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중엽 김육불에 의해 발해의 14대 왕인 대위해가 발견되면서 발해의 군주는 모두 15명임이 확인되었으며, 대현석 및 대인선의 시호 역시 당시 신라의 왕 경애왕을 오독하여 나타난 것임이 밝혀졌다. 이는 《환단고기》가 발해의 왕에 대한 정확한 옛 기록을 참고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된다" (위키피디아)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 불리며 동아시아 중세사의 한 축을 담당했던 발해(渤海)는 그 역사적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고유 사서의 부재와 주변국 기록의 파편성으로 인해 왕실 계보와 역사적 사실 규명에 난항을 겪어왔다. 특히 20세기 초 중국의 사학자 김육불(金毓黻)이 저술한 『발해국지장편(渤海國志長編)』은 발해사 복원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으나, 동시에 사료 해석의 오류로 인한 '가상의 왕'을 탄생시켰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김육불은 발해 제14대 왕 대현석(大玄錫)과 제15대 왕 대인선(大諲譔) 사이에 '대위해왕(大瑋瑎王)'이 존재한다는 주장을 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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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육불(金毓黻) |
윤창열 교수를 비롯한 최근의 연구는 '대위해(大瑋瑎)'가 인명(人名)이 아닌, 당나라 소종(昭宗)이 발해 사신 혹은 왕에게 하사한 '크고(大) 귀한(瑋) 검은 옥(瑎)'이라는 물품명임을 강력하게 시사한다. 이러한 주장이 타당한지 한번 알아보도록 하자.

발해사 연구의 현황과 한계
발해는 고구려를 계승하여 만주와 한반도 북부를 아우르는 광대한 영토를 통치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남긴 1차 사료가 극히 빈약하다. 이는 발해 멸망 과정에서의 기록 소실과 후대 왕조들의 역사 인식 부족에 기인한다. 따라서 현대 발해사 연구는 전적으로 중국의 정사(正史)인 『구당서(舊唐書)』, 『신당서(新唐書)』, 그리고 각종 회요(會要)류 서적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 한계를 지닌다. 이러한 타자(他者)에 의한 기록은 기록자의 주관, 정보의 부재, 혹은 오해로 인한 왜곡이 발생할 가능성이 상존하며, 특히 인명과 지명, 관직명 등의 고유명사 해석에서 잦은 오류를 범하곤 한다.
김육불의 『발해국지장편』과 '대위해'
근대 발해사 연구의 선구자인 김육불은 방대한 중국 측 사료를 집대성하여 『발해국지장편』을 저술하였다. 그는 이 저술을 통해 발해 왕실의 계보를 체계화하고자 노력했으나, 발해 말기의 혼란스러운 정국을 서술하는 과정에서 『당회요(唐會要)』 등의 기록을 근거로 '대위해(大瑋瑎)'라는 인물을 제14대와 제15대 왕 사이의 군주로 비정하였다. 이는 이후 동아시아 사학계에서 별다른 검증 없이 수용되어, 각종 역사서와 백과사전에 대위해가 발해의 국왕으로 등재되는 결과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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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 교과서는 김육불의 주장을 정설로 받아들여 발해 왕 계보도에 대위해를 집어넣었다. |
문제 제기: 왕인가, 옥(玉)인가?
그러나 최근 윤창열 교수를 위시한 연구자들은 '대위해'가 왕의 이름이 될 수 없다는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였다. 이들은 대위해라는 명칭이 사람의 이름이라기보다는 사물, 특히 보석류를 지칭하는 한자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에 주목하였다.
역사적 인물의 실재성을 검증하는 첫 번째 단계는 그 이름의 의미와 용례를 분석하는 것이다. '대위해'라는 단어를 구성하는 세 글자, 즉 대(大), 위(瑋), 해(瑎)의 개별적 의미와 결합적 의미를 분석하면, 이것이 인명이 아님을 명확히 알 수 있다.

