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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제현 신사비 : 일본 학자가 벌인 희대의 역사 대사기극

낙랑군 점제현 신사비(이하 '점제현 신사비' 또는 '점제비')는 한국 고대사, 특히 한사군(漢四郡)의 위치 비정과 관련된 논쟁의 중심에 서 있는 유물이다. 1914년 평안남도 용강군(현 온천군)에서 발견된 이 비석은 서기 85년(후한 원화 2년)이라는 명확한 연대를 가지고 있어, 전통적으로 한반도 서북부 지역이 한(漢) 제국의 직접적인 행정 지배 하에 있었음을 입증하는 이른바 '낙랑군 재평양설(樂浪郡 在平壤說)'의 가장 강력한 물증으로 기능해 왔다.   

그러나 비석의 발견 주체가 일제강점기 식민사관 확립에 앞장섰던 조선총독부 고적조사단이었다는 점, 그리고 발견 당시의 정황과 비석의 물리적 특성에 대한 의문점들은 지난 1세기 동안 끊임없는 진위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위당 정인보(鄭寅普)를 필두로 한 민족사학계와 북한 학계는 이 비석이 일제에 의해 조작되었거나 중국 대륙으로부터 이입(移入)된 것이라고 주장하며, 이를 통해 낙랑군의 위치를 한반도 밖으로 비정하려는 시도를 지속해 왔다.

점제현 신사비는 화강암 자연석을 다듬어 만든 비석으로, 높이 약 151cm, 너비 약 109cm, 두께 약 12~13cm의 불규칙한 형태를 띠고 있다. 비석의 표면은 평평하게 연마되었으며, 그 위에 예서(隸書)로 비문을 새겼다. 비문은 점제현의 현령(縣令)이 지역의 산신(山神)에게 제사를 지내며 풍요와 안녕을 기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1913~1914년: 이마니시 류와 '신의 손'
이 비석의 발견은 당시 조선총독부의 주도하에 진행된 고적조사 사업의 일환으로 이루어졌다. 발견의 주역은 도쿄제국대학 교수이자 식민사학의 거두로 불리는 이마니시 류(今西龍)였다. 1913년, 평안남도 일대를 조사하던 그는 용강군 해운면의 평야 지대에서 이 비석을 발견했다고 보고했다.   

당시는 일제가 한일 병합(1910) 직후 식민 통치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조선은 고대부터 중국의 식민지(한사군)로 시작되었다"는 타율성론을 학문적으로 뒷받침하려던 시기였다.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던 시점에, 낙랑군 속현의 이름인 '점제(黏蟬)'가 명기된 비석이 발견된 것은 일제 학계로서는 그야말로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세키노 타다시(關野貞)가 낙랑 고분을 발굴하며 낙랑군 재평양설의 기초를 닦았다면, 이마니시 류는 점제현 신사비 발견을 통해 이를 '움직일 수 없는 사실'로 굳히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 발견 과정은 초기부터 여러 의구심을 자아냈다. 2,0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았던 비석이, 일본인 학자가 조사를 시작하자마자 발견되었다는 점은 우연이라기엔 지나치게 작위적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이는 세키노 타다시와 이마니시 류가 가는 곳마다 한사군 유물이 쏟아져 나온다는 의미에서 그들을 비꼬는 "신의 손"이라는 별칭이 붙게 된 배경이기도 하다.   

조작설 및 이동설
비석이 발견된 직후부터, 그리고 해방 이후 본격적으로 이 비석이 현지 토착 유물이 아니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는 단순히 비석의 진위를 따지는 것을 넘어, 낙랑군의 위치를 재검토하는 거대한 역사 전쟁의 서막이었다.

위당 정인보의 문헌학적·정황적 비판
민족사학자 위당 정인보는 그의 저서 《조선사연구(朝鮮史硏究)》와 신문 연재를 통해 점제현 신사비에 대한 강력한 의혹을 제기했다. 그의 비판은 크게 발견 정황의 부자연스러움과 비문 내용의 지리적 모순으로 요약된다.

발견 정황의 모순: "증인 없는 발견"
정인보는 조선총독부가 발간한 《조선고적도보》에 실린 점제현 신사비 사진을 분석하며 예리한 지적을 남겼다. 역사적으로 중대한 발견 현장을 기록한 사진에 학자나 지역의 책임자(면장 등)는 배제된 채, 10세 전후의 어린아이만이 비석 옆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정인보는 이를 두고 "중요한 증언을 해줄 성인을 배제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를 세워 사진을 찍음으로써 발견의 진실성을 호도하려 했다"고 비판했다.   

