해를 당나라의 일개 조공국이나 지방 정권으로 격하하려는 중화주의적 사관을 고착시키는 원인이 되었으며, 이는 현대의 동북공정으로 이어지는 역사 왜곡의 단초를 제공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환단고기(桓檀古記)』, 특히 그 일부분인 「태백일사 대진국본기(太白逸史 大震國本紀)」가 제시하는 발해의 역사는 사료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함의를 갖는다. 「대진국본기」의 핵심적인 특징은 발해를 단순한 변방의 왕국이 아닌,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고 황제를 칭했던 '대진(大震)'이라는 황제국으로 기록하고 있다는 점이다. 

주류 학계 일부에서는 『환단고기』의 발해 연호 기록이 『신당서』를 베낀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두 문헌의 내용을 정밀하게 비교 분석하면 이러한 주장은 설득력을 잃는다. 오히려 「대진국본기」는 『신당서』가 누락하거나 오기한 수많은 연호와 시호, 계보를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이는 20세기 이후 발굴된 금석문과 고고학적 유물들을 통해 그 정확성이 반복적으로 입증되고 있다.   


태백일사 대진국본기와 신당서의 계보 및 연호 비교 분석
발해의 역사 체계를 이해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지표 중 하나는 군주의 대수와 그들이 사용한 연호이다. 『신당서』 「북적열전(北狄列傳)」에는 발해의 연호가 일부 기록되어 있으나, 이는 발해 전체 역사를 포괄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며 파편적이다. 반면 「대진국본기」는 발해의 건국 시조부터 멸망 당시의 애제에 이르기까지 15대 황제의 계보와 14명의 연호를 명확히 제시하고 있다

 『신당서』는 전체  단 9명의 연호만을 기록하고 있는 반면, 「대진국본기」는 거의 모든 황제의 연호를 상세히 밝히고 있다. 특히 중요한 점은 『신당서』에는 발해의 시조인 대중상에 대한 기록이 전무하며, 건국 주체인 대조영의 연호조차 누락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만약 「대진국본기」의 저자가 『신당서』를 참고하여 연호를 조작했다면, 『신당서』에도 없는 '천통(天統)'이나 '청태(淸泰)'와 같은 연호를 임의로 삽입했을 이유가 없다. 또한 6대 황제의 휘(이름)에 있어서도 「대진국본기」는 '화흥(華興)'으로, 『신당서』는 '화여(華璵)'로 다르게 표기하고 있는데, 이는 두 사료가 서로 독립적인 정보 원천을 가지고 있음을 시사한다.   

발해의 건국 과정은 단순히 고구려 멸망 이후의 혼란기를 틈탄 우연한 사건이 아니었다. 「대진국본기」는 대조영의 부친 대중상(대걸걸중상)을 발해의 제1대 태조인 세조 진국열황제로 모시며, 그가 '중광(重光)'이라는 연호를 사용했음을 명시한다.   

대중상의 연호 '중광'과 진국(震國)의 정체성
측천무후가 대중상을 '진국공(震國公)'으로 봉했다는 기록은 중국 측 사료에도 등장한다. 이는 대중상이 이미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였음을 의미한다. 「대진국본기」는 이러한 역사적 배경 아래 대중상이 '대진'이라는 국호를 세우고 '중광'이라는 연호를 선포함으로써 황제국의 기틀을 닦았음을 전한다. 유득공의 『발해고』 역시 군고(君考)의 첫머리에 진국공 대중상을 언급하고 있어, 아들 대조영이 나라를 세우기 전 아버지 대중상을 건국의 시조로 받드는 것이 당시의 상식과 명분에 부합했음을 알 수 있다.   


대조영의 연호 '천통'과 금석문의 발견
가장 논란이 되면서도 획기적인 증거는 대조영의 연호인 '천통(天統)'이다. 『구당서』와 『신당서』에는 대조영의 연호가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환단고기』, 『단기고사』, 『규원사화』 등 한국의 전승 사료들은 일관되게 '천통'을 말하고 있다.   

