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국가대표 상비군 발탁과 뮌헨 올림픽 대비 전력 수혈
우갑식(禹甲植)은 1970년대 초반 대한민국 배구계가 국제 경쟁력 제고와 신체 조건의 열세 극복을 위해 해외 거주 동포 유망주를 발굴·영입하던 정책적 흐름 속에서 전격 차출된 재일교포 출신 배구 선수이다.
1972년 3월 16일 자 중앙일보 보도에 따르면, 대한배구협회는 전날인 3월 15일 서독 뮌헨에서 개최될 제20회 하계 올림픽을 앞두고 태릉선수촌 등지에서 훈련 중이던 남자 배구 국가대표 상비군 명단에 일본 덴리대학교(천리대, 天理大学)에 재학 중이던 우갑식을 공식 보강하였다. 당시 대한배구협회가 공식 공개한 신상 정보에 따르면 그는 23세(1948~1949년생 추정)의 연령에 신장 183cm, 체중 73kg의 신체 조건을 지닌 전문 세터였다.
1970년대 초반 아시아 남자 배구는 일본이 세계 정상에 군림하고 대한민국이 그 뒤를 추격하는 구조였으며, 전술의 핵인 세터 포지션의 평균 신장은 170cm대 중반에 머무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러한 기술사적 맥락에서 180cm를 웃도는 장신 세터였던 우갑식은 전위 블로킹 벽을 견고히 유지하면서도 높은 타점에서 공격수들에게 다채로운 공격 옵션을 배급할 수 있는 전략적 대안으로 주목받았다.
당시 대한민국 체육계는 1972 뮌헨 올림픽 유도 은메달리스트인 재일교포 오승립의 사례처럼, 일본 현지의 선진 체육 인프라에서 육성된 한국 국적의 동포 선수를 적극 발탁하여 국위 선양의 주축으로 삼고자 하였다. 박진관 감독이 이끌던 당시 국가대표팀은 최종옥, 진준탁, 이인, 박기원 등 국내 최정상급 자원들을 중심으로 조직력을 정비하던 시기였으며, 우갑식의 상비군 보강은 일본 대학 배구의 기술적 장점을 대표팀 시스템에 융합하려는 시도였다.
일본 내 활동과 국적에 기인한 제도적 경계 및 정체성 전환
우갑식의 배구 경력은 전후(戰後) 재일교포 체육인들이 공통적으로 직면했던 국적과 제도의 복합적인 경계선에 위치해 있다. 일본 나라현의 명문 사립 대학인 덴리대학교 배구부에서 정통 일본 대학 리그 시스템을 이수한 그는 졸업 후 오사카를 비롯한 간사이 지역을 중심으로 실업 및 재일 한국인 클럽 배구계에서 주축 세터이자 지도자로 활약하였다. 당시 일본 배구계 내부의 평가에 따르면 그는 1972 뮌헨 올림픽 당시 일본 국가대표 후보군과 견주어도 손색없는 토스워크와 경기 운영 능력을 갖추고 있었으나, 한국 국적 보유자라는 법적 한계로 인해 일본 대표팀 발탁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했다.
반면 조국인 대한민국에서도 상비군에는 이름을 올렸으나, 일본과 한국 사이의 물리적 훈련 환경 격차와 당시 군 복무 및 국내 실업팀 연계 문제, 태릉선수촌 중심의 폐쇄적 최종 선발 구조 등으로 인해 뮌헨 올림픽 최종 12인 엔트리까지는 진입하지 못하였다. 이처럼 양국 국가대표 시스템의 틈새에서 올림픽 본선 출전이 좌절된 경험은 이후 자녀 세대의 진로 선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국적으로 인한 기회의 제한은 1990년대 초반 장녀 탄야마 미사오(丹山美沙緒)에게도 재현되었다. 오사카의 민족학교인 건국중학교(建国中学校) 배구부에서 두각을 나타낸 미사오는 일본 전국 중학 대회인 사와야카배(さわやか杯)에서 팀을 우승으로 이끌며 대회 최우수 자원으로 공인받았으나, 한국 국적으로 인해 일본 전국 중학 선발팀 명단에서 끝내 제외되었다. 자녀가 국적 차별로 인해 엘리트 체육인으로서의 성장을 가로막히는 현실을 목도한 우갑식과 그의 가족은 고뇌 끝에 귀화를 결정하였고, 미사오가 고등학교 2학년이던 시점에 가족 전체가 일본 국적을 취득하며 '탄야마(丹山)'라는 성씨를 공식 사용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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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배구를 관통하는 3대 세터 가계의 기술적 계승
우갑식이 남긴 세터로서의 기술적 유산과 지도 철학은 2세대인 자녀들과 3세대인 손녀에게로 직결되어, 한일 배구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3대 세터 가계'로 발전하였다. 우갑식의 장녀 탄야마 미사오와 차남 탄야마 요시아키(丹山禎昭)는 각각 일본 남녀 프로 배구 무대에서 굵직한 족적을 남겼으며, 손녀 탄야마 츠바키(丹山花椿)는 일본 고교 무대를 평정한 후 한국 무대에 진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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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녀 탄야마 미사오(사진)는 왼손잡이 특유의 각도 깊은 토스와 파괴력 있는 점프 서브를 겸비한 전천후 세터 겸 공격수로 활약하였다. 1996년 실업 명문 NEC 레드 로켓츠에 입단한 이후 도요보 오키스(1999~2001)와 도요타차체(2001~2004)를 거치며 일본 V-리그 정상급 공격형 세터로 군림하였으며, 제6회 V-리그에서는 서브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 이후 몽골 리그(엘침)로 진출하여 정규리그 MVP와 베스트 세터상을 동시 석권하고 동아시아선수권대회에 출전하는 등 아시아 전역을 무대로 활약한 뒤 지도자로 전향하였다.
