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필산(駐蹕山)전투는 645년(보장왕 4년) 6월 당 태종, 이세적이 지휘하는 당의 대군과 고연수, 고정의가 이끄는 고구려의 15만 대군이 주필산에서 격돌한 대규모 회전이다. 이 전투에서 당이 승리하였고, 전황은 안시성 전투로 이어진다. 1차 고당 전쟁의 일부이다. (위키피디아)
645년에 벌어진 고구려와 당의 전쟁은 보통 이렇게 기억된다. 전쟁 초반 당군은 파죽지세로 요동 방어선의 여러 성을 함락했고, 이어 고구려 중앙군 15만 대군마저 주필산 전투에서 단숨에 격파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곧이어 벌어진 안시성 전투에서만 당군이 뜻밖의 저항에 부딪혀 고전하다 철군했다고 알려져 있다.
지금까지 우리 학계의 통설도 마찬가지였다. 주필산 전투에서 당 태종이 대승을 거두었고 이후 안시성 전투에서만 패배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또한 주필산 전투시 15만 병력의 총지휘관이었던 고연수 장군은 오늘날 ‘패장’ 혹은 ‘항복한 장수’라는 굴레를 뒤집어쓰고 있다. 중국 사서에는 그가 무릎을 꿇고 당 태종에게 목숨을 구걸했다는 기록까지 남아 있다. 이 기록은 곧바로 그의 생애 전체를 대굴욕과 치욕으로 덮어버렸다.
한국의 대중 온라인 백과사전들도 이를 그대로 따르고, 심지어 중국의 발해 관련 전시관에서도 이러한 항복 서사를 전시 자료로 활용하고 있다는 것이 놀랍다.

필자가 직접 가서 확인한 발해상경유지박물관에 전시된 발해사 관련 글을 보면, 말갈인이며 고구려 북부욕살이었던 고연수가 당나라에 항복하여 당 태종으로부터 벼슬을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을 마주한 순간부터 필자의 머릿 속에서는 고연수 장군의 억울한 모습이 떠나지 않았다.
중국은 당시 어찌되었던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최후의 승자가 되어 고구려와의 전쟁사를 철저히 왜곡시켰다. 이제 우리는 그 굴레를 벗겨내야 한다. 고연수 장군의 이름을 다시 세우고, 주필산 전투의 진실을 바로잡는 것이야말로 오늘 우리 후손이 해야 할 역사적 과제다.
의문투성이의 기록
핵심을 요약해보면 이렇다. 당 태종이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공해 안시성에 이르자, 고구려의 북부 욕살 고연수와 남부 욕살 고혜진이 15만의 주력군을 이끌고 안시성 방면으로 진격했다.
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두 장수의 군대는 당군에게 포위되어 더 이상 저항할 수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때) 고연수와 고혜진의 부대는 포위되어 더 이상 저항할 수 없었고, 결국 남은 군사 3만 6천여 명을 이끌고 항복했다. 당 태종 이세민은 이들 가운데 욕살 이하 지휘관 3천5백 명을 선발해 당나라 내지로 이주시켰고, 나머지 병사들은 모두 석방해 평양으로 돌아가게 했다. 그러나 말갈인 3천3백 명은 전원 생매장했다. 당군은 이 과정에서 말 5만 필, 소 5만 두, 명광 갑옷 1만 벌을 비롯해 각종 군수품을 노획했다고 한다. 이세민은 전투가 벌어진 산의 이름을 ‘주필산’이라 개명하고, 고연수에게는 홍려경, 고혜진에게는 사농경의 벼슬을 내렸다.