정명호 전 동국대학교 교수는 <천통십년동제여래입상에 대한 고찰> 논문을 통해 이 연호의 실체적 진실을 입증하였다. 해당 불상에는 "천통 10년"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중국 역사에서 '천통' 연호를 사용한 북제나 명하 등의 정권은 그 존속 기간이 5년을 넘지 못했다. 따라서 "천통 10년"이라는 기년이 물리적으로 성립할 수 있는 인물은 20년 넘게 재위한 대조영이 유일하다. 또한, '천통 8년'이 새겨진 발해 화폐의 발견은 이 연호가 국가 행정 및 경제 체제 전반에서 공식적으로 사용되었음을 뒷받침하는 강력한 고고학적 증거가 된다.   

발해 제3대(태백일사 기준 4대) 문왕 대흠무의 통치기는 발해가 제도적으로 완성되고 대외적으로 황제국의 위상을 과시했던 시기이다. 그의 연호인 '대흥(大興)'은 20세기 중반 이후 발굴된 금석문을 통해 그 사실성이 완벽히 증명되었다.   

1949년에 발굴된 정혜공주 묘비와 1980년에 발견된 정효공주 묘비는 발해사 연구의 일대 전기를 마련했다. 두 공주는 문왕의 딸들로, 묘지명에는 문왕의 연호인 '대흥'이 명확히 기록되어 있었다.   

정효공주 묘지명에는 문왕의 존호로 '대흥보력효감금륜성법대왕(大興寶曆孝감金輪聖法大王)'이 나타난다. 이는 문왕이 '대흥'이라는 연호를 사용하다가 중간에 '보력'으로 개원하고, 다시 '대흥'으로 돌아갔음을 보여준다. 「대진국본기」 역시 문왕의 연호를 '대흥'으로 기록하고 있어, 발굴 이전부터 이 정보를 보존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황상(皇上) 칭호의 의미: 묘지명에서 가장 주목할 부분은 문왕을 '황상'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점이다. '황상'은 신하가 황제를 부를 때 사용하는 극존칭으로, 발해가 당나라의 책봉 체제와는 별개로 내부적으로는 황제국 체제를 유지했음을 입증한다. 『환단고기』가 발해의 통치자를 '황제'로 기록한 것은 이러한 역사적 실체에 근거한 정확한 기술인 것이다.   

천손(天孫) 자의식: 문왕이 일본에 보낸 국서에서 스스로를 '천손'이라 칭한 기록은 『속일본기』 등에도 나타난다. 이는 발해가 고구려의 '천하' 관념을 계승하여 자신들을 하늘의 자손, 즉 제국의 주인으로 인식했음을 의미한다.   

함화 11년 중대성첩과 대건황
841년 발해 중대성에서 일본의 태정관에 보낸 외교 문서인 「함화11년중대성첩(咸和十一年中臺省牒)」은 당시 발해의 관제와 연호 사용 실태를 보여주는 유일한 실물 자료이다. 이 문서의 발송 명의자 중 한 명으로 기록된 '대건황(大虔晃)'은 훗날 발해의 제12대 왕이 되는 인물이다.   

연호의 일치: 문서에 명시된 '함화 11년'은 「대진국본기」가 기록한 12대 황제 장종 화황제의 연호 함화와 정확히 일치한다.   

태자의 이름과 직함: 「대진국본기」는 12대 황제의 태자 이름이 '건황'임을 밝히고 있는데, 이는 일본 측 문서에서 대내상(大內相)의 지위로 외교 실무를 담당했던 대건황의 존재와 부합한다.   

황제국의 관제: 문서에 나타난 '중대성'이나 '허왕부(許王府)'와 같은 명칭은 발해의 통치 구조가 황제 아래 여러 왕을 두는 황제국 체제였음을 시사한다. 특히 '허왕부 참군'과 같은 관직이 기록된 '함화 4년명 발해 비상'은 「대진국본기」가 시종일관 발해를 황제국으로 서술한 것이 허구가 아님을 증명한다.   