또한, 그는 현지 조사를 통해 "일본인들이 왔다 갔다 하더니 이전에 없던 비석이 갑자기 생겼다"는 주민들의 증언을 채록했다. 이는 비석이 오랫동안 그 자리에 매몰되어 있거나 서 있었던 것이 아니라, 조사단이 활동하던 시점에 외부로부터 유입되었을 가능성을 강하게 시사한다.   

비문 내용의 분석: "덕배대숭(德配代嵩)"의 미스터리
정인보는 비문에 새겨진 '덕배대숭(德配代嵩)'이라는 문구에 주목했다. 이는 "덕이 대산(태산)과 숭산에 짝한다"는 뜻으로, 산신(山神)의 위엄을 중국의 오악(五嶽) 중 으뜸인 태산과 숭산에 비견한 것이다. 정인보는 중국인들이 타국의 산천을 제사 지낼 때, 그 대상이 웅장한 명산이 아니고서는 결코 이러한 최상급의 수사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러나 점제현 신사비가 발견된 평안남도 용강군 성현리 일대는 웅장한 산세와는 거리가 먼, 사방이 트인 평야 지대이거나 낮은 구릉지대이다. 정인보는 "허허벌판에 서 있는 비석에 태산과 숭산을 들먹이는 것은 비문의 내용과 비석이 서 있는 지리적 환경이 전혀 일치하지 않음을 보여준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 비문이 묘사하는 지형이 평안도가 아닌, 중국 요서 지역의 명산, 예컨대 의무려산(醫巫閭山)이나 갈석산 일대일 것이라고 추론했다. 

손보기 교수의 갈석산 암석 비교 및 이동설
연세대학교 손보기(孫寶基) 교수(사진)는 정인보의 심증적 의혹을 과학적, 실증적 차원으로 끌어올렸다. 그는 고고학적 현장 조사와 암석학적 비교를 통해 비석의 원산지가 한반도가 아님을 주장했다.

손보기 교수는 중국 하북성 창려현(昌黎縣)에 위치한 갈석산을 직접 답사하여 그곳의 암석과 점제현 신사비의 석질을 비교했다. 그 결과, 점제비의 화강암 재질이 평안도 용강 일대의 화강암과는 확연히 다르며, 오히려 갈석산의 화강암과 시각적, 물리적 특성이 일치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손 교수가 갈석산 현장에서 점제현 신사비의 크기와 형태에 딱 들어맞는 채석 흔적(바위를 떼어낸 자국)을 발견했다는 점이다. 그는 "비석의 깨진 부분과 갈석산의 떼어낸 자국을 맞춰보면 딱 맞는다"고 증언하며, 이 비석이 갈석산에서 채석되어 배를 통해 한반도로 옮겨졌음을 주장했다.   

지리학적 모순: "바다였던 곳에 세워진 비석"
손 교수는 비석이 발견된 성현리 지역의 고지형(古地形)을 분석했다. 그의 연구에 따르면, 2,000년 전 낙랑 시대에 해당 지역은 해수면이 지금보다 높아 바닷물이 들어오는 갯벌이거나 얕은 바다였다. 산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신성한 비석을 밀물이 들어오면 잠길 수도 있는 저지대 갯벌에 세운다는 것은 고대 신앙 의례상 불가능한 일이다.   

또한, 비석이 향하고 있는 방향이 서북쪽, 즉 갈석산이 있는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는 점도 지적되었다. 이는 비석이 원래 갈석산에 있었거나, 적어도 그곳을 향해 제례를 올리던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함을 시사한다. 손 교수는 일제가 배로 비석을 실어오다가 내륙 깊숙이 운반하지 못하고 해안가에서 멀지 않은 곳(약 4km 지점)에 비석을 방치하거나 급하게 세운 것이 현재의 위치라고 설명했다.   

북한 학계의 과학적 검증과 문성재의 연구
북한 학계는 1990년대 이후 주체사관의 확립과 단군릉 발굴 등에 힘입어 낙랑군 평양설을 전면 부정하는 연구를 진행했다. 이 과정에서 점제현 신사비에 대한 자연과학적 분석이 이루어졌다.

