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645년(보장왕 4년), 당 태종 이세민(李世民)이 직접 지휘하는 수십만 대군을 맞이하여 고구려가 거둔 안시성(安市城) 전투의 승리는 동아시아 전쟁사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 중 하나로 꼽힌다. 당시 세계 최강의 제국이었던 당나라의 파상공세를 3개월 이상 저지하고 끝내 퇴각시킨 이 전투는 고구려의 국방력과 양만춘(楊萬春) 장군의 지휘력을 상징하는 사건이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적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안시성이 과연 현대의 지리상 어디에 위치했는가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학계의 논란이 되어왔다.
현재 한국 강단 사학계와 중국 학계의 통설은 안시성을 요령성(遼寧省) 해성시(海城市) 동남쪽의 영성자산성(英城子山城)으로 비정한다. 이는 일제강점기 일본 학자들의 연구 성과를 답습한 것으로, 오늘날까지 교과서적인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영성자산성은 문헌에 기록된 안시성의 웅장함이나 지리적 조건, 특히 수계(水系) 및 주변 지형과의 정합성에서 많은 의문점을 남기고 있다.
이 성을 안시성으로 확정하기에는 다음과 같은 결정적인 결격 사유들이 존재한다. 이종호 박사를 비롯한 여러 연구자들은 이러한 지형적, 군사적 모순을 들어 영성자산성 비정의 부당함을 지적해 왔다.
성곽의 규모와 수용 능력의 한계
기록에 따르면 안시성에는 고구려 정규군뿐만 아니라 인근에서 피난 온 백성들까지 합쳐 약 10만 명 이상의 인원이 주둔하며 3개월 이상의 장기 농성을 벌였다. 이를 위해서는 막대한 식량 비축 공간과 병력의 기동로, 거주 공간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영성자산성은 둘레가 약 2.5km 정도에 불과한 소규모 산성이다. 성 내부는 평지가 적고 좁은 협곡으로 이루어져 있어 10만 대군이 주둔하기에는 턱없이 협소하다. 2.5km의 둘레 안에 10만 명이 들어간다면 1인당 점유 면적이 생존 불가능한 수준으로 밀집되어야 하며, 이는 전술적 기동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방어에 취약한 지형 조건
안시성은 당 태종이 "산이 험하고 성이 견고하다"고 평가할 만큼 천혜의 요새였다. 그러나 영성자산성은 해발 고도가 낮고 산세가 완만하다. 특히 성벽은 토성(土城) 위주로 축조되어 있어 당나라의 충차(衝車)나 포차(抛車)와 같은 공성 무기의 집중 공격을 견뎌내기 어렵다. 성벽의 너비가 2m에 불과한 곳도 있어 대규모 공성전을 치르기에는 그 견고함이 현저히 떨어진다.
토산(土山)의 실체적 진실 부재
안시성 전투의 가장 극적인 장면은 당나라가 성을 함락시키기 위해 60일 동안 연인원 50만 명을 동원하여 쌓은 거대한 토산을 고구려군이 탈취한 사건이다. 영성자산성 동남쪽에 인공 토산의 흔적으로 추정되는 흙더미가 존재한다고 하나, 그 규모는 너비 20m 정도에 불과하다. 이는 대규모 토산이라기보다는 성벽의 붕괴된 잔해나 자연적인 언덕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50만 명이 60일간 쌓은 토산이 현재의 미미한 흔적으로 남았다는 것은 설득력이 부족하다.
문헌적 고증 I: 『열하일기』와 박지원의 증언
조선 후기 실학자 연암 박지원은 1780년 청나라 건륭제의 칠순 잔치를 축하하는 사절단으로 북경을 다녀오면서 『열하일기』를 저술하였다. 그는 직접 요동과 요서 지역을 답사하며 당시 조선 선비들이 가지고 있던 잘못된 지리 인식을 통렬히 비판하였다. 그의 기록은 안시성의 위치를 비정하는 데 있어 가장 구체적이고 현장감 있는 1차 사료의 가치를 지닌다.

박지원은 『열하일기』 「도강록(渡江錄)」에서 안시성의 위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명확히 기록하였다. "이른바 옛 안시성은 개평현 동북 70리에 있다(古安市城 在蓋平縣 東北七十里)."
이 구절에서 핵심은 '개평현'이 어디인가 하는 점이다.