이상과 같이 『환단고기』 「태백일사 대진국본기」에는 대진국이 황제의 연호를 사용했다는 내용이 분명히 나온다. 1대 대중상이 연호를 사용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이는 국가 건국에 있어서 아들 대조영이 아버지 대중상을 1대로 세우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대목이다. 2대 대조영 역시 연호를 사용한 것이 유물과 자료를 통해서도 입증된다. 이러한 점을 종합해 볼 때, 모둔 대에 걸쳐서 대진국본기에 기록된 대진국(발해) 황제의 연호는 축소하거나 왜곡해서 볼 문제가 아니다. 당시 국가의 위상과 자주성을 반영한 표현으로서, 있는 그대로 존중받아야 할 역사 기록이다


김육불의 '대위해' 삽입설과 대진국본기 계보의 정당성
현대 학계에서 발해의 제14대 왕으로 인정받고 있는 '대위해(大瑋瑎)'의 존재는 20세기 초반 김육불(金毓黻)에 의해 『당회요(唐會要)』에서 발견된 기록에 근거한다. 김육불은 894년부터 906년까지 대위해가 재위했다고 주장하며 그를 경왕과 애왕 사이에 넣었으나, 이는 「대진국본기」를 비롯한 전통 사료의 계보와 충돌한다.   

「대진국본기」는 14대 명종 경황제(대현석) 이후 바로 15대 애제(대인선)로 이어지는 계보를 유지하고 있다. 이는 『조선세가보(1939)』나 일본 외무성에서 편찬한 『외교지고(1884)』가 대현석과 대인선을 각각 '경왕'과 '애왕'으로 칭하며 연속적으로 기록한 것과 일치한다.   

 『당회요』의 기록은 단편적이며, 대위해가 발해 전체를 통치한 황제였는지 아니면 내부 분열기의 일시적인 집권자였는지 명확하지 않다. 또한 대위해는 시호조차 전해지지 않는데, 이는 그가 정통 황제 계보에서 이탈해 있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반면 경왕(대현석)과 애왕(대인선)의 시호는 일본 측 자료인 『단군정사』나 도리야마 기치의 『발해사고』 등에서도 공통적으로 나타나며, 「대진국본기」의 기록을 뒷받침한다. 이는 「대진국본기」가 단순한 외부 사료의 편집이 아니라, 발해 내부의 정통 계보를 계승한 고유의 기록 체계를 가지고 있음을 입증한다.   

결론: 발해사 주권 회복을 위한 대진국본기의 가치
발해는 스스로를 '대진'이라 불렀으며, 하늘의 자손이라는 자부심으로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고 황제를 칭했던 자주 제국이었다. 중국의 『신당서』는 중화주의적 관점에서 발해의 이러한 자주성을 의도적으로 누락하거나 축소하였으며, 그 결과 수많은 황제의 연호와 시호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환단고기』 「태백일사 대진국본기」는 1,000년의 시간을 넘어 발해의 온전한 황제 계보와 연호를 보존해 왔다. 20세기 이후 발견된 '천통' 명문 불상, '대흥' 연호가 새겨진 공주 묘지명, '함화' 연호의 외교 문서 등은 「대진국본기」의 기록이 『신당서』보다 훨씬 정확하고 신뢰할 수 있음을 웅변한다.   

중국이 고구려와 발해를 자신의 지방사로 편입하려는 역사 공정을 가속화하고 있는 오늘날, 「대진국본기」가 전하는 대진국의 역사는 단순히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우리 역사의 주권을 지키는 강력한 논리적 토대가 된다. 따라서 학계는 『신당서』와 같은 외적 기록에만 매몰될 것이 아니라, 고고학적 성과와 일치하는 「대진국본기」의 사료적 가치를 적극적으로 인정하고 이를 바탕으로 발해사를 황제국의 역사로 온전히 복원해야 할 것이다.  

 

 

 

 

박찬화 전문기자  multikorea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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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댓글 2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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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형우 2026-02-18 08:11:21

    // 6대 황제의 휘(이름)에 있어서도 「대진국본기」는 '화흥(華興)'으로, 『신당서』는 '화여(華璵)'로 다르게 표기하고 있는데, 이는 두 사료가 서로 독립적인 정보 원천을 가지고 있음을 시사한다. //

    너무도 안이하게 단정한다. 심당전서에도 華璵로 되어 있다. 태백일사 대진국본기는 여타 기록의 華璵를 華興으로 잘못 적었다. 국왕의 휘를 잘못 적고도 그 사실을 모르고 수정을 못한 것이다.
    태백일사는 그만큼 황급하게 짜집기한 책이다.   삭제

    • 이형우 2026-02-18 08:06:04

      일본 측 자료인 『단군정사』?

      처음 듣는 서적 이름이다. 박찬화 기자는 AI로 기사를 작성하는 것 같다. 의혹이 짙어진다.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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