'해(瑎)' 자의 특수성
'대위해' 논쟁의 핵심은 마지막 글자인 '해(瑎)'에 있다. 이 글자는 한자 문화권에서 인명으로 사용되는 빈도가 극히 낮은 글자이며, 그 의미가 매우 구체적인 광물을 지칭하고 있다.
옥(玉) 부수의 의미: '해(瑎)'는 구슬 옥(玉) 변을 부수로 한다. 한자 조어법상 옥 변이 들어간 글자는 대부분 보석, 옥, 돌, 혹은 옥의 소리나 광택을 의미한다.
사전적 정의: 각종 옥편과 자전(字典)에 따르면, '해(瑎)'는 '검은 옥돌(黑玉)' 혹은 **'검은 옥'**을 뜻한다.
음운학적 구조: 이 글자는 뜻을 나타내는 玉(구슬 옥)과 음을 나타내는 皆(다 개)가 합쳐진 형성자이다.
용례의 한계: 역사적으로 '해(瑎)'자가 인명에 쓰인 사례는 매우 드물며, 쓰인다 하더라도 옥의 아름다움을 비유적으로 차용하는 경우에 한한다. 그러나 뒤에서 설명할 '위(瑋)'자와 결합할 경우, 이는 비유적 인명이라기보다는 구체적인 사물의 묘사로 보는 것이 훨씬 자연스럽다.
'위(瑋)' 자의 수식적 기능
가운데 글자인 '위(瑋)' 역시 옥 변을 가지고 있다.
의미: '위(瑋)'는 '귀하다', '현묘하다', '아름답다', '훌륭하다'는 뜻을 가진다.
품사적 기능: 명사 앞에 위치할 때 '위'는 대상을 수식하는 형용사적 기능을 수행한다. 즉, '위해(瑋瑎)'는 "귀하고 아름다운(瑋) 검은 옥돌(瑎)"이라는 명사구를 형성한다.
'대(大)'의 이중적 해석
첫 글자 '대(大)'는 발해 왕실의 성씨인 대씨(大氏)를 의미할 수도 있고, 크기를 나타내는 형용사 '크다'를 의미할 수도 있다.
가설 A (김육불의 해석): 대(大)는 성씨이고, 위해(瑋瑎)는 이름이다. 즉, "대씨 성을 가진 위해라는 사람"이다.
가설 B (윤창열의 해석): 대(大)는 형용사이며, 위해(瑋瑎)는 검은 옥이다. 즉, "크고(大) 귀한(瑋) 검은 옥(瑎)"이다.
여기서 문맥적 판단이 중요하다. 당나라 황제가 하사품을 내리는 상황에서, 하사품의 목록에는 물품의 크기, 품질, 수량을 적는 것이 관례이다. '큰(大) 진주', '큰(大) 옥' 등의 표현은 전근대 동아시아 물품 목록에서 흔히 발견된다. 반면, 왕의 이름을 기록할 때 굳이 옥 이름 두 글자를 합쳐서 작명하는 경우는 드물다. 발해 왕들의 이름(무예, 흠무, 인수, 인선 등)은 주로 유교적 덕목이나 통치 철학을 담고 있지, 특정 광물 자체를 지칭하지 않는다. 따라서 '대위해'는 "Big Precious Black Jade"로 해석하는 것이 의미론적으로 타당하다.
한문 문법 구조 분석: 4형식 수여 동사의 오독
김육불이 '대위해'를 인명으로 오해한 결정적인 원인은 한문 문법, 특히 수여 동사 '사(賜, 주다/하사하다)'가 사용된 문장의 구조를 잘못 파악한 데 있다.
고전 한문(Classical Chinese)에서 '주다'라는 의미의 동사(賜, 與, 給 등)는 영어의 4형식 문장과 유사하게 두 개의 목적어를 취한다.
구조: 주어(Subject) + 동사(Verb) + 간접목적어(Indirect Object, 받는 사람) + 직접목적어(Direct Object, 주는 물건)
예시: 王(왕이) 賜(하사하다) 臣(신하에게) 酒(술을).
해당 기록의 원문은 당나라 소종이 발해 측에 무언가를 하사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기록의 형태가 대개 압축적이고 주어나 간접목적어가 생략되는 경우가 많은 한문의 특성을 고려해야 한다.
김육불의 오독(Misparsing): 김육불은 문장을 다음과 같이 끊어 읽었을 가능성이 높다.
"賜(하사하다)... [간접목적어 생략 혹은 오인]... 大瑋瑎(대위해를 - 사람으로 인식)..." 즉, '대위해'를 책봉을 받는 대상(간접목적어)이나, 혹은 책봉의 대상이 되는 인물로 파악한 것이다.
윤창열 교수는 이 문장이 '물품 하사'의 목록을 나열하는 부분임을 지적한다. 문맥상 받는 사람(발해 왕 혹은 사신)은 이미 언급되었거나 생략되었고, '대위해'는 하사품인 직접목적어에 해당한다.
"賜(하사하다)... [발해 왕/사신에게]... 大瑋瑎(크고 귀한 검은 옥을)"
이 해석을 따르면, 당나라 황제는 발해 왕(대현석 혹은 대인선)에게 외교적 답례품으로 희귀한 '검은 옥'을 보낸 것이 된다. 이는 당시 당나라와 발해 사이에 오고 간 조공과 회사(回賜) 관계에 완벽하게 부합한다. 검은색(玄, 黑)은 북방(北方)을 상징하는 색(오행설)이므로, 북쪽의 발해에게 검은 옥을 하사하는 것은 의례적으로도 매우 적절한 선택이다.