영화 '안시성'포스터 : 영화는 중국 기록 그대로 주필산 전투에서 큰 패배를 한 것으로 그리고 있다. (사진제공=(주)NEW)
주필산 전투에 대한 이러한 중국 측 기록은 여러모로 의문투성이이다.
우선 사서에는 이세적과 장손무기 등이 이끈 3~5만 명의 병력이 고구려 15만 대군을 순식간에 괴멸시켰다고만 전한다. 그러나 정작 어떻게 전투가 전개되었는지, 어떤 전술과 과정이 있었는지는 전혀 설명하지 않는다. 만약 당군의 위대한 승리였다면 그 전투 장면을 세밀하게 묘사하며 오히려 과장했을 법한데, 그 부분은 완전히 비어 있다.
사서에 따르면 주필산에서 고구려군은 2만 병력을 잃고, 말갈 병력 3,300명이 생매장당했으며, 장수 3,500명이 포로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남은 수만 병력은 모두 석방했다고 전한다. 《구당서》에서는 그 숫자가 15만이라 하고, 《신당서》에서는 3만이라 한다. 문제는 바로 이 대목이다.
3만이건 15만이건 엄청난 규모의 포로를 잡아놓고 왜 풀어주었겠는가? 전술적 목적이 없다면 불가능한 조치다. 더구나 풀려난 고구려 병사들이 돌아가 다른 성에서 다시 싸웠을 가능성이 높은데, 이들을 석방했다는 것은 군사적으로 납득하기 어렵다.
패전했다고 해도 죽을 힘을 다해 싸워야 하는 주력군이 한 번의 패배 후 순식간에 포로로 잡혔다는 것은 군사적으로 납득하기 어렵다.

또한 노획품 기록도 황당하다. 말 5만 필, 소 5만 두, 명광 갑옷 1만 벌을 얻었다는 것이다. 전쟁사에 기록된 말 5만 필과 소 5만 두는 군수적 현실을 고려할 때 거의 허구에 가깝다. 주필산 일대에서 이 정도 규모의 가축과 장비를 운반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게다가 이어지는 기록에서는 당 태종이 겨울철 식량이 떨어져 퇴각했다고 밝히는데, 만약 실제로 그렇게 엄청난 양의 전리품을 차지했다면 왜 퇴각 시 식량난에 시달렸겠는가. 스스로 앞뒤가 맞지 않는 서술이다.
무엇보다도, 그렇게 압도적인 대승을 거뒀다면 왜 곧장 평양으로 진격하지 않고 주필산에 머물다가 안시성으로 방향을 틀었는가? 이는 “주필산 전투가 당의 일방적 대승이었다”는 서사가 설득력을 잃게 한다.

학계에서는 적어도 한 가지 사실만큼은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고구려 주력군이 주필산에서 단 한 번 패배로 전멸하고 포로가 되었다는 중국의 기록은 사실일 수 없다는 점이다. 그 막대한 병력은 어떤 방식으로든 재편되어 안시성 전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지 않았다면, 당군이 주필산에서 거둔 승리를 발판으로 평양까지 밀고 들어가지 못한 이유를 설명할 길이 없다. 오히려 그 모순 때문에 “당군이 주필산에서 대승을 거두었다”는 기록 자체가 설득력을 잃는다.
이어 15만 대군을 거느린 고연수가 포위당하자 결국 고혜진과 함께 군문으로 기어들어와 항복을 청하며 목숨을 구걸했다고 기록한다. 심지어 당나라 벼슬을 받고 종군했다는 내용도 모순투성이다. 《구당서》에는 고연수가 홍려경(鴻臚卿)에 임명되었다고 하나, 실제로는 이후 전쟁에서 그의 이름이 제대로 나타나지 않는다. 또한 그가 당군과 함께 안시성 전투에 참여했다는 서술은, 같은 사서 안에서조차 안시성 전투의 결말을 설명하는 부분과 충돌한다. 기록은 그가 가족을 걱정해 평양성 공격을 건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하면서도, 이후의 행적은 흐릿하다. 결국 당 태종과 함께 귀환 도중 병을 얻어 죽었다는 결말로 맺는데, 이는 항복 장수의 비극적 최후라는 ‘정형화된 패턴’에 불과하다.
이러한 중국측 기록의 특징은, ‘황제의 친정은 반드시 승리해야 한다’는 전제에서 비롯된다. 황제가 직접 출전했는데 패배했다고 쓸 수는 없으니, 적장은 반드시 무릎 꿇고 항복해야 한다. 전투가 아무리 팽팽했어도, 심지어 결과적으로 당군이 퇴각했어도, 기록은 ‘승리와 항복’으로 귀결되어야 했다. 고연수 장군이 당 태종의 체면을 세워주는 희생양으로 쓰인 것이다.