1995년 북한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는 점제현 신사비의 암석 성분을 정밀 분석한 보고서를 발표했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화강암 생성 연대의 불일치: 방사성 동위원소 측정 결과, 점제현 신사비의 화강암 생성 연대는 약 1억 2,900만 년 전으로 나타났다. 반면, 비석이 발견된 용강군 일대(마영, 오석산 등)의 화강암은 1억 100만 년~1억 700만 년 전에 생성된 것으로 측정되었다. 약 2,000만 년 이상의 지질학적 연대 차이는 이 비석이 용강군 현지의 돌로 만들어지지 않았음을 과학적으로 입증한다.

화학 조성의 차이: 비석의 광물 조성과 화학 성분은 대동강 유역의 화강암보다는 중국 요하(遼河) 및 난하 유역, 즉 요서 지방의 화강암 특성과 유사한 것으로 밝혀졌다.

시멘트 사용 흔적: 조작의 결정적 증거?
북한 학계의 조사에서 가장 논란이 된 부분은 비석의 기초(Base) 부분에서 시멘트(Cement) 성분이 검출되었다는 점이다. 2,000년 전 후한 시대에 현대적 포틀랜드 시멘트가 사용되었을 리 만무하다. 북한 학계는 이를 두고 1910년대 일제 고적조사단이 비석을 타지에서 옮겨와 세우는 과정에서 비석을 고정하기 위해 시멘트를 섞은 콘크리트를 타설한 흔적이라고 결론지었다. 이는 비석이 '발견'된 것이 아니라 '설치'되었다는 조작설의 결정적 물증으로 제시되었다.   

문성재의 '밀수품' 이론
문성재 박사는 이러한 북한의 연구 결과와 정인보의 주장을 종합하여, 저서 《한사군은 중국에 있었다》에서 점제현 신사비를 "제3의 장소에서 밀반입된 장물 혹은 밀수품"으로 규정했다. 그는 일제가 낙랑군의 위치를 조작하기 위해 조직적으로 유물을 이입했으며, 점제비뿐만 아니라 평양 일대에서 출토된 봉니(封泥) 등도 조작되거나 타지에서 가져온 것일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한다.   

점제현 신사비에 아이를 세워놓고 사진을 찍는 장면 (Ai생성이미지)

움직일 수 없는 증거'에서 '조작의 이정표'로
결론적으로 점제현 신사비는 한때 '낙랑군 재평양설'을 뒷받침하던 철옹성 같은 증거였으나, 현대에 이르러서는 오히려 식민사학의 자의적 역사 왜곡을 드러내는 상징적 유물로 재평가받고 있다. 과학적 성분 분석과 지형학적 모순, 그리고 발견 당시의 정황 증거들은 이 비석이 본래의 자리를 떠나 정치적 목적에 의해 '이식'되었을 가능성을 강력하게 시사한다.

결국 이 비석은 고대사의 진실을 알리는 기록물을 넘어, 역사가 권력에 의해 어떻게 편집될 수 있는지, 그리고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 어떠한 비판적 검증이 필요한지를 보여주는 생생한 유산이라 할 수 있다.

 

박찬화 전문기자  multikorea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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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댓글 17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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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jrflatjr 2026-02-27 10:16:48

    서북지리연구소 신석재

    에고, 이형우란 왜놈대가리는 쉼을 모르네.   삭제

    • 이형우 2026-02-25 15:33:03

      박찬화 기자는 열하일기에 없는 내용을 기사에 썼다.
      왜 아무 응답이 없나? 허위 정보를 썼으면 해명하고 정정하는 게 올바른 도리 아닌가?
      그냥 쌩까고 말 건가? 진짜 사이비 소리 듣고 싶은가? 반드시 해명해라.   삭제

      • 이형우 2026-02-25 15:29:45

        이 기사와는 별도의 얘기지만 한마디하지 않을 수 없다.
        매림 이완영이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 김호섭이 2016년 요서 답사에서 "점이라도 찍어와라 이 뭐뭐들아"라고 했다는 말 녹취가 있다고 했다.
        이완영은 그 요서 답사에 가지 않았다. 이덕일이나 문성재나 황순종이나 누구든 녹취가 있다면 공개해라. 이 말을 꼭 전해다오,
        이덕일이 약장수 만능통치약 팔듯이 떠벌인 세월이 10년이다. 진상을 보여다오,
        녹취가 있으면 공개해라. 나는 이덕일의 취중담이거나 착란이라고 본다. 반드시 공개해라.   삭제

        • 서북지리연구소 2026-02-25 10:04:40

          박찬화가 나는 물론 개왜놈 이형우에게 속절없이 비난받는 근본적인 이유는 역사지리 지식이 잘못 인식되어 있고 동시에 일본놈이 조작한 지리를 맹종하기 때문이다.