박지원의 기록을 현대 지리에 대입해보면, 하북성 개평부에서 동북쪽으로 70리를 가면 탕지보(湯池堡)라는 지명이 나타난다. 탕지보는 천령(天嶺) 또는 천산(天山)이라 불리는 산자락 언저리에 위치하며, 이곳이 바로 고구려의 안시성이라는 것이다.
'탕지(湯池)'라는 지명은 '철옹성(鐵甕城)'과 짝을 이루는 '금성탕지(金城湯池)'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는 끓는 물이 있는 해자(垓字)를 두른 성이라는 뜻으로, 그만큼 방어력이 뛰어난 요새였음을 방증하는 지명이다.

문헌적 고증 II: 『환단고기』와 민족 사서의 기록
『환단고기』는 지명 비정에 있어서 중국의 고대 지리지나 『열하일기』와 놀라울 정도로 일치하는 맥락을 보여준다. 특히 「태백일사」는 안시성의 위치와 그 역사적 기원에 대해 구체적인 정보를 제공한다.
『환단고기』는 안시성을 탕지보(湯池堡)로 특정하면서, 그 이칭(異稱)으로 안촌홀(安寸忽)과 변한성(弁韓城)을 제시한다.
안촌홀(安寸忽): 고구려어에서 '홀(忽)'은 성(城)이나 고을을 뜻한다. '안촌'은 '안시'와 음운적으로 상통하며, 이는 안시성이 고구려 고유의 지명을 한자로 차용한 것임을 시사한다.
변한성(弁韓城): 이 기록은 안시성의 역사를 단군조선 시대로 끌어올린다. 변한성은 삼한(三韓) 중 하나인 번한(番韓)의 수도였으며, 『신지비사(神誌祕詞)』에 나오는 오덕지(五德地) 중 하나로 묘사된다.
이는 안시성이 고구려 때 급조된 성이 아니라, 고조선 시대부터 이어져 온 요서 지역의 핵심 통치 거점이자 천혜의 요새였음을 의미한다.
지리적 고증: 고대 수계(水系)와 안시성의 관계
안시성의 위치를 확정하는 데 있어 가장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증거는 강(江)의 흐름이다. 고대 중국 사료들은 안시성과 강의 관계를 매우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한서(漢書)』 「지리지」 요동군 조에는 안시성의 위치를 가늠할 수 있는 결정적인 기록이 있다.
"대요수(大遼水)는 새외(塞外)에서 나와 남쪽으로 안시(安市)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南至安市入海). 1,250리를 흐른다."
이 기록은 다음 두 가지 사실을 시사한다.
안시성은 큰 강이 바다로 들어가는 하구(河口) 근처에 위치해야 한다.
대요수는 안시성을 지나 바다로 들어간다.
현재의 영성자산성(해성)은 내륙 깊숙한 곳에 위치하며, 요하 본류와는 거리가 멀다. 또한 요하 동쪽에 치우쳐 있어 "남쪽으로 흘러 안시에 이른다"는 수계 설명과 부합하지 않는다. 반면, 하북성 탕지보(개평) 설을 따르면, 여기서 말하는 대요수는 현재의 요하가 아니라 고대의 난하(灤河)를 지칭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난하는 하북성 동부를 흐르며 당산 인근을 지나 발해만으로 들어간다.

『신당서』와 『통전』의 마자수(馬訾水) 기록
『신당서』 「가리지」와 『통전』 등은 압록수(마자수)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마자수(일명 압록수)는... 서남쪽으로 흘러 안시(安市)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이 기록은 현대 지리학으로 볼 때 매우 충격적이다. 우리가 아는 압록강(신의주-단동)은 서남쪽으로 흘러 서해로 들어가지만, 그 하구에 안시성이 있다는 기록은 현재의 통설(해성 안시성)과도, 한반도 내 안시성 설과도 맞지 않는다.
이는 고대의 '압록수'가 현재의 압록강이 아니라 요서 지역을 흐르던 다른 큰 강(난하 혹은 대릉하 등)을 지칭하는 명칭이었음을 강력하게 시사한다. 『삼국유사』 등에는 요하를 압록이라 부르기도 했다는 기록이 있어, 고대 지명의 이동과 혼용을 고려해야 한다. 하북성 탕지보가 안시성이라면, 그 앞을 흐르며 바다로 들어가는 강(난하 수계)이 당시에는 대요수 혹은 압록수로 불렸을 것이다. 이는 박지원이 『열하일기』에서 "요동에도 하나의 평양이 있었다"고 한탄한 것과 맥락을 같이 한다. 즉, 강 이름과 지명이 고구려의 강역 변동에 따라 이동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전략적 재구성: 645년 고당(高唐) 전쟁의 실체
안시성의 위치를 하북성 탕지보로 비정할 때, 645년 당 태종의 침공 경로는 기존의 해석과는 완전히 다른 양상을 띠게 된다.