차남 탄야마 요시아키는 아버지 우갑식의 신체적·기술적 유전자를 가장 충실하게 물려받은 대형 세터였다. 배구 지도자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배구에 입문한 그는 우에노미야 고등학교와 긴키대학교를 거쳐 2002년 명문 구단인 JT 썬더즈(현 JT 썬더즈 히로시마)에 입단하였다.
192cm에 달하는 장신 세터로서 높은 블로킹과 안정적인 경기 조율 능력을 발휘하며 2007년 러시아에서 열린 제2회 플라토노프 기념 국제 토너먼트에서 팀 우승과 함께 대회 최우수선수(MVP)에 선정되었다5. 2010년 현역 은퇴 후에는 일본 여자 V-리그 JT 마블러스의 수석코치로 부임하여 요시하라 토모코 감독과 함께 팀을 리그 정상으로 이끌었다. 이후 2025년 4월 대한민국 V-리그 인천 흥국생명 핑크스파이더스의 수석코치로 선임되면서, 부친 우갑식이 1972년 한국 국가대표 상비군으로 선발된 지 53년 만에 대를 이어 한국 배구 무대에서 활동하는 역사적 순환을 완성하였다.
3세대인 손녀 탄야마 츠바키는 일본 여자 배구 최고 명문인 긴란카이 중·고등학교를 거치며 연령별 최고 세터로 공인받았다. 2024년 일본 U18 여자 배구 국가대표팀 주전 세터로 아시아선수권 준우승 및 베스트 세터상을 차지하였고, 2025년 전국고교종합체육대회(인터하이)와 2026년 1월 전일본 고교선수권대회(춘고배구)에서 팀을 잇달아 정상에 올려놓았다.
츠바키는 2026년 간사이대학교 진학 직후 MBC 스포츠 예능 프로그램 《신인감독 김연경 2》의 트라이아웃을 통과해 '필승 원더독스'에 합류하였다. 방송을 통해 한국에 뿌리를 둔 자신의 가족사를 밝히며 할아버지가 1972 뮌헨 올림픽 국가대표 상비군 세터 출신인 우갑식임을 대중에게 알렸고, 이는 잊혔던 재일교포 배구 원로 우갑식이 재조명받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디아스포라 체육사적 함의와 가계의 현대적 귀결
우갑식의 생애와 그로부터 파생된 3대 세터 가계의 궤적은 재일교포 디아스포라가 한일 양국의 경계 속에서 겪어야 했던 제도적 한계와 이를 극복해 낸 스포츠사적 성취를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1970년대 초반 조국의 부름을 받아 국가대표 상비군에 합류했으나 온전히 정착하지 못했고, 거주국인 일본에서는 뛰어난 기량에도 불구하고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배제되었던 우갑식의 미완의 꿈은 세대를 거쳐 새로운 형태로 완성되었다.
국적 변경이라는 실존적 선택을 통해 일본 주류 배구계에 진입한 자녀 세대는 V-리그 무대에서 최고의 기량을 증명해 보였으며, 마침내 아들 탄야마 요시아키가 지도자로서 조국 대한민국 V-리그 코트에 복귀하는 결실을 맺었다. 나아가 손녀 탄야마 츠바키가 한국 매체를 통해 할아버지 우갑식의 이름을 당당히 밝히고 자신의 배구적 원천이 한국 국대 상비군 세터였던 조부에게 있음을 천명한 것은, 차별과 배제로 얼룩졌던 과거의 디아스포라 기억이 현대에 이르러 양국을 잇는 풍요로운 문화·체육적 자산으로 승화되었음을 방증한다.
우갑식이라는 한 재일교포 선수의 발자취는 50여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한일 양국 배구의 정밀한 기술과 정신을 잇는 독보적인 혈통적 가교로 확고히 자리매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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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화 전문기자 multikorea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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