'사(賜)' 동사의 목적어 도치와 혼란
때로는 강조를 위해 목적어의 위치가 바뀌거나, 조사 '이(以)'를 사용하여 "以A賜B" (A로써 B에게 주다) 형태를 취하기도 한다. 하지만 어떤 문법적 변형을 적용하더라도, '검은 옥돌'이라는 뜻을 가진 명사구(NP)를 사람 이름으로 해석하는 것보다는 물건으로 해석하는 것이 문맥상 자연스럽다. 특히 당회요 한림원(翰林院) 조와 같은 공식 문서는 물품의 목록을 정확히 기술하는 특징이 있다. 김육불은 이러한 행정 문서의 성격을 간과하고, 낯선 단어(瑋瑎)가 나오자 이를 발해의 잃어버린 왕명으로 단정 짓는 과오를 범했다.
연대기적 모순과 계보학적 불가능성
'대위해'가 실존 인물이 아니라는 주장은 언어학적 분석뿐만 아니라, 역사적 연대기 분석을 통해서도 강력하게 뒷받침된다. 발해 말기의 왕위 계승 연표를 재구성해보면 '대위해'가 들어갈 시공간적 틈이 존재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발해의 마지막 시기인 9세기 말에서 10세기 초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제14대 왕 대현석(경왕): 재위 기간은 대략 871년부터 **901년(또는 902년)경까지로 추정된다.
제15대 왕 대인선(애왕): 발해의 마지막 왕으로, 901년(또는 902년)에 즉위하여 926년 발해가 멸망할 때까지 재위하였다.
14대 경황제(대현석)는 901년에 붕어하였고, 15대 애제(대인선)는 같은 해인 901년에 즉위하였다. 왕위 계승은 선왕의 사망 즉시 혹은 유고 즉시 이루어지는 것이 원칙이다. 기록상 901년이라는 시점은 대현석의 통치가 끝나는 시점과 대인선의 통치가 시작되는 시점이 정확히 맞물려 있다.

'대위해'가 들어갈 자리는 없다
만약 김육불의 주장대로 대위해가 대현석과 대인선 사이의 왕이라면, 그는 언제 재위했는가?
대현석과 대인선 사이? 901년에 사망과 즉위가 동시에 일어났으므로 물리적인 시간이 없다. 대위해가 하루나 이틀 재위했다는 기록이 없는 한 불가능하다.
공동 통치? 발해사에서 형제나 부자가 공동 통치했다는 증거는 희박하며, 대위해를 별도의 대수(代數)로 산정하는 김육불의 방식과도 맞지 않는다.
찬탈자? 만약 대위해가 찬탈자였다면, 15대 대인선이 즉위하면서 그를 제거했을 것이고, 역사에는 반역자로 기록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김육불은 그를 정식 왕으로 간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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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적으로, 연대기상으로 '대위해'라는 왕이 존재할 수 있는 시간적 공백은 '0'이다. 이는 대위해왕 설이 역사적 사실에 기반하지 않은 허구임을 방증한다. 김육불이 당회요의 기록(대위해 물품 하사 기록)을 보고 연대를 추정하여 억지로 계보에 끼워 넣으려다 보니, 멀쩡하게 이어지는 대현석-대인선 라인 사이에 불필요한 가상의 왕을 삽입하게 된 것이다.