          즉 교치 군.현 기록을 원래 설치 기록이라 잘못 이해할 뿐만 아니라 그것도 모자라는지 지금의 평안도 용강이나 하북성 창려 등의 지리가 고대부터였다는 일본놈의 조작질을 수용하는 극히 우습기 짝이 없는 지리 인식을 가지고 있다.

          결국 지금의 요녕성 전체 지리는 일본놈이 1875 년부터 동쪽으로 이동.위작한 지리이기 때문에 낙랑군은 쌍산자 부근이고 교치 지점은 당산인 것이다.   삭제

          • 이형우 2026-02-25 07:19:13

            박찬화 기자는 점제현 신사비의 화강암 생성 연대, 비석이 발견된 용강군 일대(마영, 오석산 등)의 화강암 생성 연대를 측정한 방법이 <방사성 동위원소 측정> 방법이라고 썼다.
            그런데 북측에서 낸 책에는 <핵분열 흔적법>을 사용하였다고 나온다. <방사성 동위원소 측정 방법>은 탄소를 이용한 것이고, <핵분열 흔적법>은 우라늄을 이용한 것이다.
            박찬화 기자는 왜 확인도 제대로 하지 않고 다른 얘기를 하는가? 이런 오류는 박찬화 기자가 AI를 이용하여 기사를 작성한다고 의심하게끔 한다.   삭제

            • 이형우 2026-02-24 22:55:09

              약 4km라면 10리 거리가 아닌가?

              낙랑군이 어디인가 삼국사기를 보자
              「高句麗本紀」대무신왕 27년

              “秋九月, 漢光武帝遣兵渡海伐樂浪, 取其地爲郡縣, 薩水已南屬漢”
              27년(44) 가을 9월에 한나라의 광무제가 병력을 보내 바다를 건너 낙랑을 치고, 그 땅을 빼앗아 군현으로 삼으니, 살수 이남이 한(漢)에 속하게 되었다.

              살수는 청천강의 옛 이름이다.
              청천강 이남 낙랑 지역이다.   삭제

              • 이형우 2026-02-24 22:49:08

                // 2,000년 전 낙랑 시대에 해당 지역은 해수면이 지금보다 높아 바닷물이 들어오는 갯벌이거나 얕은 바다였다. //

                그렇다는 근거가 무엇인가? 그 자리에 패총이라도 발견되었는가? 아니면 규조류라도 채취가 되었는가?
                강 하구는 상류에서 내려오는 퇴적물의 영향도 있다.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자료 수치라도 제시를 하든지, 이건 뭐 누가 뭐라 카더라 하면 자기에게 유리하면 다 맞다고 가져다 쓰는 거 아닌가 말이다.
                해안가에서 약 4km 떨어진 지점이라면서. 진짜 거기가 갯벌이나 바다였을까?   삭제

                • 이형우 2026-02-24 22:44:31

                  // 손 교수는 일제가 배로 비석을 실어오다가 내륙 깊숙이 운반하지 못하고 해안가에서 멀지 않은 곳(약 4km 지점)에 비석을 방치하거나 급하게 세운 것이 현재의 위치라고 설명했다. //

                  용강에 살던 주민들에게 그 비석의 존재는 이미 알려져 있었다. 전설도 있다. 손보기 교수의 혼자 상상일 뿐이다. 박찬화 기자는 왜 팩트체크를 하지도 않고 무가내로 기사를 쓰나?   삭제

                  • 이형우 2026-02-24 22:35:26

                    // 1910년대 일제 고적조사단이 비석을 고정하기 위해 시멘트를 섞은 콘크리트를 타설한 흔적 //

                    정확한 판단이다. 단 중간에 <비석을 타지에서 옮겨와> 세웠다는 표현은 억측이다. 2000여년 전에 시멘트라는 게 있었나?   삭제

                    • 이형우 2026-02-24 22:28:13

                      // 일제가 낙랑군의 위치를 조작하기 위해 조직적으로 유물을 이입했으며... 평양 일대에서 출토된 봉니(封泥) 등도 조작되거나 타지에서 가져온 것일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한다. //

                      윗글은 박찬화 기자가 문성재의 주장을 받아쓰기한 것이다. 특히 <조직적으로 유물을 이입>했다는 건 관야정 일기를 이용하여 문성재가 처음 제기한 주장이다.
                      문성재는 관야정일기의 원문을 변조해서 저런 주장을 했다. 그 순간 문성재는 사이비가 된 것이다. 사이비는 다른 게 아니라 속임수를 쓰는 게 사이비이다.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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