주필산 전투의 진실
당군이 주필산에서 대승을 거두었다는 기록은 앞뒤가 맞지 않으며, 설득력을 잃는다. 그렇다면 오히려 주필산에서 승리를 거둔 쪽은 고구려군이었다고 보는 것이 훨씬 합리적이다.
실제로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를 비롯한 우리 전승 기록에는 이 전투의 진상이 구체적으로 전해진다. 그 기록은 세밀하고 일관성이 있으며, 단순한 설화가 아니라 당시의 전황을 생생히 증언하고 있다.
그 주요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당 태종 이세민이 안시성을 공략하기 위해 군을 일으켰다. 당태종의 수십만 대군이 안시성에 도착했다. 고연수는 안시성과 연결되는 보루를 쌓고 험준한 산지에 진을 치며 대비했다. 그는 군을 이끌고 나가 당군과 맞섰다.
당군은 진영을 고수했으나 고구려군의 기습에 시달렸고, 군량과 보급은 점점 어려워졌다. 세민은 군을 나누어 포위하고 유인하는 계략을 썼지만, 고구려군은 움직이지 않았다. 세민은 여러 술책으로 고구려군을 꾀었으나, 고구려는 매복과 기습으로 대응해 당군의 사상자가 크게 늘어났다.
전투는 장기전으로 이어졌다. 세민은 고연수에게 재물과 보화를 내세워 회유했으나, 고연수는 “너희는 음란하고 악한 자들이라 그 죄가 많다”며 단호히 거절했다. 그는 유혹을 뿌리치고 자국의 법과 충의를 지키며 싸움을 이어갔다.
결국 당군은 성을 함락하지 못했고, 세민은 패배 직전까지 몰렸다. 요동의 보루와 진지를 모두 버린 채 철수해야 했다. 전쟁이 끝난 뒤, 세민은 “온갖 꾀를 다 내었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고 한탄했지만 후회해도 소용이 없었다.
이는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고연수와 고혜진은 주필산 전투에서 당군을 수차례 압박했고, 당 태종을 궁지로 몰아넣었다. 분명한 것은, 중국 정사와 달리 고연수를 ‘항복자’가 아니라 끝까지 싸운 지휘관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문제는 이처럼 서로 다른 기록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우리는 오랫동안 중국 정사만을 ‘사실’로 받아들여왔다는 것이다. 나무위키 같은 대중 플랫폼은 태백일사에 대한 서술을 “위서이므로 신빙성이 없다”라고 단정하면서, 중국 정사의 항복 기록은 아무런 비판 없이 사실로 전한다.
이제는 다시 물어야 한다. 그는 정말 항복했는가, 아니면 황제의 권위를 위해 억울하게 굴복자로 기록된 것인가. 역사는 승자의 기록일 뿐이라는 말은 식상하지만, 패자의 억울함을 푸는 것은 후손의 의무다. 고연수는 단순한 패장이 아니었다. 그는 북부 욕살로서 남부욕할 고혜진과 함께 고구려의 15만 대군을 지휘하며 나라를 지킨 장수였다. 안시성과 연계해 당군의 진군을 막아낸 중심축이었으며, 결국 당 태종은 평양으로 진격하지 못한 채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고연수 장군의 명예회복은 곧 고구려사의 주권 회복이다. 항복의 낙인을 지우고, 그를 고구려 항전사의 주역으로 재평가해야 한다. 우리는 더 이상 “항복 장수”라는 굴레에 묶인 채 자존을 꺾여서는 안 된다. 고연수는 항복자가 아니라, 고구려의 수호자였다. 그의 이름을 되찾는 일은, 역사의 진실을 되찾는 일이며, 우리 민족의 자존을 다시 세우는 길이다.
이제 후손이 선언해야 한다. 고연수의 항복 기록은 허구이며, 고연수 장군은 명예롭게 기억되어야 한다. 그리고 15만의 고구려 군의 명예도 회복시켜야 한다. 주필산 전투는 승리의 기록이었다. 이 승리가 있었기에 안시성도 함께 지킬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왜곡된 역사를 넘어 진실로 가는 첫 걸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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