비교 사례 : '천통(天統)' 연호와 고고학적 검증
김육불의 '대위해' 오류는 중국 중심의 사료 해석이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중국 사료가 침묵하거나 부정한 사실이 고고학적 발굴이나 비주류 사서를 통해 진실로 밝혀진 사례가 있다. 바로 대조영의 연호 '천통(天統)' 문제이다. 이 사례는 '대위해' 해석을 바로잡는 데 중요한 논리적 근거를 제공한다.
오랫동안 주류 강단 사학계와 중국 학계는 발해 고왕(대조영)이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지 않았다고 보았다. 『구당서』나 『신당서』에는 대조영이 당나라의 책봉을 받았다는 기록만 있을 뿐, 그가 연호를 제정했다는 기록은 없기 때문이다. 반면, 『환단고기』의 「대진국본기」나 『규원사화』 등 위서 논란이 있는 사서들은 대조영이 국호를 대진(大震)이라 하고 연호를 '천통'이라 하였다고 명시하고 있다.
'천통 10년' 명문 동제불상의 발견
이 논쟁은 2016년, 하나의 유물이 발견되면서 극적인 반전을 맞이했다. 정명호 교수가 조사한 동제불상의 광배 뒷면에서 "天統十年(천통 10년)..."이라는 명문이 발견된 것이다.
연대 환산: 천통 10년은 서기 708년에 해당한다.
의의: 중국 역대 왕조 중 '천통'이라는 연호를 10년 이상 사용한 사례는 없다. 따라서 이 불상은 대조영이 건국 초기부터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음을 실증하는 결정적인 고고학적 증거이다.
교훈: 중국 정사(正史)가 기록하지 않았다고 해서 사실이 아닌 것은 아니며, 반대로 중국 사료가 기록했다고 해서(김육불의 대위해 해석처럼) 무조건 사실인 것도 아니다.
5.3. '대위해' 문제에 주는 시사점
'천통' 사례는 문헌 사학의 한계를 고고학(유물)과 비판적 텍스트 분석이 어떻게 보완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중국 기록의 불완전성: 당나라 기록자들은 발해의 독자성을 축소하기 위해 연호를 기록하지 않았을 수 있다. 마찬가지로, 당나라 기록자들은 자신들이 보낸 선물(대위해)을 꼼꼼히 기록했으나, 후대 학자(김육불)가 이를 왕의 이름으로 오독했다.
검증의 중요성: '천통'이 유물로 입증되었듯, '대위해'는 언어학적 분석과 연대기 분석으로 반증(falsification)되어야 한다. '천통'은 실재했으나 기록에서 지워졌고, '대위해'는 실재하지 않았으나 오독으로 만들어졌다.
윤창열 교수의 주장은 단순히 기존 학설을 뒤집으려는 시도가 아니라, '천통' 불상 발견과 같은 맥락에서 사료를 엄밀하게 재검토하는 과정(Revisionism)의 일환이다. '검은 옥'이라는 해석은 유물(옥)이 발견되지 않았더라도 자의(字意) 해석만으로도 충분히 논리적 우위를 점한다.

결과
김육불이 제기한 발해 국왕 '대위해(大瑋瑎)'의 존재 여부를 다각도로 검증하였다.
언어학적 결론: '해(瑎)'는 '검은 옥돌'을 뜻하는 희귀한 한자이며, '위(瑋)'는 이를 수식하는 형용사이다. '대(大)' 역시 크기를 나타내는 수식어로 볼 때, '대위해'는 "크고 귀한 검은 옥"이라는 하사품의 명칭이다.
문법적 결론: 해당 문장은 당나라 황제가 발해에 물품을 하사(賜)하는 4형식 구문으로, '대위해'는 수여 동사의 직접목적어(물건)에 해당한다.
역사적 결론: 대현석(901년 몰)과 대인선(901년 즉위) 사이에는 다른 왕이 재위할 시간적 공백이 없다. '대위해'는 이 사이에 끼어들 수 없는 허구의 존재이다.
비교사적 결론: 대조영의 '천통' 연호가 고고학적으로 입증된 사례는 중국 측 사료에 대한 맹신을 경계해야 함을 시사한다. 김육불의 '대위해' 설은 중국 사료에 대한 비판적 독해 실패의 산물이다.
발해사 서술의 수정 제언
따라서 현재 통용되는 일부 발해 왕실 계보도에서 '대위해'를 삭제하고, 이를 "당 소종이 발해에 보낸 하사품 목록의 일부"로 주석 처리하는 것이 타당하다. 이는 단순히 이름 하나를 지우는 것이 아니라, 발해 말기의 역사를 사실에 입각하여 복원하는 중요한 작업이다.

다시한번 번역을 해보자
乾寧二年(895)十月, 賜渤海王大瑋瑎勅書, 翰林稱加官 合是中書撰書意, 諮報中書
한나라 소종 건녕 2년(895년) 10월에 발해왕에게 커다란 옥돌을 하사하면서 칙서를 내렸다. 한림원에서 발해국왕에게 관작을 올려주는 명칭을 짓게 했는데 중서성에서 지은 글의 뜻에 부합하게 하여 중서성에 공문으로 보고하였다.
사(賜)는 하사한다는 뜻으로 수여 동사이다. 위의 문장은 영어의 4형식 문장으로 발해왕이 간접목적어가 되고 대위해가 직접목적어가 되어 ~에게 ~을 하사한다는 뜻이다. 위(諲)는 옥의 일므 또는 소중하다는 뜻이고 해(撰)는 옥과 같은 검은 돌이니 대위해는 '크고 소중한 검은 옥'이란 뜻이다. 대진국 14대 명종 경황제에 이어 당나라 소종이 크고 소중한 검은 옥을 내려주었다는 뜻이다. 한국의 학자들도 김육불의 주장을 답습하여 명종 경황제 다음에 대위해왕을 넣고 있는데, 이는 시정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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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화 전문기자 multikorea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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