전쟁의 무대: 요서 회랑(Liaoxi Corridor)
기존 설에 따르면 당 태종은 요하(현재의 랴오허)를 건너 요동성(요양), 백암성(연주)을 함락시키고 남쪽의 안시성(해성)으로 진격했다. 그러나 이 경로는 보급선이 지나치게 길어지고 배후가 노출되는 위험이 있다.
반면, 하북성 설을 따르면 전쟁의 주 무대는 요서 회랑이 된다.
진격로의 합리성: 당나라의 수도 장안이나 낙양에서 출발한 대군이 북경(유주)을 거쳐 하북성 동부의 개평(안시성)으로 진격하는 것은 가장 최단 거리이며, 보급이 용이한 경로이다.
보급선의 안정성: 하북성 내륙은 당나라의 본토와 인접해 있어 50만 대군(전투병 및 보급부대 포함)의 식량과 물자를 조달하기에 훨씬 유리하다. 요동반도 깊숙한 곳까지 대규모 물자를 수송하는 것은 고대 병참술로서는 엄청난 부담이다.
토산 축조의 지질학적 개연성
안시성 전투의 핵심인 토산 축조 역시 하북성 탕지보 일대의 지형에서 더 설득력을 얻는다.
지형적 이점: 탕지보 인근은 천산(天山) 산맥의 끝자락과 평원이 만나는 지점으로, 산악 지형을 이용하여 토산을 쌓고 성을 내려다보며 공격하기에 적합한 지형이다.
영성자산성의 모순 해결: 평지에 가까운 영성자산성 주변에서 흙을 퍼 날라 성보다 높은 산을 쌓는 것보다, 이미 존재하는 구릉이나 산세를 이용하여 토산을 구축하는 것이 전술적으로 타당하다. 박지원이 언급한 "천령 언저리"라는 지형 묘사는 이러한 전술적 행동이 가능했음을 뒷받침한다.

결론: 안시성의 진정한 위치와 역사적 의의
안시성은 하북성 개평부 탕지보이다
안시성의 위치는 현재 통설인 요령성 해성시 영성자산성이 아니라, 하북성 당산시(唐山市) 개평구(開平區) 동북쪽 70리 지점에 위치한 탕지보(湯池堡)로 비정하는 것이 타당하다.
문헌적 일치: 『열하일기』와 『환단고기』는 정확히 "개평현 동북 70리"를 지목하고 있으며, 이때의 개평은 요서의 개평부이다.
수계적 일치: 『한서』, 『신당서』 등의 "대요수/압록수가 안시에서 바다로 들어간다"는 기록은 안시성이 큰 강의 하구(난하 하구 인근)에 위치했음을 증명한다. 탕지보는 이러한 수계 지리적 조건에 부합한다.
역사 지리의 복원과 양만춘의 유산
안시성이 하북성에 있었다는 사실은 고구려의 강역이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서쪽으로 뻗어 있었음을 시사한다. 고구려는 요하(현재의 랴오허)를 국경으로 삼은 것이 아니라, 난하(灤河) 유역을 포함한 요서 지역을 실효적으로 지배하며 중원 세력과 대등하게 경쟁했던 제국이었다.
양만춘 장군이 지켜낸 안시성은 단순한 방어 거점이 아니라, 고조선 번한의 수도였던 변한성의 역사를 계승한 민족의 성지(聖地)이자, 중원 세력의 동진을 막아내는 최전방의 관문(Gatekeeper)이었다. 탕지보에서의 승리는 고구려가 요서 지역의 패권을 수성하고 동북아의 균형자 역할을 수행했음을 증명하는 역사적 쾌거이다.
맺음말
이 글을 통해 『환단고기』와 『열하일기』의 기록이 단순한 야사(野史)나 감상적 기록이 아니라, 고대 지리지의 모순을 해결할 수 있는 중요한 열쇠임을 확인하였다. 향후 안시성 연구는 영성자산성에 국한된 시각에서 벗어나, 하북성 당산시와 난하 일대에 대한 정밀한 현지 답사와 고고학적 조사를 통해 고구려 서방 강역의 실체를 규명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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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화 전문기자 multikorea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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