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주의의 침탈은 영토를 빼앗는 것에서 시작하지만, 그 완성은 피지배 민족의 ‘기억’을 지우는 데서 이루어진다. 20세기 전반, 일제는 한반도의 주권을 강탈함과 동시에 우리 민족의 시공간을 난도질하는 치밀한 ‘역사 전쟁’을 감행했다. 이에 맞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투쟁은 단순히 물리적 독립운동에 그치지 않았다. 그것은 사라질 위기에 처한 민족의 기원을 복원하고, 미래의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치열한 사상 투쟁의 과정이었다.
흥미로운 점은 임시정부의 역사 인식이 시기에 따라 확연한 온도 차를 보인다는 것이다. 1920년대 임정의 문헌들이 일제의 잔혹함과 민족의 수난을 고발하는 ‘피의 기록’이었다면, 1940년대 충칭 시기의 문서들은 장구한 ‘국통(國統)’을 전면에 내세웠다.
초기인 1920년대, 백암 박은식은 『한국통사』와 『한국독립운동지혈사』를 통해 나라 잃은 아픔(痛)과 독립을 향한 피(血)를 기록했다. 이는 "나라는 형체이고 역사는 정신"이라는 국혼(國魂) 사상을 바탕으로, 국제 사회에 우리의 억울함을 호소하고 민족혼을 지키려는 처절한 방어기제였다. 이때까지 역사는 ‘현상적 저항’의 도구였다.
그러나 1930년대를 거치며 임정의 역사관은 질적 비약을 이룬다. 일제 관학자 이마니시 류(今西龍)가 주도한 악의적인 역사 왜곡, 이른바 ‘석유환국(昔有桓國)’ 변조 사건이 결정적 도화선이 되었다. 일연의 『삼국유사』 속 "옛적에 환국이 있었다"는 구절을 "옛적에 환인(桓因)이 있었다"로 조작한 이 사건은, 한 글자의 차이로 우리 역사의 시원을 ‘국가’에서 ‘신화’로 격하시키려는 시도였다. 단군조선을 허구로 몰아세우고 한국사를 타율적인 식민지 역사로 고착시키려는 일제의 칼날이었다.

이에 대한 응전은 매서웠다. 단재 신채호는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라는 철학적 토대 위에서 고대사를 복원해 냈고, ‘환(桓)’을 광명으로 재해석하며 패배주의를 걷어냈다. 이러한 역사적 자산은 1940년대 임정의 이데올로그 조소앙에 의해 ‘삼균주의’라는 정치 철학으로 승화되었다.
1941년 발표된 「대한민국 건국강령」은 이 치열한 역사 전쟁의 승전보와도 같다. 임정은 강령을 통해 우리의 기원을 3.1 운동이나 단군에 국한하지 않고, 가장 오래된 국가인 ‘환국’으로 소급하여 명문화했다. 이는 "우리는 신화의 자손이 아니라, 태초부터 독자적인 문명을 경영해 온 정치적 주체의 후예"라는 선언이었다. ‘환국’의 존재는 전후(戰後) 건설될 신생 국가가 그 누구에게도 종속되지 않을 것임을 천명하는 강력한 논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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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에게 ‘환국’은 단순한 과거의 회상이 아니었다. 그것은 일제의 식민사관이라는 거대한 파도를 막아내는 방파제이자, 광복 후 세워질 나라가 지향해야 할 ‘오래된 미래’였다. 건국(建國)이 아닌 복국(復國)을 외쳤던 그들의 목소리는, 잃어버린 땅을 되찾기 전에 잃어버린 시간을 먼저 되찾아야만 진정한 독립이 가능함을 역설하고 있다.
오늘날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 새겨진 "유구한 역사와 전통"이라는 문구는 저절로 주어진 것이 아니다. 그것은 총칼 없는 전쟁터에서 우리 역사의 뿌리를 지켜낸 선열들의 고뇌와 투쟁이 빚어낸 숭고한 유산이다. 광복 80주년을 바라보는 지금, 우리가 임시정부의 역사관을 다시금 주목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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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화 전문기자 multikorea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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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문국’ 망령의 부활인가… 남원문화원은 누구를 위한 역사를 가르치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